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13화 (13/132)

13화

충격적인 등장과 달리, 최정은 무척 고분고분했다.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고, 래화가 민망할 정도로 싹싹 빌어 댔다.

용서해 달라,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하며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쩌다 저녁 식사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와,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

최정은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식이냐며 와구와구 먹어 치웠다. 먹성 좋은 그를 래화는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확실히 용병 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최정도 키가 크고 몸이 좋았다. 물론 권이태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관찰하는 건 래화만이 아니었다. 최정도 김치를 넣은 제육볶음을 입이 미어터지도록 쑤셔 넣으면서 흘금흘금 래화를 쳐다보았다.

“질문 있으면 하셔도 돼요.”

그가 입 안의 음식을 꿀떡 삼키곤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근데 전기 충격기는 왜 그렇게 잘 쓰세요? 연습 진짜 많이 하신 거 같던데.”

기다렸다는 듯이 숨도 안 쉬고 다다다 물어보기에 차분하게 답해 주었다.

“연습은 적당히 했어요. 다만 실제로 사용할 일이 조금 있어서…….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더라고요.”

어째서인지 래화의 대답을 들은 최정은 얼굴이 하얘졌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젓가락이 스르륵 느려졌다. 최정은 깨작깨작 밥알을 헤집으며 웅얼거렸다.

“……저어, 참고로 저는 싸움 잘 못 해요. 그냥 제 한 몸 지킬 정도고, 총기 수리랑 기계 조금 만지는 게 다거든요…….”

그러니까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거든 꼭 말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래화가 말보다 전기 충격기로 먼저 지져 버릴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권이태도 아니고…….

래화는 최정의 오해를 풀어 주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권이태랑 같이 다니면 이런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반복될 일이니 자신이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저녁을 빵빵하게 먹어 치우며, 최정은 현재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래화를 경호하기 위해 권이태는 새로 팀을 꾸렸다. 최정과 권이태를 포함하여 총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저만 먼저 입국한 거고, 다른 팀원들도 나중에 올 겁니다. 한 명 빼고 전부 데저트 소속이에요. 나머지 한 명은 소속 없는 프리랜서.”

권이태가 속한 민간 군사 기업의 이름이 데저트였다. 래화는 조금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이렇게 마음대로 데려와도 되는 거예요?”

회사 입장에서는 어디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간단한 경호 의뢰에 주력 용병을 여럿 쓴다고 하면 싫어할 터였다. 래화의 걱정에 최정이 배시시 웃었다.

“지금 오는 사람들 중에 데저트 대표도 있는데요, 뭘.”

“……네?”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한국에 볼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팀에 합류하시는 거니까. 뭐어, 사실 전적으로 권이태 때문에 오는 거긴 하지만요.”

래화는 옆에서 조용히 계란말이를 사냥하는 권이태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껍게 말아 놓은 계란말이를 와압 하고 한입에 털어 넣고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남편 존나 믿음직하지?”

“욕 하지 말라니까.”

“남편 아주 믿음직하지?”

“응.”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남편에게 대충 대답을 던져 주고 물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면서 비속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원래 욕을 제일 빨리 배우는 거 몰라?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진 한국에서 살았어.”

“서울에서?”

“어. 자기 집 옆에서.”

뭐 좀 알려 주나 싶더니, 또다시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시작이었다.

래화가 흘겨보자, 권이태가 씩 웃으며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달랑달랑 흔들었다.

“진짜 맛있다.”

그의 앞으로 계란말이 접시를 밀어 주면서, 래화는 권이태를 고용하기 전에 했던 뒷조사를 떠올렸다.

‘권이태’에 대한 기록은 그가 성년이 되고 외국에서 용병 일을 시작한 시점부터 존재했다.

그전까지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정보밖에 없었다. 위조 신분을 사용한 게 성년이 된 시점부터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가 숨긴 비밀은 아마 미성년자 시절과 연관되어 있을 터였다.

역시 가족한테 뭔가 있는 걸까?

박 실장이 상견례 같은 괴상한 제안을 건넸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권이태의 가족이 수상했다.

권이태를 신뢰하고 있지만, 1년 후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래화는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머릿속에 잘 저장해 두었다.

***

저녁 식사를 끝내고 냉동실에서 깐도X를 꺼내 왔다. 최정이 이래화에게 사과한답시고 먼 동네 슈퍼까지 가서 공수해 온 것이었다.

군것질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사 온 성의를 봐서 하나쯤 먹기로 했다.

“…….”

최정은 담뱃갑을 챙겨 베란다로 나가고, 권이태는 래화를 쫓아왔다. 그는 래화가 소파에 앉아 바스락바스락 껍질을 까서 아이스바를 입에 무는 동안, 옆에 놓인 리클라이너에 앉아서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렸다.

일하느라 바빠 보이는 그를 내버려 두고 래화는 아이스바에 열중했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는지 살얼음이 서려 있었다. 단단하게 언 표면을 혀로 살짝살짝 핥았다. 끝부분을 얼마간 할짝대며 녹이다가 깨물었다.

생각보다는 딱딱하지 않았다. 힘 조절에 실패한 나머지 이가 푹 들어가면서 아이스크림이 입술에 조금 묻어 버렸다.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흘긋 권이태를 돌아보았다.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던 래화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빤히 쳐다보는 탓이었다.

“꼰대 입맛이라고 욕하더니, 너도 먹고 싶어?”

묘하게 굳은 얼굴이던 권이태는 느릿하게 웃었다.

“한 입 줘 봐.”

그러더니 훌쩍 옆으로 다가와 앉아선, 손목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그가 입을 크게 벌렸다. 엇 하는 사이에 아이스바의 절반이 훌쩍 사라졌다.

“……야.”

반토막 난 아이스바를 들고 눈매를 뾰족하게 치켜세우자, 권이태가 킥킥거렸다.

“내가 다시 사 줄게.”

냉동실 꽉꽉 채워 주겠다는 약속에 래화는 됐다고 답하곤 남은 아이스바를 조금씩 뜯어 먹었다. 먹다 보니 문득 권이태가 입을 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마저 먹어 치웠다.

“어우.”

때마침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던 최정이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곤 흠칫거렸다. 제자리에서 펄떡거린 그는 깍듯하게 90도 인사를 하고선 도망갔다.

“저는 2층 올라가서 일하고 있겠습니다.”

최정이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고, 1층에는 권이태와 래화만이 남았다. 래화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저에게는 2층이 금지 구역인데, 최정은 마음대로 드나드는 탓이었다.

최정은 안전 가옥을 만들기 위해 여러 장치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업무 때문임을 알고 있는데도 기분이 좀 그랬다.

래화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권이태가 턱 끝을 까닥이며 물었다.

“2층 올라가 보고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호기심이 승리했다. 자존심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라가게 해 주면 나한테 뭐 해 줄 거야.”

“……술 마시는 거?”

“그건 모델 해 주는 대가고.”

권이태의 말이 옳았다. 20억으로 그를 고용했지만, 어디까지나 경호 업무에 한해서였다. 추가 업무에 따른 대가를 지급하는 게 맞았다.

내가 갑질한 걸지도…….

스스로의 행동에 반성하며, 래화는 통장에 남은 돈을 계산해 보았다. 육천 정도는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생활비가 빠듯하긴 하겠지만, 식비를 권이태 카드로 긁으면 괜찮을 듯했다. 권이태는 코끼리처럼 먹으니까, 자기 카드로 식비를 해결해도 불만이 없을 터였다.

“뭐 갖고 싶은데? 육천만 원까지는 쓸 수 있으니까, 그 안에서 사고 싶은 거 말해 줘.”

“하아.”

그런데 권이태의 반응이 이상했다. 좋아서 실실거릴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쉬어 댔다. 굉장한 멍청이를 보듯 하는 눈빛에 래화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팔천까지도 괜찮아.”

그러자 한숨 소리가 더욱 커졌다. 거의 바닥을 뚫을 기세였다.

“래화야.”

“왜.”

“내가 너 별명 지어 줄까?”

“아니.”

권이태는 거절하는 말을 뻔히 듣고서도 못 들은 척 제멋대로 말했다.

“예또 어때.”

안 좋은 뜻이 분명한데, 뭔지 궁금했다. 결국 이번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뜻이 뭔데?”

“예쁜 또라이.”

“…….”

이럴 줄 알았다. 그나마 ‘예쁜’이라는 수식어라도 붙여 주니 다행인 걸까. 래화는 상식적인 대화를 포기하고 재촉했다.

“예또가 사 줄 테니까 빨리 갖고 싶은 거 말해. 나 2층 올라가 보고 싶어.”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만 던졌다.

“안 무서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랑 있는 거 안 무섭냐고.”

그 말을 끝으로 권이태는 입을 닫았다. 정적이 흘렀다. TV 하나 켜 두지 않아서, 넓은 공간에 흐르는 정적은 더욱 무겁고 짙었다.

무표정할 때의 그는 사나운 인상이었다. 검은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가늘어지는 순간, 래화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졌다.

아찔한 두려움과 맹렬한 탐욕이 동시에 몸을 짓이겼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넌 내 편이잖아.”

편 가르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에 권이태는 입매 끝을 잠깐 비틀었다.

“목숨의 위협 말고.”

“그러면…… 뭘 무서워해야 하는데?”

“남자.”

그가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뒷목을 가볍게 그러쥐는 손은 크고 뜨거웠다.

“지금 내가 여기서 너한테 키스하면 어쩔 건데.”

래화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바짝 긴장하던 몸이 풀어졌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걸 가지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았다니.

“그 정도는 괜찮아.”

권이태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래화는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가짜 부부 흉내 내려면 키스 정도는…….”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확 잡아당기는 힘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눈을 커다랗게 떴을 땐, 이미 얼굴과 얼굴이 가까이 맞붙은 뒤였다. 시야가 온통 권이태로 뒤덮였다.

그가 내리깐 눈으로 래화를 직시했다. 더운 속삭임이 살갗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싫어, 또라이야.”

말하는 움직임을 따라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희미한 단맛을 머금은 위협이 파고들었다.

“난 키스로 안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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