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정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험악한 특수 부대원들과 용병들에게 저런 평가를 듣는 놈이라니.
확실히 짧게 통화했을 때도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라고 느끼긴 했었다.
“실력이 워낙 뛰어난지라, 여러 군데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전부 거절했습니다. 정부의 제의는 물론이고, 아랍 왕족이 PMC 업계에서 전례 없는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연봉 액수를 들은 이정환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제정신 아닌 거 맞군.
“……이런 제안까지 걷어차고 남은 상황이니, 권이태가 소속된 회사, 데저트를 압박해도 별다른 효과는 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정환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여태까지 래화가 곁에 누군가를 두면 보통 돈으로 떼어 냈다. 그러고도 안 되는 놈은 적당한 협박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권이태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애초에 돈 따라다니는 놈이었으면 진즉 아랍 왕족의 경호일이나 하며 살고 있었으리라.
협박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래화가 일하던 카페의 CCTV와 추적하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통해 그의 실력을 확인했다.
이정환이 고용한 사람들도 프로이건만, 권이태와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국제급으로 노는 놈이니 비교 불가한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 놈이 왜 갑자기 래화에게 붙은 게지? 래화와 계약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저도 그 부분을 가장 염두에 두고 조사해 보았으나,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됩니다.”
“이유는?”
“권이태는 여태 레드존, 즉 위험 지역의 임무만 받아 왔습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처럼 위험한 곳만 찾아다니며 날뛰다가, 갑자기 한국에 들어와 이래화와 결혼한 것이다.
휴전 국가인 한국은 권이태가 활동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임무도 극히 단순한 경호에 불과하니, 그가 맡을 수준 또한 아니었다. 돈 때문에 움직이는 놈이 아니기에 더더욱.
“아가씨의 계좌를 확인했지만, 의뢰비로 추정할 만한 출금 내역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뢰를 이유로 혼인 신고까지 진행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일단은 정말 사랑에 빠졌다……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나.”
첫눈에 반해서 불같이 타오르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익숙한 흐름이었다. 류설연과의 사랑을 회상하던 이정환은 짧은 조소를 머금었다.
이 상황이 진짜이건 아니건, 이래화가 이정환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이놈이 래화하고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접점은 찾아냈나?”
여태 막힘없이 술술 설명하던 비서실장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찾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따라올 대답을 기다리던 이정환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작업을 해 둔 듯합니다. 현재 위조 신분을 사용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그 이상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정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산의 회장이 된 이후,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니.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권이태를 감추는 세력이 대산보다 위라는 것이다.
“하, 이것 참…….”
이정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름진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불뚝 솟아났다. 화를 억누르는 신음이 다물린 잇새로 새어 나왔다. 점점 더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에 눈앞이 아찔했다.
“이를 어찌해야겠나, 박 실장.”
“얼마나 대단한 배경을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추고 있다는 건 함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장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또한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 봤자 개인이지 않습니까. 혼자서 수십, 수백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정환을 안심시킨 비서실장은 침착하게 자신이 생각해 온 방안을 말했다.
“제 생각엔 권이태에 대한 조사를 추가로 진행하면서, 우선 우회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우회적인 방법?”
“예. 일단은 아가씨를 모셔 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
그가 구체적으로 방법을 설명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이정환은 비서실장의 설명이 끝나자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좋아. 박 실장 말대로 진행해 보지.”
***
래화는 아까부터 계속 줄줄 흘러내리는 소매를 다시금 둘둘 말아 젖혔다.
빌려 입은 옷이 너무 컸다. 예상보다도 많이 커서 옷을 휘적거리면서 다녀야 했다.
래화의 키가 168cm였다. 어디 가서 작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키인데도 포대를 뒤집어쓴 꼴이 되어 버리다니, 권이태가 정말 크구나 싶었다.
옷부터 사야겠다…….
래화는 자신이 두 명 들어가도 넉넉할 맨투맨을 추스르며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저만치에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짝다리를 짚은 채 통화 중인 권이태가 보였다.
브런치 카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그는 래화 몫까지 계산하고 먼저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 업무 전화인 모양이었다. 인상 쓴 얼굴로 전화 받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며시 그를 피해 갔다.
네크라인이 헐렁한 티셔츠를 입어서 뱀 문신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거기에 험악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정말 나쁜 사람처럼 보였다.
래화도 길에서 저런 사람을 만났다면 멀찍이 피해 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행이라서 어쩔 수 없이 타박타박 다가갔다.
“……마카오라고?”
권이태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재촉했다.
“결론만 말해.”
래화는 걸어가던 발을 멈췄다. 가라앉은 눈빛이 서늘했다. 위장막처럼 둘러놓았던 가벼운 분위기가 싹 사라진 남자는 낯선 존재 같았다. 상대방의 말을 듣던 그가 짧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 그치?”
그러더니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차갑게 명령했다.
“넌 빨리 들어와. 48시간 안으로.”
상대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권이태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래화를 돌아보았다. 품이 큰 옷을 손으로 말아 쥐고 걸어오는 꼴을 보며 씩 웃었다.
“뭐야, 천천히 먹고 나오지.”
방금까지 고압적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변화를 지켜보던 래화는 조용히 대답했다.
“다 먹었어.”
래화의 기준으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를 그는 한 걸음 만에 다가왔다. 제 옷에 파묻힌 래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권이태가 갑자기 눈매를 찡그렸다.
“너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 어떡하냐, 래화야.”
래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기는 예전부터 많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래화의 외모는 평균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권이태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 터였다.
“그거 무슨 뜻…….”
말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래화는 황급히 권이태 뒤에 몸을 숨겼다.
“왜, 뭔데.”
권이태는 자연스럽게 래화를 가려 주며 주변을 살폈다. 권이태의 덩치가 커서 등 뒤에 완전히 숨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이미 래화를 봐 버린 듯했다.
“래화야!”
저만치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발랄한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래화는 애꿎은 권이태의 등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이태가 몹시 놀랍다는 듯 물었다.
“친구도 있었어?”
“친구 아냐.”
“그러면?”
“나랑 친한 척하는 사촌.”
이세연은 이정환의 동생, 이학수의 딸이었다. 차남인 이학수는 승계에서 밀려 호텔 하나만 얻어 갔다.
하지만 그는 호텔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학수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래화를 쫓아내고, 자기 아들딸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대산 건설까지 상속받길 바랐다.
이세연은 그런 부모의 뜻을 받아, 이정환에게 마치 제가 친딸이라도 되는 양 살뜰하게 굴었다. 래화에게도 항상 다정한 척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수월한 염탐을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이정환한테 쫓아갔다. 그리고는 래화가 걱정스러워서 말씀드린다며 일러바치곤 했다.
이정환 몰래 숨겨 왔던 화실이 들킨 것도 이세연 때문이었다. 래화로서는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는 상대였다.
이세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동안, 래화는 빠르게 말했다.
“회장님한테 목매다는 집안이야. 이세연 앞에서 너랑 내가 하는 말이랑 행동, 전부 회장님 귀로 들어갈 테니까 조심해.”
래화는 권이태가 제 말을 흘려들을까 걱정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래화가 하는 경고는 무척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이세연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사촌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방긋방긋 웃는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작고 귀여운 외모와 밝은 분위기를 가진 그녀에게서 래화가 경고하는 음침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래화는 망설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저렇게 보여도 겉과 속이 다르니까.”
하지만 굉장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권이태가 웃으며 래화의 팔을 붙잡았다.
“……!”
허리가 확 끌어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했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권이태를 밀어내는 대신, 래화는 저를 붙든 두툼한 팔뚝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제법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래화를 옆구리에 꼭 끼워 넣은 권이태가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해 줄까.”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묘한 긴장감에 잠긴 채, 래화는 그에게 마주 속삭였다.
“뭐를?”
“네 사촌.”
권이태가 혀로 딱 소리를 내며 목 위를 검지로 슥 그어 보였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