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11화 (11/132)

11화

권이태에게 전화한 이는 비서실장이었다.

박 실장은 대산 비서실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으로, 이정환의 신뢰를 듬뿍 받는 충신이기도 했다.

해외 명문대를 졸업한 박 실장은 굉장히 똑똑했다.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아서, 여태 이정환의 마음에 쏙 드는 여러 계책들을 내놓았었다.

류설연의 마음을 얻는 법, 말썽 부리는 이래화를 얌전하게 만드는 법 등등.

그가 내놓은 방법들은 항상 효과가 좋았다. 그런 비서실장이 권이태에게 먼저 전화해 만나자는 말을, 그것도 상견례 하자는 소리를 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함정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어쨌든 이정환이 래화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행동이었으니까.

권이태 또한 걸어 온 싸움을 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정환의 도발을 재밌어했다.

하여 일주일 후에 DS 호텔의 한식당에서 이정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래화는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는 중이었다.

“출근은 내일부터 해 주실 수 있나요?”

“네.”

“그럼 내일 10시까지 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비스직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딱딱한 대답이었으나,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연신 싱글벙글했다. 특히 래화의 얼굴을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면접에서 합격한 래화가 덤덤했다.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번에도 당연히 붙겠거니 했다.

집에만 박혀 있으면 정신적으로 좋지 않았다. 외출해서 사람을 만나고,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래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였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권이태의 집 근처에 오전 타임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카페가 있었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권이태는 사전 답사를 하곤 허락해 주었다. 하여 오늘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자, 골목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권이태가 껄렁껄렁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을 휘적거려 담배 연기를 흩뜨리고, 옷도 두어 번 턴 후에야 래화에게 다가왔다.

“면접 잘 봤어?”

“내일 오전부터 나오래.”

“알바비 받으면 나 맛있는 거 사 줘.”

“아이스 초코 사 줄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권이태의 집으로 향했다. 워낙 근처인지라 몇 마디 주고받으니 도착이었다.

권이태는 래화의 뒤를 졸졸 쫓아와 화방으로 정한 1층의 가장 넓은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텅 비었던 방에는 이제 가구가 채워졌다. 권이태는 래화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드로잉북을 집어 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잠깐 외출하고 올 테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 붙어 있어.”

“어디 가는데?”

“인천 공항.”

권이태가 잠깐 손목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나 혼자서는 장인어른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도와 줄 사람들을 불렀거든. 이따 소개해 줄게.”

“너랑 똑같은 일 하는?”

“어. 믿을 만해. 그쪽 보수는 내가 알아서 지급할 예정이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말하는 투로 보아 최소 두 명 이상인데, 권이태와 함께 일할 정도면 보수가 높을 거다.

이들 보수까지 지급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권이태의 손에 떨어지는 돈은 많이 적어질 터였다. 물론 그래도 큰 금액이지만, 권이태가 돈 써 대는 씀씀이를 보아하니 갑자기 적게 느껴졌다.

왼손 넷째 손가락에서 희미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센터 스톤 없이 채널 세팅만 들어갔어도, 알알이 박힌 다이아 크기가 큼직했다. 브랜드값까지 치면 분명 반지에 몇천은 썼을 텐데…….

“먹고 싶은 거 있어?”

밥이라도 잘 차려 줘야지.

열심히 지켜 주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래화는 그냥 할 수 있는 걸 해 주기로 했다. 권이태가 샐쭉 웃으며 되물었다.

“오늘도 밥할 거야?”

“나 바깥 밥 싫어한다니까.”

“그럼 고기반찬.”

전에 보니까 아침과 점심은 적게 먹고, 저녁은 많이 먹는 편인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6인분쯤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인사를 던졌다.

“응. 다녀와.”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권이태가 말없이 래화를 쳐다보았다. 창가 쪽 리클라이너에 막 앉은 래화는 의아히 마주 보았다.

한참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그리고 휙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이상한 행동에 뭐지 싶으면서도, 권이태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했다.

조용한 방 안에 홀로 앉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상념이 일어났다. 안개처럼 뿌옇게 머리를 뒤덮는 생각들을 흘려보내고자 드로잉북을 펼쳤다.

미리 깎아 둔 콩테 연필을 쥐고 손 가는 대로 슥슥 그렸다.

정말 오랜만의 드로잉인지라 선이며 표현이며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른손의 움직임도 예전보다 조금 둔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래화는 가슴이 빠듯해지는 충족감을 느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충족감이었다.

작은 드로잉북의 네모반듯한 종이 안에서 래화는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검은 심이 하얀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불안정하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래화는 여러 가지 포즈의 인체를 드로잉했다.

여자를 끝내고 남자를 그리는데, 자꾸 손이 주춤거렸다. 간만의 드로잉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사타구니 부분을 그리는 순간,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나 백자지야.”

뚝.

콩테의 심이 부러졌다. 래화는 눈매를 찡그렸다. 그때 이후로 태연한 척은 하고 있는데, 자꾸 저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예 머릿속에서 맴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진짜 짜증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중얼거린 래화는 리클라이너에 털썩 누워 버렸다. 콩테를 쥔 손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드로잉북은 배 위에 얹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권이태를 향해 흘러갔다.

모델을 해 주는 대신 술 한번 마시자던 요구에는 아직 대답하지 않은 상태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답하지 못했다.

래화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어지간해선 취하지 않아 주사 부릴 걱정을 한 적도 없었다. 그냥 간단한 술자리가 될 텐데도, 선뜻 그러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쩌면 속내를 내보이는 일이 무서운지도 몰랐다.

검은 눈동자 아래에 감춰진 본성을 끌어내려면, 래화 또한 억눌렀던 욕구를 드러내야 했다. 그를 벗겨 내려면 래화 또한 벗어야 하기에…….

“…….”

고개를 내저은 래화는 새 콩테를 꺼내서 다시 드로잉을 시작했다. 목표했던 장수를 채우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뻐근한 손가락을 스트레칭하던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래화는 실내화를 질질 끌며 인터폰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주문 넣었던 미술용품 일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래화는 통화 버튼을 터치하고 말했다.

“문 앞에 놓고 가 주세요.”

-사인해 주셔야 돼요.

고가품도 있어서 사인을 받는 것 같은데…….

래화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거실 탁자에 놔둔 물건을 챙겼다. 단단한 철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우악스러운 손이 래화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래화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으아아아악!!”

전기 충격기에 정통으로 지져진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방심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대려는 찰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이태가 나타났다. 파지직 소리를 내는 전기 충격기를 든 래화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를 확인한 순간, 그는 숨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 미친, 미치겠다, 으하하…….”

웃느라 정신없는 권이태를 보며 래화는 전기 충격기 버튼에서 손가락을 치웠다.

“왜 웃어. 이렇게 쓰라고 준 거 아니야?”

“맞아. 잘했어.”

권이태는 큭큭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발로 툭 찼다.

“소개할게. 이름은 최정.”

그는 재밌어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우리 자기 경호를 도와 줄 사람이야.”

“…….”

래화는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으허헝, 하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첫인사는 실패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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