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5화 (5/132)

5화

아침 8시 기상.

침대에서 5분 동안 짧은 명상을 시작했다. 보통 너튜브에서 정신 건강에 좋은 명상 음악을 찾아 틀어 놓는데,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어서 오늘은 그냥 침묵 속에서 진행했다.

명상을 끝낸 후에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정수기에서 온수를 삼분의 이쯤 받은 다음, 너무 뜨겁지 않게 냉수를 조금 섞었다.

따끈한 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냉장고를 열었다. 샐러드나 간단한 한식으로 아침 식사……를 해야 하는데.

“…….”

냉장고를 열어 본 래화는 잠시 멍해졌다. 냉장실에는 초코우유 십여 개가 각을 맞춰 착착 세워져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동실을 열어 보니 더 가관이었다. 냉동실에는 담배 보루와 아이스크림뿐이었다.

아니, 담배를 왜 냉동실에 넣어 놔?

제정신 아닌 건 알았지만, 정말 다양하게 미친 짓을 해 댔다. 냉장고 문을 닫은 래화는 하다못해 시리얼이라도 없나 열심히 부엌을 뒤적였다.

혼자서 열심히 부스럭대고 있자니 계단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걸어오는 권이태는 짧은 반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치는 래화를 보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래화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노출증 있어?”

“옷 입었잖아.”

그러더니 반바지의 허리 밴드를 죽 잡아당겨 보였다. 래화는 질색하며 눈을 돌렸다.

“위에도 입어!”

“왜. 이거 돈 주고도 못 보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인체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남자의 몸을 보았다. 주로 패션모델들의 사진이나 영상자료를 많이 봤는데, 탐미를 추구하는 업계인 만큼 다들 아름다운 조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권이태는 그들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심미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니기 때문일까. 날렵하고 탄탄한 근육은 세심하게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야생적인 느낌이 들었다. 특히 대흉근에서 허리, 그리고 엉덩이로 이어지는 선이…….

미쳤나 봐.

무의식적으로 주르륵 이어진 생각들에 귓불이 화끈거렸다. 래화는 생각을 쫓아내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줄 테니까 못 보게 해 줘.”

“미안. 원래 집에서 벌거벗고 다녔거든.”

권이태가 살살 달래듯 사과했다. 래화는 여전히 애매한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뭐 찾고 있었어? 찾아 주고 나서 옷 입으러 갈게.”

“아침으로 먹을 게 없어서.”

“먹을 거 많은데?”

권이태가 당당하게 냉장고를 열어젖히고 초코우유 군대를 가리켰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저걸 아침 식사랍시고 보여 주다니. 래화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너 그러다 빨리 죽어.”

“에이.”

그는 초코우유를 하나 꺼내선, 못생긴 캐릭터가 그려진 우유갑의 하단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보이지? 열한 가지 비타민에 엽산, 칼슘.”

“…….”

“나름 괜찮다고.”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이태가 킥킥 웃으며 래화의 손에 초코우유를 쥐여 주었다.

“그거 몰라? 원래 다 유전자야. 되는 놈은 정크 푸드에 콜라만 처먹어도 안 죽어.”

난 되는 놈이라며, 권이태가 빙글빙글 웃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래화는 초코우유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맞아, 다 유전이지.”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권이태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분위기를 환기하듯, 그가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아이스크림은 싫어해?”

왠지 아침 식사로 아이스크림 먹자고 할 분위기였다. 몸에 안 좋다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식성 차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그냥 간단하게 답했다.

“이 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없어.”

“뭐 좋아하는데. 내가 사 줄게.”

순진한 아이를 꾀어내는 양아치처럼 샐샐 웃는 권이태에게 빠르고 명료하게 선호 아이스크림을 보고했다.

“제일 좋아하는 건 깐도X. 그 외에는 비X빅, 아맛X, 파X통통 같은 팥 들어간 거.”

“누나……. 입맛도 꼰대였구나.”

백화점에서만 사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걸 좋아하다니 의외라며, 31가지의 다채로운 맛을 자랑하는 아이스크림은 먹어 봤냐며 실실대는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권이태는 아직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싫어하는 건?”

말 안 해 주면 해 줄 때까지 달라붙을 기세였다. 그냥 빨리 대답해 주고 치우는 게 나을 터였다. 래화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꽃.”

말해 놓고서 아차 싶었다. 꽃이 싫다니,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이었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저도 모르게 살짝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권이태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간단히 되물을 뿐이었다.

“이름 때문에?”

이래화(李來花). ‘꽃이 오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은 래화의 어머니, 류설연이 지어 주었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다.

본가에는 사시사철 꽃이 가득했다. 특히 류설연이 작업을 위해 머무르는 화실은 안팎으로 꽃이 가득해서, 머무르다 보면 몸에 꽃향기가 밸 정도였다.

꽃밭이나 다름없던 화실에서 지켜보았던 엄마의 자살.

그날의 다른 기억은 전부 희미했다. 하지만 흐드러진 꽃 속에서 그녀가 래화에게 쉴 새 없이 뱉어 냈던 말들은 또렷했다.

“너도 똑같아. 나랑 똑같이, 이렇게 될 거야. 래화야, 이래화, 내 작은 꽃. 너도 엄마처럼…….”

그 이후 래화는 꽃이 혐오스러웠다. 꽃을 볼 때마다 녹화된 듯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괴로워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새까맣게 퍼져 나가는 회상을 억지로 지워 내고 입을 열었다.

“……그냥 싫어.”

래화는 곧바로 다른 말을 꺼냈다.

“외출 준비해. 밖에서 아침 먹자. 그리고 쇼핑 갈 거야.”

어제 당장 급한 물건들은 간단히 배달시키긴 했지만, 사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방에 가구도 채워 넣으려면 오늘 온종일 쇼핑만 해도 빠듯할 터였다.

해야 할 일과 필요한 물건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다가 멈칫했다. 어제 급하게 잠옷이랑 속옷은 샀는데, 외출복을 깜빡했다.

바지까진 괜찮지만 입었던 티셔츠를 또 입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다가 슬쩍 권이태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헐벗은 목과 가슴팍에 구불거리는 뱀 문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를 불렀다.

“저기.”

내리깐 눈이 느리게 래화를 바라보았다.

“나 옷 좀 빌려 줘. 윗옷.”

“싫어.”

또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권이태가 씩 웃었다.

“저기 말고 자기라고 부르면.”

“…….”

래화는 말없이 눈으로 욕해 주었다. 킥킥대며 2층으로 올라간 권이태는 잠깐 방에 들어가더니 금방 옷 한 벌을 들고 나왔다. 그가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실에 서서 얌전히 기다리던 래화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래화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는 얄궂은 미소를 함빡 머금고 있었다.

시선의 맞닿음이 길어졌다. 저 남자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만, 괜히 고집이 생겨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긴 눈매 위로 웃음기가 스쳤다. 난간에 팔꿈치를 얹은 권이태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모양 좋은 입술이 느긋하게 이름을 불렀다.

“래화야.”

제가 들고 있는 회색 맨투맨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랑 있는 결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며. 미리 연습해야지.”

정말이지 옳은 소리만 해서 더 짜증 났다. 래화는 무표정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옷 좀 줄래, 자기야.”

권이태가 웃으며 2층에서 옷을 던졌다. 떨어지는 옷을 받아 든 래화는 그를 흘겨보다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

쉽게 해결할 일이라 여겼다.

혼인 신고까지 해 버린 건 확실히 놀라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금방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이래화의 반항은 길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통제를 잃어버린 적은 처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가 끼어들어 분탕을 치는 탓이었다.

이래화와 혼인 신고를 하고, 자신이 남편이라 주장하는 남자.

이정환은 커다란 스크린에 띄운 사진을 노려보았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나운 눈매와 안광이 도는 눈동자, 큼직한 근육질의 몸, 목선을 타고 오르는 흉한 뱀 문신까지. 척 보기에도 질이 좋지 않은 놈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단순한 깡패나 조폭이 아니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에 멘 것은 길쭉한 돌격 소총이었다. 방탄복을 입고, 허벅지에는 대검을 찬 남자의 손과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정환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용병이라고?”

“PMC(민간 군사 기업) 쪽에서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비서실장의 말처럼 권이태의 이력은 화려했다. 굵직한 전투에서 각국의 특수 부대들과 협동 작전을 펼친 이력이 끝도 없었다.

“불가능한 작전에 투입되어도 어떻게든 임무를 수행해 내고, 동료들의 목숨까지 챙겨서 온다고 합니다.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이들은 권이태에 대해 하나같이 공통된 평을 내렸는데…….”

잠시 망설이던 비서실장은 적나라한 비속어를 최대한 돌려서 표현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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