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땡그랑.
젓가락이 식탁 위에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손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래화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급속 냉동한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다가 입술만 달싹였다.
“백, 뭐, 백…….”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단어였다. 더듬거리던 래화는 겨우 질문을 던졌다.
“왜……?”
왜 그런 망측하고 이상한 짓을 저질렀냐는 질문이 압축된 한 단어였다.
“외국에서 오래 있었으니까. 보여 줘?”
실실거리던 권이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바지를 벗어 던질 기세였다. 래화는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권이태는 미친 듯이 낄낄 웃어 댔다. 래화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해외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래까지 제모한다고 듣긴 했다.
그래도 여긴 한국이지 않은가!
뼛속까지 한국인인 래화에게는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았다. 일부러 래화를 놀리려고 저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다시 의자에 털썩 앉은 권이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하튼 나를 모델로 쓰시려거든 백자지인 부분도 참고하시라, 이 말이지.”
“……꼭 그렇게 상스러운 단어를 써서 말해야 해?”
“백자지. 백자지. 백자지.”
“제발.”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불타는 느낌이었다. 래화는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너 앞으로 나물 반찬만 해 줄 거야.”
“아, 안 돼. 햄도 구워 줘.”
반찬 메뉴를 놓고 얼마간 설전을 벌인 끝에, 두 번 다시 그 상스러운 단어를 입에 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힘겨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래화는 포트에 물을 끓였다. 잎차를 우려서 내어 주니 권이태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투덜댔다.
“풀 맛…….”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호록호록 열심히 마셨다. 래화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흘금흘금 눈치를 살폈다.
언제쯤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타이밍을 재는데 권이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줄 거 있어.”
그는 아까 잔뜩 들고 왔던 종이 가방을 가져와 식탁 한쪽에 올렸다. 가장 먼저 꺼낸 건 최신형 핸드폰이었다.
“위치 추적 설치된 핸드폰. 내 전화번호 저장되어 있으니까 전화하고.”
이어서 민트색 종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익숙한 패키지의 등장에 의아해하던 래화는 움찔 놀랐다.
갑자기 손이 덥석 붙잡힌 탓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픽 웃었다.
“왜 긴장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채널 세팅된 반지는 보석이 튀어나오지 않고 납작하게 들어가 있어서, 거추장스럽지 않게 낄 수 있을 디자인이었다.
권이태는 핸드폰을 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결혼반지.”
래화는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민트색 종이 가방이 나올 때부터 설마 했는데…….
“이거 진짜 다이아몬드 아냐?”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광채에 익숙한 디자인까지. 유명 브랜드의 웨딩링이었다. 가짜 결혼을 위해 끼기에는 너무 호사스러웠다.
“핸드폰 위치 추적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물건이 하나 더 있어야지.”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싫어?”
래화의 손가락을 가볍게 받치던 권이태는 손을 안쪽으로 미끄러트렸다.
“반지 싫으면 몸 안에 칩 심을 수도 있어.”
커다란 손이 팔뚝을 움켜쥐더니, 안쪽의 연한 살을 엄지로 지긋하게 문질렀다.
“대충 여기쯤.”
그가 음흉하게 속삭였다.
“원하면 바로 말해. 안 아프게 살살 넣어 줄 테니까.”
“……반지 낄게.”
래화는 황급히 팔뚝을 빼냈다. 권이태가 히죽 웃으며 상자에서 다른 반지를 하나 더 꺼냈다. 래화와 세트인 반지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그리고 전기 충격기.”
날씬한 검정색 전기 충격기는 겉보기엔 그냥 막대기처럼 보였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규격 외의 물품이니 웬만하면 밖에서 내보이지 말라는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태가 나중에 같이 사용법을 연습하자고도 했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전기 충격기는 이미 써 본 적 있어서 익숙했다. 래화는 전기 충격기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제 끝이야?”
“어. 내 볼일은 끝났으니까, 말해 봐.”
권이태가 왼손으로 비딱하게 턱을 괴며 짓궂게 웃었다.
“누드모델 얘기.”
“그거 아니라고.”
속으로 권이태를 쥐어박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성질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얘기할 기회만 노렸던 래화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인물화를 그리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간단하게 말하자면 느낌을 그리는 거야. 너에 대한 느낌. 완성한 그림에 사람의 형체가 아예 없을 수도 있어.”
어차피 손 풀어야 해서 최소한 한 달은 지나야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설명도 했다.
“느낌만 그리는 거면 굳이 모델이 필요 없지 않나.”
“너한테서 영감을 받는 거니까 허락 맡아야지. 그리고 허락해 주면 앞으로 계속 너 관찰하면서 구상 잡고, 스케치하고 할 거야.”
권이태가 흐음, 하고 길게 늘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좁힌 채, 긴 손가락으로 다각다각 식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초조함에 마른 침을 삼켰다. 래화의 긴장을 읽었는지, 그의 입술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이래화가 나한테서 찾아낸 느낌이 뭘까…….”
곧은 시선이 래화를 직시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잘생긴 사람을 그리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우리 자기의 똘끼를 생각한다면 분명 아주 대단한 걸 그리고 싶어서 이렇게 아쉬운 소리까지 하는 걸 텐데.”
역시 눈치가 빨랐다. 권이태의 말처럼 래화는 아쉬운 처지였다. 소시지 구워 가며 저녁상을 차린 것도 그래서였다. 배불리 먹여서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어 놓고, 은근슬쩍 허락받아 보겠다는 계산속이었다.
“…….”
꿍꿍이를 죄다 들켜 버려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조용히 그가 말하길 기다렸다.
커다란 손이 스윽 뻗어 왔다. 길쭉한 검지가 식탁 위에 포개어 놓은 래화의 손을 툭 쳤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단단한 손톱이 손등 위를 살살 긁어 댔다. 간지러운 느낌이 아슬아슬해서 옅은 소름이 돋았다.
“내가 너한테 뭘 더 보여 주면 되는데?”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오싹했다. 무언가를 충동질하듯, 그가 재차 질문했다.
“뭐가 궁금한데, 응?”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벌어지는 입술에 따라붙는 시선이 집요해서 이유 모를 야릇함이 느껴졌다. 자꾸 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깊숙한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리라. 래화는 감춰 뒀던 욕망을 꺼냈다.
“……전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무척 탐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너라는 사람을 그리고 싶어.”
솔직한 날것의 대답에 남자의 웃음이 짙어졌다. 손등을 긁어 대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며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맞물리는 힘에 반지가 살갗을 짓눌러 작은 통증을 주었다. 래화의 손을 꽉 누르듯 붙든 채 그가 사납게 말했다.
“지금 나 꼬셔?”
어째서인지 약간의 짜증이 섞인 질문이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성질을 부리는 듯한 어조가 당황스러웠다.
어디서 짜증이 난 거지? 그리고 왜 내가 꼬셨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쉬운 처지인 만큼 열심히 그를 달랬다.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 나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라서……. 뭘 그리고 싶다고 욕구를 느낀 것 자체가.”
“…….”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줘. 모델료도 챙겨 줄 테니까.”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권이태는 까만 눈으로 래화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헛웃음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하여간 자기도 취향 참 특이해.”
그가 손깍지를 풀었다. 래화는 그제야 여태까지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권이태는 턱 끝을 까닥였다.
“돈은 됐어. 20억짜리 의뢰를 받았는데 이 정돈 서비스로 해 줘야지. 대신 뭐 하나만 해 줘라.”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긴장되었다. 하지만 권이태는 걱정에 비하면 아주 무난한, 그러나 무척 이상한 요구를 했다.
“나랑 술 한번 마시자.”
래화는 눈을 깜빡였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입을 막았다.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에 겁을 내는 아이처럼……. 애매한 정적이 길어지던 때였다.
우우웅.
식탁이 요란하게 울렸다. 권이태의 핸드폰이었다. 권이태는 흘긋 액정을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권이태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사이, 권이태는 건성건성 말했다.
“제가 먼저 연락드린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십니까.”
상대방이 무어라 말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던 권이태가 눈썹 사이를 확 좁혔다.
“…….”
평소처럼 비아냥거릴 줄 알았더니, 웬일로 가만히 듣기만 했다.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금방 전화를 끊었다.
까맣게 변한 액정을 잠깐 들여다보던 권이태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장인어른이…….”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상견례 하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