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항상 편한 캐주얼이나 체육복, 기껏해야 셔츠나 슬랙스만 입던 그였다. 정장을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워낙 몸이 좋다 보니, 딱 붙는 슈트에 드러나는 체형이 감탄스러웠다. 어깨가 넓으면서도 허리가 잘록하고, 다리가 길어서 슈트 핏이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았다.
머리도 평소와 다르게 왁스로 깔끔하게 손질해서 이마를 드러냈다. 말끔히 드러난 눈매가 래화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
권이태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헐벗고 돌아다녀도 신경 안 쓰더니. 입은 게 취향이야? 손수 벗기는 걸 좋아하나.”
“너 벗고 있을 때도 신경 쓰였어.”
담담한 대답에 권이태가 킥 웃었다. 그는 한 손으로 차키를 던졌다가 받으면서 말했다.
“샵 간다면서. 얼른 가자. 늦겠다.”
래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정환과 약속한 상견례 날이었다. 장소가 DS 호텔인 만큼, 이정환만 오지는 않을 터였다. DS 호텔의 주인인 이학수, 그의 부인인 강미옥과 딸 이세연이 등장해 줄 확률이 높았다.
제대로 차려입고 가지 않으면 망신당할 자리여서 샵을 예약해 두었다. 권이태도 반질반질하게 광을 내서 데려갈 요량이었는데, 본인이 알아서 잘 꾸민지라 손댈 구석이 없었다.
아니, 래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모습이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수상한 일을 하는 사장님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이태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특유의 분위기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기 충격기 챙겼지?”
장인어른과 밥 먹으러 가는 자리에 총을 챙긴 사위가 질문했다.
래화는 클러치를 열어 전기 충격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작은 권총을 보여 주는 권이태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거 막 들고 다녀도 돼?”
“안 잡히면 끝이지. 한국은 금속 탐지기도 없어서 편해.”
재킷을 여며 권총의 흔적을 감쪽같이 감춰 버린 권이태가 고개를 까닥였다.
“아무튼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응.”
***
강북구에 위치한 DS 호텔은 넓은 녹지와 한강 조망으로 유명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호텔이지만, 꾸준한 리모델링을 거쳐 시설 또한 최신식이었다.
래화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는데, 대산의 지원을 받았던 류설연이 항상 DS 호텔에서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호텔에서 기자와 평론가, 미술계 관련 인사, 연예인들을 모아 놓고 전시회를 여는 것은 류설연이 제일 좋아하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관심 속에서 황홀해했다. 특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림에 대한 찬사를 듣는 걸 가장 즐거워했는데, 그럴 때마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래화는 전시회가 있는 날에는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호텔로 왔다. 방에서 혼자 교복을 갈아입고, 룸서비스로 저녁을 챙겨 먹은 다음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그 당시 기억은 흐릿하지만, 단편적인 감정과 장면들은 짤막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정환과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던 류설연, 그녀의 작품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서만 지켜보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 그리고 분노와 좌절감.
그런 감정을 느낀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래화는 류설연을 흉내 낸 그림밖에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류설연이라는 산을 넘고 싶어 피나게 노력했지만, 그녀는 번번이 래화를 앞서 나갔다. 이래화는 독창성 없는 짝퉁 화가였다.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분노를 느꼈던 과거가 우스웠다.
몇 년 동안 붓 한번 잡지 못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려는 현재의 자신도 우스웠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한데 말이다. 저도 참 고집 세고 독하다고 생각하며, 래화는 짧게 미소 지었다.
권이태의 차가 호텔 앞에서 멈췄다. 트위드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래화는 클러치를 손에 쥐고 느릿하게 차에서 내렸다.
발렛파킹 때문에 권이태가 주차 요원과 잠시 대화하는 사이, 래화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저, 혹시…….”
어색한 한국어로 말을 붙인 여자는 중국인 관광객인 듯했다. 그녀가 유명한 여배우의 이름을 대며 드라마 잘 봤다는 인사를 건넸다.
“사인해 주세요. 아, 사진, 사진도 찍어 주세요!”
종이를 들이밀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양이, 래화가 그 여배우라고 확신하는 게 틀림없었다. 래화는 속으로 한숨 쉬었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방긋 웃었다.
“지금 촬영 중이라서 사인이나 사진은 힘들어요. 다음에 만나면 꼭 해 드릴게요.”
멍한 눈으로 래화를 바라보던 여자가 두 손을 꼭 맞잡고 외쳤다.
“네에……! 촬영 힘내세요! 언니 너무 예뻐요!”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한 채로 종종걸음 쳐서 도망갔다. 래화는 선글라스를 다시금 단단히 고쳐 썼다.
생전 류설연은 연예인보다 더한 유명세를 누렸지만, 딸인 래화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류설연이 자살했을 때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어도 사진까진 공개되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지만, 가끔 이렇게 연예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래화의 대화를 다 들은 권이태가 설렁설렁 웃으며 다가왔다.
“이제 나 매니저야?”
“연예인 아니라고 하면 더 귀찮아져.”
전에 아니라고 했다가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한참 붙잡혀서 맞네, 아니네 하며 실랑이하다가, 착각한 사람이 인터넷에 모 연예인 싸가지 없다고 SNS에 목격담을 올려서 기사까지 떴다.
다행히 해당 연예인은 그날 해외 촬영 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억울함을 벗었지만, 생사람 잡을 뻔했던 래화에게는 식겁한 경험이었다. 그 후에는 그냥 이런 식으로 간단히 대처하곤 했다.
래화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은 권이태가 자신의 경험담도 말해 주었다.
“난 FBI한테 잡혀간 적 있어.”
“…….”
“동아시아 마약상인 줄 알았다나. 그때 작전 수행 중이어서 착각할 만하긴 했는데.”
“……너 진짜로 감옥 갔다 온 적 없어?”
“없다니까.”
수상한 권이태와 티격태격하며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지배인이 황급히 뛰어나왔다.
“래화 아가씨! 연락 주셨으면 바로 모셨을 텐데……!”
어째서 그냥 오셨냐고 소란스럽게 구는 바람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요란하게 등장해서 시선을 끄는 건 이학수 일가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래화는 선글라스를 톡톡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조용하게 들어가고 싶어서요.”
지배인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그는 90도로 인사하려는 직원들에게 손짓해서 가벼운 묵례만 하고 지나가도록 하고, 곧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미슐랭 별 세 개의 한식 레스토랑은 DS 호텔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좋은 식당이었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간신히 잡는다는 룸은 한강을 내려다보며 식사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 모임을 하면 항상 이곳에서 하곤 해서, 래화에게는 조금 지겨운 외식 장소이기도 했다.
넓은 룸 안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홀로 와인 잔을 기울이던 여인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이학수의 부인인 강미옥이었다.
“래화 왔니? 앉거라. 회장님은 조금 늦으신다더구나.”
그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남색 원피스를 입고, 진주에 작은 서브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귀한 사모님 같은 차림새였다.
“상견례 자리라고 들었어. 우리는 회장님께 인사만 드리고 바로 빠질 거니까 걱정 말렴. 이럴 때가 아니면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잖니?”
래화는 그녀가 주절대는 말을 끝까지 들은 후에, 선글라스를 벗으며 딱 한 마디만 했다.
“네.”
그러나 강미옥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래화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주 연락 좀 하지 그러니, 서운하게. 그런데 살이 좀 쪘네? 래화 넌 키가 커서 조금만 쪄도 티가 확 나잖아. 관리 잘해야 해. 세연이는 작아서 통통하면 귀여운데, 너는 늘씬해야 예뻐.”
정말 여전한 사람이었다. 대놓고 긁어 대던 강미옥은 래화가 별 반응이 없자, 금방 시선을 돌렸다.
살짝 따분한 표정으로 서 있던 권이태와 강미옥의 눈이 마주쳤다. 권이태는 인사도 안 하고 멀뚱히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
강미옥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당장 비아냥거림을 쏟아 낼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했다. 이세연한테 또라이라는 당부를 들었다고 쳐도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묘한데, 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나 왔어요!”
룸의 미닫이문을 열며 이세연이 발랄하게 외쳤다. 상큼한 플레어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부산스럽게 인사했다.
“래화야, 안녕.”
일전에 길바닥에서 울고불고했던 일은 없던 것처럼 생글생글 인사를 건넨 이세연이 권이태를 보더니 갑자기 수줍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태 씨.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실례했죠.”
“…….”
권이태가 래화를 돌아보았다. 얘 뭐 잘못 먹었냐고 물어보는 눈빛에 래화는 작게 고개를 내저어 나도 모른다고 답했다. 권이태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이세연은 되레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태 씨. 저 기억 안 나세요? 저는 그날 바로 기억이 나던데.”
이세연이 방싯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옛날에 우리 약혼할 뻔했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