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4화 (4/132)

4화

능구렁이 같은 말이 피부를 핥았다. 야릇한 오싹함에 솜털이 쭈뼛 섰다. 반질거리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래화는 그의 눈을 피한 채 받아쳤다.

“줄려면 다 줘.”

“싫어. 공동 명의로 해 놔야 더 부부 같잖아.”

가짜 남편 역할에 과몰입한 권이태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웃음과 함께 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래화는 얼굴을 구기며 쏘아붙였다.

“옷 좀 입어. 그리고 집이 탐나는 게 아니라, 네가 의심스러운 거야.”

말하는 걸 보니 전월세도 아니고 본인 명의인 듯해서 더욱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비밀을 알아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었다. 래화는 그가 1년 동안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부부 사이에 신뢰가 없어서 큰일이네.”

헛소리하는 권이태를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커다란 몸이 앞을 가로막았다.

옆으로 한 발짝 옮기니 또 따라와서 막았다. 무의미한 실랑이가 몇 번 이어졌다.

“왜.”

“그냥.”

마음 같아선 퍽 밀치고 들어가 버리고 싶은데, 맨살을 만질 자신이 없었다. 래화가 힘껏 노려보자, 권이태는 그제야 웃으며 비켜 주었다.

“농담이고, 씻으러 가기 전에 간단히 설명해 주려고.”

길쭉한 손가락이 현관문 위와 거실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1층이랑 2층 거실하고 현관 쪽에는 카메라 있으니까 주의해.”

가리키고 있는데도 어디에 카메라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래화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2층은 내가 쓰는 공간. 위험하니까 웬만하면 올라오지 마. 1층은 방 전부 비워 놨어. 하나는 침대 넣어 놨으니 침실 하고, 다른 방들도 마음대로 써.”

옷방이나 창고로 쓰라며 설명하던 그가 잠깐 말을 멈추더니, 무심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림 그리는 작업실로 쓰든지.”

래화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착각일까. 뭔가 살짝 쑥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기도 전에, 권이태는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잠깐 씻고 올 테니 집 구경하고 있어. 거실 탁자 위에 신분증 가져가고.”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날개뼈와 곧은 척추, 근육의 양감 따위를 살피던 래화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드넓은 거실에 놓인 커다란 탁자 위에 래화의 주민등록증이 비뚜름하게 놓여 있었다. 권이태가 구청에 혼인 신고를 하기 위해 들고 갔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나오느라 유일하게 챙겨 온 소지품인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1층을 돌아다니며 방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침실로 쓰라는 방에는 정말 침대만 덜렁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방들은 가구 하나 없었다. 이렇게 텅텅 비워 둘 거면 도대체 왜 넓은 집을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래화는 마지막으로 베란다에 가 보았다. 마찬가지로 텅 비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그만 탁자가 있긴 했다.

탁자 위에는 재떨이와 라이터가 있었다. 차 안도 그렇고, 담배 냄새는 안 나던데 조금 의외였다. 청소를 자주 하는 모양인지, 재떨이는 말끔했다.

빈 재떨이를 보다가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낯선 풍경이었다. 갑작스럽게 새로운 환경에 떨어지게 된 만큼, 일상의 규칙을 빨리 되찾는 게 중요했다. 급격한 변화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법이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당장 느껴지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해방감이 훨씬 컸다.

래화는 제 핸드폰을 창밖으로 집어 던지던 권이태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그러나 흐릿한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

새파란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새끼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까지 하나씩 접어 나갔다.

손가락이 전부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정환의 말은 항상 똑같았다. 아빠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네가 걱정되어서. 전부 너를 위해서.

그래서 믿었다. 이정환이 진실로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양아버지의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는 착한 딸이, 그가 원하는 가족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정환이 래화의 화실을 찾아냈던 그날, 절실하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정환이 사랑한 이는 오직 류설연뿐이라는 것을.

이정환에게 필요한 건 ‘이래화’가 아닌, ‘류설연의 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류설연의 딸이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 위에 새로운 딱지를 덮었다.

권이태의 배우자.

새로운 법적 보호자는 많이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는 이정환에게서 래화를 지켜 줄 울타리였다.

***

딱 붙는 검은색 드로어즈 하나만 입은 채, 냉동실에 넣어 놓은 담뱃갑을 꺼냈다. 시원한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베란다를 향해 걸어가던 권이태는 잠시 멈칫했다.

핸드폰을 켜서 1층 CCTV 녹화본을 확인했다. 이래화는 밤 11시가 되자마자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간 방이 베란다와 반대쪽이란 걸 확인한 후에 베란다로 들어섰다.

편의점에서 천 원 주고 산 터보라이터와 재떨이가 놓인 작은 탁자를 질질 끌어다 난간 옆으로 옮겼다. 담뱃불을 붙인 그는 야경으로 물든 도시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연기를 뱉었다.

펜트하우스는 이런 게 좋았다. 위층에 아무도 없으니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것.

난간에 느슨히 기댄 채 불량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데, 탁자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가 소리를 질렀다.

-권이태! 너 무슨 짓 하고 있냐?

“무슨 짓 하긴. 일하고 있지.”

-슈미트가 당장 귀국하라고 난리인데.

“으음, 그 형님이 왜 그러실까…….”

나른한 목소리가 조용한 베란다에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뻔뻔스럽게 모르는 척 대꾸하니 최정이 재밌다는 듯 낄낄 웃었다.

민간 군사 기업 데저트의 대표, 슈미트는 독일인이었다. 독일인답게 농담할 줄 모르는 원리원칙주의자에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이였다.

그런 슈미트가 유일하게 핏대 올리며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가 있었으니, 바로 권이태와 엮인 일이었다.

-너 갑자기 사라져서 뒷목 잡고 넘어가더라. 진짜로 한국 갔어? 류설연 딸 의뢰 받았냐?

“류설연 딸 아니고 이래화.”

-그거나 저거나. 얼마 주는데?

“20억.”

-미, 미친……. 진짜야?

“응. 그래서 결혼했어.”

최정이 침묵했다. 잠시 헛기침한 그가 점잖게 말했다.

-내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데. 결혼을 했다고…….

“제대로 들었는데?”

핸드폰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권이태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 놓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재떨이에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고, 새 담배를 꺼냈다. 담뱃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마셨다가 뱉었다.

“최정.”

-왜, 미친놈아.

“나 좀 도와라.”

-…….

“생각보다 일이 더 복잡한 것 같아. 전체적으로 조금 기묘하다고 해야 하나…….”

이래화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순히 계부한테 반항하는 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상했다.

이래화에게 기이할 정도로 집착하고 통제하려는 이정환. 그런 이정환에게 트라우마 수준으로 거부감을 내보이는 이래화.

분명히 뭔가 있긴 있었다. 권이태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대. 이상하잖아.”

-그게 뭔 상관인데.

“상관있지. 내가 걔한테 담배 가르쳤는데.”

-뭐? 너 이래화랑 아는 사이였어?

“음……. 아니.”

-씨발, 무슨 개소리야.

또다시 욕설을 내뱉기 시작한 최정을 두고 권이태는 조용히 웃었다.

“한국 들어와서 일 좀 해 줘. 그거 줄게. 너 탐내던 파파라차 사파이어. 물론 보수는 별도.”

-바로 팀 꾸리겠습니다, 이태 님.

일단 신혼집부터 손 봐 달라고 요구했다. 급한 대로 기본적인 장치를 해 두긴 했지만, 세이프 하우스로 삼기엔 많이 부족했다.

그 외에 필요한 인물과 물건들을 말하고, 몇 가지 지시를 추가로 내렸다.

“최대한 빨리.”

-오케이. 그런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뭐.”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경호질을 왜 하냐? 결혼까지 해 가면서. 너 돈 보고 움직이는 놈 아니잖아.

“글쎄…….”

그러게, 왜일까.

권이태 또한 의문스러웠다. 의뢰를 받는 기준은 항상 동일했다. 가장 폭력적일 수 있는 환경. 하여 레드존에 파견 가는 의뢰가 아니곤 대부분 거절해 왔다.

잠잠하게 다물린 입술이 문득 비틀린 미소를 그렸다.

“재밌잖아.”

툭 튀어나온 대답에 최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너무 괴롭히지 마.

“응?”

-이래화 말이야. 괴롭히지 말라고. 딱 봐도 부잣집에서 곱게 큰 아가씨 같은데, 너 같은 미친놈이랑 같이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어.

진지한 충고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최정이 이래화를 만나는 상상을 하니 벌써 재밌었다.

“무슨 소리야.”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 내며, 권이태는 즐겁게 말했다.

“우리 자기, 개또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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