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12화 (12/132)

12화

최정은 죽상을 하고 줄담배를 피웠다. 베란다 난간에 들러붙은 그가 끙끙 앓으며 중얼거렸다.

“와, 진짜, 와아……. 대단한 아가씨야…….”

정말이지 대단했다. 보통 호신용품을 들고 있어도 위급 상황에서는 공포심에 몸이 굳어 사용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미리 연습을 해 두어도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이래화가 전기 충격기를 이만큼 능숙하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몇 번 써 봤다고 하더니, 전기 충격기로 여러 사람 지져 주고 다닌 모양이었다.

권이태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더듬거렸다. 편의점에서 산 터보라이터는 그의 손엔 조금 작아서, 가끔 이렇게 뚜껑을 여는 것부터 헤매기도 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담뱃불을 붙인 권이태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그래.”

“아니이, 원래 이런 식으로 한번 해 두면 좋다고.”

최정은 나쁜 작전을 세웠다. 실제 같은 상황을 연출해서 이래화에게 납치 대비 연습을 시켜 주겠다는 명목이었다.

사실 말만 그렇고,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 두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래화를 돈 많고 까탈스러운 부잣집 아가씨라고 혼자 멋대로 상상한 것이다.

최정이 클라이언트와 종종 기 싸움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잠깐 전화 받는다고 한눈파는 사이에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기 싸움의 결과는 최정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또라이한테 또라이 소리를 듣는구나 싶다.”

최정의 패배 선언을 듣고 있던 권이태는 연기를 길게 뱉었다.

“최정.”

실컷 떠벌거리던 최정이 슬쩍 몸을 움츠리며 소심하게 물었다.

“왜……?”

“이제 그런 짓 하지 마라. 이래화한테 제대로 사과하고.”

“옙. 잘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짧은 경고에 최정은 곧바로 쭈글해졌다. 권이태가 이런 문제에선 말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번에는 경고 없이 바로 주먹일 터였다.

흘금흘금 눈치를 살피던 최정은 권이태의 눈빛이 평온한 걸 확인하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내가 너희 부부 별명을 하나 지어 주마.”

그러더니 웬 괴상한 단어를 내뱉었다.

“또쀼.”

“……또쀼?”

“또라이 부부. 줄여서 또쀼.”

“또부가 아니라?”

“부부 글자 합치면 쀼잖아.”

헛소리를 해 대는 최정은 몹시 진지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헛소리라서, 권이태는 그냥 웃었다. 제법 유한 웃음에 오히려 최정이 놀랐다. 욕 한마디는 얻어먹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새끼, 신혼 생활 좋은 모양이다?”

히죽거리며 팔뚝을 툭툭 치던 최정은 주섬주섬 태블릿을 꺼내며 물었다.

“아무튼 농담은 이쯤하고. 내가 보낸 파일은 확인했냐?”

“아직.”

“지금 확인해 봐.”

권이태는 입에 담배를 문 채, 한 손으로 태블릿을 쥐고 다른 손으로 슥슥 스크롤을 내렸다.

권이태는 평생 예술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물감 묻은 종이와 깎아 놓은 돌덩이 따위에 감동받는 사람들이 웃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권이태에게도 류설연의 그림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류설연이 참 아까운 재능이긴 했어.”

최정이 옆에서 화면을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권이태는 무표정하게 화면 속 그림을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과감하고 도발적인 표현력이었다. 시선을 강제로 붙드는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적인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권이태는 머릿속에서 류설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화려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이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니…….

그 의외성에 남자들이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든 것일까. 아무래도 이래화의 똘끼는 류설연에게서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죽기 직전에 그렸다는 그림은?”

“거기 43페이지로 넘기면 돼.”

류설연이 자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은 혹평을 받았다. 항상 경탄만 받아 오다가 갑자기 혹평이 쏟아졌으니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 때문에 류설연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평단의 혹평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태블릿 액정을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화면 가득히 유화 그림이 떠올랐다. 우중충한 배경에 희고 붉은 꽃이 어지럽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거친 붓 터치와 유화 물감이 흘러내리는 표현은 기괴했다.

권이태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전 그림과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한데, 확실히 뭔가 달랐다. 찬찬하게 뜯어보던 그는 이내 무엇이 바뀌었는지 깨달았다.

“밋밋해졌네.”

충분히 잘 그리긴 했지만, 류설연 특유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강렬함이 없었다. 독특한 발상과 표현력이 사라져서 누군가 류설연의 화풍을 흉내 내어 그린 것 같았다.

“그치? 그래서 마지막 그림은 다른 사람이 그린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아마 최정도 똑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권이태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게 이래화다?”

“일단 가장 확률이 높긴 하니까.”

처음부터 이상한 의뢰였다. 최정은 대산 건설과 류설연, 그리고 이래화에 대해 조사할수록 심상찮은 냄새를 맡았다.

20억을 뿌리고 혼인 신고까지 해 가며 계부에게서 벗어나려는 이래화.

그런 이래화를 막으려고 그보다 더한 짓거리를 벌이는 이정환.

기묘한 부녀의 사이에 류설연이 엮여 있었고, 그 연결 고리의 핵심이 바로 ‘그림’이었다.

“만약 류설연의 유작을 이래화가 그린 게 사실이면…… 상황 되게 복잡하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자세한 속사정은 몰라도, 대산 회장이 진짜 이래화를 보호하려고 감추는 것일 수도 있어.”

최정이 보기에 복잡한 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그게 이래화라는 것이다.

“아가씨가 하는 말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최정은 권이태가 붙든 태블릿 화면을 툭툭 터치했다. 몇 번의 터치 끝에, 이래화의 정신병원 입원 기록이 화면에 떠올랐다. 진단명과 의사 소견을 읽은 권이태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Delusional disorder, 망상 장애.

과대망상과 피해망상 증세를 보이며, 자해로 인해 입원 치료를 진행.]

“류설연이 정신적으로 불안했잖아. 원래 정신병이란 게 유전 소인도 크니까…….”

“이래화 정상이야.”

권이태는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잘라냈다. 최정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래화의 정신병을 놓고 토론하는 대신,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슬쩍 질문했다.

“넌 괜찮냐. 잠은 좀 잤어?”

최정과 권이태는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동료라는 이름 아래 생사를 넘나들며 부대끼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권이태에게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패 줘야 하는 지랄병이 있었다. 그가 남들이 기피하는 위험 지역의 임무만 골라서 맡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권이태가 어떤 식으로 지랄병을 앓는지 옆에서 지켜본 최정으로서는 이번 의뢰를 맡는다고 할 때 내심 걱정했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병이 도지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권이태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게.”

살짝 늦은 대답을 꺼낸 권이태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작은 음영을 드리웠다.

“이상하게 괜찮네. 잠도 나쁘지 않게 자고 있고…….”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문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얌전한 임무는 아니라서 그런가. 조만간 또 재밌는 일 있을 것 같거든.”

“재밌는 일?”

“상견례 하기로 했어.”

“……뭐, 씨발?”

돌았네, 정신 나갔네 같은 의미 없는 소리를 하며 펄쩍펄쩍 날뛰던 최정이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최정은 권이태의 목을 휘감은 뱀 문신을 잠시 응시했다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너 어떡하려고. 연락할 거야?”

“뭔 소리냐. 연락하긴 어딜 연락해.”

“아니, 상견례 한다며…….”

권이태가 피식 웃었다. 그는 아직 장초인 담배를 그대로 부러뜨리고 재떨이에 던졌다. 얇은 입술이 나른하게 ‘진실’을 언급했다.

“나 부모 없는 고아 새끼잖아.”

“…….”

최정은 침묵했다. 이래화네 집안도 복잡하지만, 권이태 또한 만만치 않게 가정사가 복잡했다.

권이태의 역린이자 모든 일의 시작, 지금의 그를 만들어 낸 근원.

우연히 권이태의 가정사를 알게 된 이후, 최정은 항상 생각했다. 그가 더 망가지지 않고 이 정도로 버틴 게 용하다고 말이다. 최정은 씁쓸함을 삼키며 물었다.

“너 한국 들어온 거, 그쪽은 몰라?”

“알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권이태는 손으로 천천히 목덜미를 쓸었다. 길쭉한 손가락 아래에서 뱀 문신이 꿈틀거렸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 담긴 검은 눈동자의 색이 짙어졌다.

“어차피 한 번은 정리해야 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