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권이태가 휘적휘적 뒤쫓아 왔다. 그가 칭얼거리며 달라붙었다.
“자기야, 남편 뒤지겠어요.”
막 결제를 끝낸 래화는 그에게 새 쇼핑백을 안기며 냉정히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마. 너 며칠씩 안 자고 안 먹고 할 수도 있잖아.”
“어떻게 알았어?”
“영화에서 봤어.”
권이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긴 진짜 또라이야.”
래화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더니, 저쪽을 향해 턱짓했다.
“저거 예쁘네.”
파스텔색 꽃무늬 원피스였다. 하늘하늘한 재질은 래화가 입어 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따라다니느라 힘들 테니, 하나 정도는 권이태가 추천하는 걸 사 봐도 좋을 듯했다. 마네킹이 입은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본 래화는 곧바로 원피스를 결제했다.
“안 입어 봐도 돼?”
“괜찮아. 마네킹이랑 사이즈가 비슷해서.”
쇼핑백을 받아 든 권이태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아히 쳐다보던 래화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조금 웃었다.
오랜만에 백화점을 돌아다니니까 재밌었다. 보통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사거나, 퍼스널 쇼퍼에게 주문해서 배송 받곤 했던지라 직접 쇼핑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근검절약하는 마음으로 적당한 브랜드에서만 쇼핑하는 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사고 나니 옷값으로 천만 원은 금방이었다.
아껴 써야지…….
지금 래화가 쓰는 돈은 류설연이 그림을 판 돈을 일부 떼어 남겨 준 것이었다. 차명 계좌인지라 이정환도 존재를 몰랐다. 여태 그대로 두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권이태를 고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까지 계약했던 경호원들의 보수는 이정환에게서 받는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권이태는 급이 달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래화는 주머니에 든 카드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이따금 참을 수 없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류설연의 유산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똑같은 생각을 반복하곤 했다.
엄마도 서툴렀을 거라고. 나를 사랑했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거라고. 여기 그 증거가 있지 않냐고.
류설연을 변호하는 일은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애증으로 얼룩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닦을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 엄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권이태가 어깨 위에 턱을 얹었다.
“아직 장인어른이 카드 정지 안 시켰어?”
하여간 사람을 가만 놔두질 않았다. 래화는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진즉에 정지됐는데.”
“그럼 무슨 돈으로 쇼핑하는 거야.”
“내 돈.”
“나한테 의뢰금 주면 남는 건 있나?”
“없지.”
이미 선수금 10억을 주면서 잔액이 확 줄었다. 래화는 남은 돈을 가늠하며 답했다.
“1년 동안 생활비 쓰고, 그 후에 나머지 잔금 10억 주고 나면 몇천 정도 남겠네.”
래화의 대답을 들은 권이태가 몹시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 1년 뒤에는 뭐 하면서 먹고 살려고?”
“그림 그려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인생 계획 전반을 물어볼 태세였다. 그가 더 캐묻기 전에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 화방 가자.”
권이태는 흘긋 래화가 붙잡은 제 팔을 쳐다보더니, 순순하게 따라왔다. 쇼핑 가방을 잔뜩 차에 싣고 화방으로 향했다.
우선 당장 사용할 건식 재료 몇 가지와 드로잉북만 구매했다. 유화 물감과 캔버스, 붓 등등은 없는 게 많아서 주문을 넣었다.
화실을 잃어버리면서 손에 익었던 도구들이 모두 사라졌다. 전부 새로 장만하려니 쉽지 않았다.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라 더욱 그랬다.
물감 몇 가지는 단종이었는데, 재료가 되는 광물이 고갈되어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말에 크게 상심했다.
아쉬운 대로 주문하고 빠트린 것은 없나 다시금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는데, 하릴없이 쫓아다니던 권이태가 괜히 툭툭 시비를 걸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약 같은 거 구해 줄까?”
“……진심이야?”
“예술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먹지 않나.”
“난 아니야.”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재차 꿋꿋하게 물었다.
“그럼 술이나 담배?”
“담배 안 피운다고 했잖아. 술도 안 마셔.”
그런 데다가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1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 예전과 비슷한 기량으로 올리려면 손 푸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 뭘 그릴지 구상 잡고, 유화 물감을 말리는 건조 시간까지 고려하면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정환이나 이세연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거기에도 시간이 뺏길 걸 생각하면 정말로 빠듯했다.
어쩌면 물감이 다 마르기도 전에 1년이 지날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부터 간단한 드로잉을 하며 감을 되찾는 일에 집중할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보던 래화는 불쑥 생각했다.
그런데 뭘 그리지?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시선 끝에는 색색의 물감을 무료하게 구경하는 권이태가 있었다.
시야에 담긴 이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웠다. 이미 대상으로 삼기에 완벽한 조형물이었으나, 만족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폭력에서 느끼는 희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새까만 눈동자.
순수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빚은 그로테스크를 깨부수는 장난스러운 웃음.
비뚤어진 영감이 하얀 캔버스 위에 흩뿌려지는 검고 붉은 물감을 상상하는 순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권이태.”
남자의 눈은 잔잔했다. 고요한 표면 아래에 감춰진 것을 꺼내고 싶다는 충동은 본능과도 같았다.
그건 붓을 잡는 사람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욕망이었다.
“내 모델 할래?”
***
탕.
날이 새파란 식칼이 나무 도마를 내려쳤다.
탕. 탕. 탕.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굵직한 무가 퍽퍽 썰려 나갔다. 평소라면 정갈하게 간격을 맞췄겠지만, 오늘은 무를 반쯤 학살하듯 아무렇게나 썰었다. 무를 동강 내는 래화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던지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제안은 아니었다.
류설연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진부한 발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래화 스스로 강렬하게 충동을 느끼는 소재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정상인으로 살기 위해 몇 년간 절제와 금욕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살아온 래화였다. 좋은 영감을 받을 만한 구석이 일절 없었다.
그런데 최근 뇌가 번뜩일 만큼 충격적인 자극이 있었고, 그게 권이태였고, 그래서 제안한 건데…….
“뭐, 누드모델?”
탕!
식칼로 도마를 부술 듯이 내려찍었다. 불쌍하게 썰리던 무 조각이 기어코 픽 하고 튀어서 부엌 바닥에 떨어졌다. 래화는 이를 꽉 물고 중얼거렸다.
“누드모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헐벗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노출증이 틀림없었다. 래화는 무를 마구마구 썰었다.
고등어 무조림에서 고등어 미니 무조림으로 메뉴가 바뀌던 도중, 삐리릭 현관문 잠금이 열렸다. 문제의 권이태가 등장하는 소리였다.
뭐 좀 가져오겠다며 잠깐 혼자 나갔던 권이태는 손에 커다란 종이 가방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집 안에 가득한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어색하게 종이 가방을 내려놓고선,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부엌에 들어왔다. 그는 앞치마를 입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래화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해?”
“저녁 만들어.”
래화는 그동안 잔뜩 괴롭혀서 박살난 무 조각을 칼로 대강 슥슥 그러모았다.
“난 인스턴트나 배달 음식 싫어해. 앞으로 계속 밥할 건데, 너도 같이 먹든지. 먹을 거지?”
멍하니 듣던 권이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대충 만드는 중이었어.”
아무래도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양념 간을 매콤하게 잡았다. 어린애 입맛이 분명하니 소시지도 구우려던 참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만들어 줄게.”
래화는 손에 든 식칼을 까닥거리며 덧붙였다.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칼 들고 있으니까.”
밥 다 차려 놨는데 헛소리를 하면 미니 무조림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래화의 협박에 권이태가 얌전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그거, 칼 든 사람한테 받아 본 협박 중에서 최고였어.”
그리곤 주는 대로 먹겠다고 답했다. 흡족한 대답을 들은 래화는 다시 요리를 이어 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권이태는 요리하는 내내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배가 고픈가 싶어서 중간중간 맛을 보게 해 줬더니, 재미가 들렸는지 다 집어 먹으려고 해서 힘들었다.
간신히 저녁을 완성하고 조금 늦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전에 브런치는 무척 적게 먹기에 소식하는 줄 알았는데, 권이태는 엄청난 대식가였다.
밥을 국그릇에 퍼 놓고 먹어 치우는 모습을 구경하며, 젓가락으로 집기도 힘들 만큼 작게 썰린 무 조각을 숟가락으로 떠먹던 때였다. 조용히 밥만 먹던 그가 갑자기 질문했다.
“내가 모델로 필요한 거야?”
“왜, 벗어 주려고?”
삐딱한 마음으로 툴툴거리며 받아치는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권이태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눈웃음쳤다.
“당연히 벗어 드려야지.”
샐쭉한 눈웃음에 래화는 몸을 움찔 떨었다. 본능적인 불길함이 느껴졌다. 뭔가 엄청난 헛소리를 할 것 같다는 불길함이었다.
“근데 누나, 그거 알아?”
둘밖에 없는 조용한 집 안에 소곤소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백자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