3화
-…….
또라이는 이정환조차도 말문이 막히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이정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감정을 억누른 그가 얼음을 썰어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얼마면 만족하겠나?
“무슨 소리십니까?”
-원하는 만큼 챙겨 줄 테니 래화에게서 떨어지게.
“글쎄요, 장인어른.”
원하는 금액을 말하라는 요구에 권이태는 삐딱하게 대꾸했다.
“돈은 사위도 많은데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래화는 열이 올라 벌게진 이정환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제가 래화 먹여 살릴 만큼은 버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이태는 불같은 사랑에 빠진 남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임을 직감한 이정환은 곧장 회유를 포기하고 협박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그럴 리가요. 대산 건설 이정환 회장님 아니십니까.”
-……그래. 자네 인생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이정환의 협박은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권이태가 쯧쯧, 하고 한심하단 듯 혀를 찼다. 성능 좋은 핸드폰은 혀 차는 소리를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이정환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대산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에게 이런 상식 밖의 무례를 저지르는 존재는 난생처음일 터였다.
“뭐어, 그러시든지요. 그거야 알아서 하시고.”
심드렁한 답과 함께 신호가 바뀌었다.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번갈아 확인한 권이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액셀을 밟았다.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차체가 앞으로 나아갔다.
권이태가 운전석 쪽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엉망으로 들이닥쳤다.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졌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하며 래화를 향해 다른 쪽 손을 뻗었다. 움찔 몸이 굳었으나, 커다란 손은 래화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갈 뿐이었다.
“다음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럼 이만 바빠서.”
핸드폰이 창밖으로 날아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핸드폰은 뒤따라오던 차의 운전석 전면 유리에 충돌했다.
퍽 깨지는 소리와 다급한 급브레이크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뒤에서 사고가 나는데도 권이태는 백미러 한번 보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뒤차는 장인어른이 붙인 꼬리였고, 핸드폰은 위치 추적 붙어 있어서 버렸어.”
차창을 닫은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했다. 래화는 그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너…… 뭐 하는 사람이야.”
“네 남편.”
1년짜리 계약직이면서 남편 소리를 닳도록 해 댔다. 누가 보면 진짜로 죽고 못 사는 연애결혼인 줄 알 터였다. 래화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지난 몇 년간 이정환에게서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을 찾아 왔다. 여러 경호업체와 계약했으나 누구도 대산을 버텨 내지 못했다. 경호원들은 이정환의 회유와 협박에 항상 무너졌다.
결국 민간 군사 기업까지 눈을 돌렸고, 마지막 희망으로 붙잡은 게 권이태였다.
겁 없는 용병들 중에서도 특히 오늘만 사는 것처럼 날뛴다는 미친놈.
권이태라면 대산과 이정환을 겁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진짜로 막 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또라이라서 뒷일 생각 않고 저지르는 행동 같진 않았다.
권이태에게는 대산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의뢰를 하기 전에 권이태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걸 조사했어도, 래화가 알아낼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의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왜 계약 안 깨?”
사실 지금 래화가 제일 알고 싶은 건 이거였다. 이정환은 래화를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권이태가 원했다면, 얼마든지 돈을 쏟아 주었을 것이다. 래화가 약속한 20억이 우스워질 정도로 거금을 말이다.
그걸 알 텐데도 권이태는 이정환의 제안을 걷어찼다. 래화는 권이태를 빤히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은 채 쳐다보는 래화를 본 권이태가 샐쭉 웃었다.
“그게 궁금해?”
“이해가 안 되니까. 그쪽이 은퇴해도 될 정도로 돈 줄 텐데.”
어느새 차는 주차장에 들어와 있었다. 능숙하게 주차를 마친 권이태는 래화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은밀한 비밀을 말해 줄 듯한 제스처에 래화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숨죽이고 답을 기다리는데, 뺨에 가벼운 숨결이 스쳤다. 웃음기 어린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다 늙은 할배보다는 누나가 더 재밌잖아.”
“……겨우 재미 때문에 수십억을 날린다고?”
“어.”
그렇게 말하는 권이태는 정말 재미있어 보였다.
수십억도, 중견 기업의 회장도, 자신의 재미를 위해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래화는 헛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너 미쳤어? 진짜 또라이야?”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속마음에 권이태가 킥킥거렸다.
“아직 나를 잘 모르긴 하는구나.”
“내가 뭘 모르는데.”
“날 아는 사람들은 절대 의문형으로 말하지 않거든. 미친놈아, 또라이 새끼야, 뭐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온점 땅땅 찍어서 말하지.”
“미친 또라이 새끼야.”
배운 대로 곧장 써먹으니 권이태가 숨넘어갈 듯이 웃어 댔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고 래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러는 우리 고객님도 만만찮으신 분이잖아.”
권이태는 래화의 질문을 그대로 흉내 내어 되물었다.
“왜 무서워하질 않아?”
그가 주먹질하고 총질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았다. 단순히 폭력을 행하는 게 아니었다. 권이태는 진심으로 그 상황에 희열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비정상적인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고 피해야 옳았다. 하지만 래화는 그의 폭력성에 놀라긴 했어도, 처음과 다를 바 없이 대하고 있었다. 래화는 천천히 안전벨트를 풀며 입을 열었다.
“그쪽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서.”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자신을 이정환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다면, 래화는 권이태보다 더한 존재에게도 매달릴 수 있었다.
래화의 대답을 들은 권이태는 잠시 침묵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은 고요했다. 정적 속에서 그와 래화는 서로를 응시했다.
“…….”
래화의 눈에서 무엇을 읽어 낸 것일까. 권이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래화에게 가만히 시선을 두던 그가 질문했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한테 반항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게 뭔데.”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상처는 전부 아물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건만, 존재할 리 없는 고통은 여전히 느껴졌다. 래화는 손을 움츠렸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의외로 권이태는 래화의 대답에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20억 걸고 하려는 일이 고작 그거냐고, 역시 고객님은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는 다만 래화를 안심시켜 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돈 받은 만큼은 확실하게 할 생각이니까.”
그러곤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안 그렇게 생겨선 은근히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권이태를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탄 래화는 그가 최고층 버튼을 누르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뒤이어 권이태의 집에 들어섰을 때, 래화는 눈을 의심했다.
원래대로라면 적당한 집을 구해 가짜 부부 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권이태가 안전을 이유로 반대했고, 그의 집에서 머무르기로 결정되었다.
필요한 것만 갖춰진다면 래화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만 작은 집에서 살게 될 불편함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되리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권이태의 집은 초고가로 유명한 아파트의 복층형 펜트하우스였다.
그는 계속 외국에서 일을 해 왔다. 잠깐 한국에 입국했다가 래화의 의뢰를 받은 거고, 계약이 끝나면 다시 출국할 것이다.
그런데 1년짜리 집으로 펜트하우스를 구했다니.
권이태가 용병들 중에서도 유독 몸값이 비싼 편이라고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임시 거처로 펜트하우스를 구할 정도로 돈을 벌어들이진 않을 터였다.
대산의 외동딸인 래화도 이 정도 규모의 펜트하우스에서 살진 않았다. 기업 회장이나 살 법한 집이었다.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간 권이태는 슬링백을 소파에 던져 놓고, 셔츠 단추를 풀어 젖히고 있었다. 핏물로 얼룩덜룩한 셔츠를 벗어 던지자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두꺼운 흉통에 자리한 근육들이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슬랙스만 입은 권이태가 아직도 현관문에 서 있는 래화에게 턱 끝을 까닥였다.
“거기서 뭐 해. 들어와.”
“너 집이 왜 이렇게 좋아?”
대뜸 묻는 말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가 래화에게 다가왔다. 헐벗은 채로 오는 탓에 래화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시선을 한껏 올려 얼굴만 보려고 애썼으나, 시야 끝에 그을린 피부가 자꾸만 걸렸다.
곧은 쇄골을 지나 가슴까지 이어지는 뱀 문신이 눈을 어지럽혔다. 당황한 래화를 놀리듯, 권이태는 바짝 붙어 섰다.
체온이 높은 걸까. 그에게서 더운 열기가 확 느껴졌다. 래화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가 래화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왜, 탐나?”
그리곤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공동 명의 해 줄까,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