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가슴 안쪽이 정전기라도 난 듯 따끔했다. 저릿한 감각에 숨이 막혀서 입술을 조금 벌렸다.
언제나 증명해야 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이들에게 류설연처럼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것.
래화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래화에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떠한 동정심도 비치지 않고 정상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낯선 기분에 잠겨 권이태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정상이라 말해 주는 순간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냥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는, 아무런 문제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권이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래화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조금 긴장되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쿵쿵 뛰었다.
어느새 다시 흘러내려 손을 뒤덮은 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뭐가?”
“나 정상이라고 말해 줘서. 이세연 쫓아내 준 것도…….”
느낀 감정에 비해 담백하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떻게 잘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간단하게만 말했다. 불 옆에 선 것처럼 뺨이 화끈거렸다.
검은 눈동자가 래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 없이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고맙다는 말에 대한 반응치고는 이상한 눈이었다.
침묵이 너무 길어져서 뭔가 실수라도 했나, 생각한 순간이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던 권이태가 갑자기 탄식하듯 이름을 불렀다.
“래화야…….”
그러더니 입꼬리를 쭉 올리며 웃었다. 매끈한 뺨 위에 보조개가 옴폭 생겼다.
“존나 귀엽네, 진짜.”
거친 어조 때문에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던 래화는 뒤늦게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귀엽게 굴었다는 것일까.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말 좀 곱게 해.”
하지만 권이태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낄낄 웃으며 래화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래화는 인상을 쓰며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붉어진 뺨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
차를 주차한 곳까지 도망치듯 뛰어왔다. 차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안전한 곳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윽, 흐…….”
이세연은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쿵쿵거리는 힘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아 냈다. 백미러를 당겨 발개진 눈을 확인했다.
부어서 두툼해진 쌍꺼풀 라인과 엉망으로 번진 화장을 보고 나니 다시금 울음이 북받쳤다. 이세연은 꺽꺽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세연아?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서러워졌다. 이세연은 거의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 엄마아…….”
-울어? 무슨 일이야! 누가 내 딸 울렸어!
강미옥이 뾰족하게 치솟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 편을 드는 사람의 등장에 이세연은 히끅히끅 흐느끼면서 일러바쳤다.
“응, 엄마, 그 정신병자가아……! 이번엔 진짜 제대로 미쳐선……!”
강미옥은 이래화가 이상한 짓을 저지른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사람을 붙였다. 예전 같았으면 무리 없이 이래화의 일상 전부를 알게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람을 붙이는 족족 떨어져 나가서, 도대체 뭘 할 수가 없었다. 이정환이 붙인 사람마저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강미옥은 심상찮음을 느꼈다.
하여 이세연에게 직접 이래화를 찾아가 보라고 한 것이다.
이래화한테 관심 많은 이세연은 신나서 찾아갔고, 호되게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 모욕적인 순간을 되새기던 이세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로 이상한 남자였다.
190cm는 가볍게 넘는 듯한 거구의 남자는 불량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목덜미를 휘감은 뱀 문신도 그렇고, 눈빛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외모는 어찌나 매끈하게 잘생겼는지,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배우며 아이돌이며 여럿 만나 봤지만, 남자는 그중에서도 빼어난 외모였다. 위험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남자에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던 이래화가 이런 나쁜 남자 스타일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줄이야.
굉장히 의외였지만 이만한 외모라면 혹할 법도 했다. 호기심 가득한 인사를 건넨 이세연은 돌아온 대답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래화 남편입니다.”
이 양아치 같은 놈이 남편이라고?
머리가 얼얼해지는 충격은 이내 기쁨으로 바뀌었다. 잠깐 하는 연애면 몰라도, 이런 하층민이랑 결혼이라니.
제대로 미친 짓거리였다. 이번에야말로 이래화가 호적에서 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뻐서 폭죽이 팡팡 터지던 마음은 금방 진창으로 곤두박질쳤다. 첫인상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남자는 사납고 난폭했다. 그가 윽박지르던 말들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웬 양아치를 남편이라고, 흑, 하는데, 그놈이 나한테……!”
부잣집 아가씨로 곱게 자란 이세연이었다. 언제나 모든 사람이 친절했던 그녀의 인생에서 이런 무례한 놈은 처음이었다. 남자에게 내심 호감을 품었기에 더욱 수치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제게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이세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놈이 얼마나 저를 속상하게 만들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말했다. 차분히 들어 주던 강미옥이 이세연의 말을 끊었다.
-우리 딸, 잠깐만. 래화가 식도 안 올리고 결혼을 했다고?
“응! 사고 쳐서 애라도 가졌나 싶어. 남자한테 관심 없는 척하더니, 류설연 닮아서 밝히나 봐.”
-그래. 회장님께 연락드려야겠네. 엄마랑 오랜만에 큰아빠 뵈러 가자.
“응응, 알았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이세연은 코를 훌쩍이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한테 하소연하고 나니 마음이 풀렸다.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고쳤다. 쿠션을 톡톡 두드리며 백미러에 요모조모 얼굴을 비추던 이세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외모는 솔직히 상위권에 든다고 자부할 만했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늘 보았던 이래화가 떠올랐다.
“…….”
이래화는 여전히 예뻤다.
희고 투명한 피부에 주먹만 한 얼굴, 모델처럼 마르고 늘씬한 몸. 사이즈가 맞지 않는 남자 옷을 입고 있는데도, 몸매가 좋으니 일부러 톰보이룩을 입은 듯이 보였다.
새초롬한 눈매에 담긴 특유의 무심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뭘 해도 세련되어 보이는, 가만히 있어도 눈길을 끄는 사람.
한때 이래화처럼 되고 싶어서 무턱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따라한 적도 있었다. 옷 입는 스타일, 말투와 표정, 사소한 버릇까지 흉내 내고, 마른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 봤자 이래화는 이래화였고, 이세연은 이세연이었다.
죽은 엄마에게 예쁜 얼굴을 물려받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아빠에게 대산 건설의 막대한 부를 물려받을 이래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세연이 부러워하는 모든 걸 가지고서도,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아는 이래화가 얄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감사할 줄 모르는 년은 쫓아내고…….
어느새 손톱을 잘근거리던 이세연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남자 뒤에 숨어서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이래화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탓이었다. 짜증스럽게 손으로 핸들을 퍽 내려치던 때였다.
“……어?”
이세연은 멈칫 굳어졌다. 그 남자, 가만 생각해 보니 뭔가 얼굴이 익숙했다.
“어디서 봤지?”
그만한 외모이니 한 번 스치듯 본 것만으로도 인상이 남은 듯했다. 하지만 저런 하층민이랑 재벌가 아가씨인 자신이 만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디 경호업체 소속이어서 지나가다 본 것일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한참 더듬던 때였다. 희미한 기억의 단편이 벼락처럼 번쩍 떠올랐다.
“……!”
앉은 자리에서 몸을 펄떡이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세연은 다급히 조수석에 던져 둔 핸드폰을 움켜쥐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엄마! 회장님께 연락했어? 아직 안 했지? 하지 마!!”
당황해하는 강미옥에게 이세연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 이래화 남편, 누군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