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귓불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뺨까지 붉어졌을지도 몰랐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싫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견딜 수 없게 간지러운 탓일까. 정작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엉뚱했다.
“키스로만 못 끝낸다며.”
“어.”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래화의 입술 위를 눌렀다. 잘 익은 복숭아를 눌러서 부러 자국을 내는 심술쟁이처럼 꾹꾹 눌러대며 말했다.
“근데 참아 볼게. 나 인내심 좀 생겼어. 많이는 말고, 조금.”
손가락 끝이 입술을 누르자, 입 안과 혓바닥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속살을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위험한 눈에 래화는 옅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권이태는 래화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가 느리게 웃으며 속삭였다.
“키스할 때 내 모습은…… 안 궁금해?”
인지하지 못했던 욕망은 그의 말에 모습이 명확해졌다. 우습게도 래화는 그가 내보인 폭력성과 거침없이 제멋대로 구는 행동에 흥분하고 있었다.
애써 숨기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원하는 바가 뚜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래화는 입술을 벌리고 그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가고, 커다란 손이 래화의 허리를 붙들었다. 허리 양쪽을 힘주어 붙잡고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몸에 딱 붙였다.
단단한 몸에 짓눌린 채 입을 맞췄다. 입술을 거칠게 벌리며 파고든 살덩이가 여린 살을 헤집었다. 침입자가 움츠러든 혀를 툭 건드리는 순간, 래화는 파르르 허리를 떨었다.
“읏, 하으…….”
너무 뜨겁고 더웠다. 열기가 아찔해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는데도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받아들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헤집다가 두꺼운 팔뚝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느새 뒤로 밀려난 몸이 덜컹, 어딘가에 부딪혔다. 권이태는 그대로 래화를 답삭 들어 올려서 테이블 위에 앉혔다.
앉고 나서야 부딪힌 것이 테이블임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밀어붙이는 힘에 정신없이 휩쓸리며, 몇 번이나 고개를 비틀면서 혀를 얽었다. 커다란 손이 몸 곳곳을 쓸어내릴 때마다 아랫배 안쪽이 콕콕 쑤셨다.
혀가 입천장을 거칠게 문지르면 저도 모르게 자꾸 허벅지를 꼬며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응, 흑, 아…….”
키스하는 내내 눈을 감지 않았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열기로 흐트러진 검은 눈에 심장이 뛰었다.
더 엉망으로 헤집고 파헤쳐서 밑바닥을 확인하고 싶었다. 새까만 수면 아래에 숨겨진 전부를 낱낱이 알고 싶었다. 신경이 따끔거릴 정도로 위험한 존재가 저에게 가져다 줄 자극을 죄다 집어삼키길 원했다.
탐욕스러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던 권이태가 어느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눈매를 구기며 래화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팔뚝에 핏줄이 불거지고, 낮은 신음이 숨결에 섞여 흘러나왔다.
저를 바라보는 조급한 눈빛이 좋았다. 몽롱한 기분 속에서 몸을 달싹이던 때였다.
“끄으윽…….”
바닥에 기절했던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래화는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느새 테이블에 드러누워서 키스하고 있었다. 민망한 자세에 놀라서 권이태를 밀어냈다. 몸을 웅크리고 덮치듯 붙어 있던 그가 양손으로 래화의 머리 옆을 짚으며 상체를 세웠다.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과 느슨하게 풀린 눈매가 보였다. 권이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만 더 하자…….”
그러면서 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래화는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야.”
하나도 아프지 않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권이태가 래화의 입꼬리에 쪽쪽 입 맞췄다. 래화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래화가 난리를 부리니 권이태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기절한 남자는 잠시 신음만 흘렸을 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권이태가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하게 대가리를 깨서 하루 정도는 푹 잠들게 만들어 줘야…….”
“너 그러다 진짜 감옥 가.”
권이태는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앉은 래화를 안아다 바닥으로 내려 줬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래화는 차마 권이태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사고 쳤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머뭇거리다가 흘깃 권이태의 입술을 살폈다. 너무 세게 깨문 건 아닌가 뒤늦게 걱정되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엄지손가락도 힘껏 깨물어 버렸다.
“아까 내가 깨물었는데…….”
혹시 상처가 생기진 않았나 확인하려는데 권이태가 고개를 돌렸다.
“넌 이가 작아서 깨물어도 티 안 나.”
볼캡을 가져다 다시 쓴 그는 손등으로 제 뺨을 쓸었다. 모자 아래로 반쯤 감춰진 뺨이 옅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음에는 더 세게 깨물어. 잇자국 남아서 멍들 때까지.”
“……다음은 없어.”
권이태는 말없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 래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절을 말하는 제 목소리가 너무 형편없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싫지 않은데 거짓말하는 것처럼…….
***
알고 보니 권이태의 카페 구입은 이미 예정되었던 일이었다.
래화가 카페에서 면접을 보겠다고 했을 때부터, 권이태가 사장님과 미리 접촉했던 것이다. 뭘 어떻게 얘기를 해 둔 건지, 사장님은 권이태의 전화 한 통에 곧바로 카페를 팔아 치웠다.
그날 권이태는 기절한 남자를 병원에 보내서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후 1시에 가게 문을 닫고 래화와 함께 나란히 퇴근했다.
지극히 권이태답게 일 처리를 마친 그는 래화를 새로운 사장님으로 임명했다.
“나는 투자자, 뭐 그런 거 할게.”
카페에선 아이스 초코나 사 먹어 봤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난 커피 싫어하거든. 쓴 물 별로야.”
필요도 없는 카페를 사들인 권이태 때문에 래화는 하는 수 없이 사장님이 되었다.
얼떨결에 카페 사장님이 되고 며칠 후.
배송 받은 식재료를 정리하려 냉동실 문을 연 래화는 쏟아져 나오는 서늘한 냉기를 맞으며 가만히 멈춰 섰다.
냉동실에 그득하던 담배 보루가 사라졌다. 대신 냉동실을 차지한 건 깐X리였다. 수십 개의 네모난 아이스바가 착착 쌓인 모습을 보다가 괜스레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많이 사 놨어…….”
래화는 왼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센터 스톤 없이 채널 세팅만 들어간 웨딩링 또한 래화가 손을 많이 쓰니까 거슬리지 않도록 고른 디자인이었다.
안 그렇게 생겨선 항상 배려가 섬세했다.
이번에 카페를 사들인 것도 그냥 무턱대고 저지른 다음에 래화한테 사장 자리를 맡기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권이태는 기존에 오래 일했던 아르바이트생을 직원으로 채용하여 월급을 두둑이 주고 매니저직을 맡겼다.
래화는 바지 사장처럼 직함만 달고, 오전 일만 하면 끝이었다. 귀찮은 일 없이 그냥 마음 놓고 일할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
래화는 식재료를 정리해 넣고 냉동실의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냉기를 맞아서 차가워진 팔뚝을 문지르며 권이태를 생각했다.
이상한 데에서 사람 기겁하게 만들고, 깜짝 놀랄 만큼 거칠게 행동하고, 얼굴 화끈거리는 상스러운 언행을 해 대는 남자.
하지만 이정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믿어 주지 않았던 말을 선뜻 믿어 주고, 생각지도 못한 배려를 해 주는 남자.
래화는 그가 무서웠다.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찔한 자극과 황홀한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나쁘고 위험했다. 그에게서 새로운 자극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것이 정신의 안정을 무너뜨릴까 두려웠다.
카페에서 키스한 날 이후로 권이태를 피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권이태는 래화가 저를 피하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따금 래화는 저를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탐색전을 이어 가고 있었는데, 오늘 권이태가 이렇게 깐도X로 새롭게 공격을 해 온 것이다. 꽤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뭐해?”
계단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권이태가 물었다. 순식간에 성큼 부엌으로 다가온 그가 재차 질문했다.
“깐족이 사 논 거 봤어?”
“……깐족이 아니야.”
“그럼 뭔데? 깐돌이였나?”
이름도 잘못 알면서 어째 용케 사 왔다. 그건 옛날 이름이고, 지금은 깐도X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권이태를 돌아본 래화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권이태는 쓰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