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난다더니 정말 그랬다. 래화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이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눈썹을 모으며 웅얼거렸다.
“정말인데……. 10년 전쯤에…….”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세연은 표정 관리에 능숙하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면 티가 다 났다.
그리고 강미옥도 함께 있는 자리였다. 뻔히 들킬 거짓말이었다면 강미옥이 먼저 자제시켰을 터였다.
래화는 마지막으로 권이태를 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권이태가 침묵하자 이세연이 재차 들쑤셨다.
“저 아직 이태 씨가 누구인지 회장님께도 말씀 안 드렸어요. 저랑 엄마만 빼고 아무도 몰라요. 우리 아빠도요.”
권이태가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고선 단정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끌어냈다.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운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뭐 어쩌라고.”
“그, 그러니까 제가 비밀을 지켜 드리겠다는……!”
“지금 나 협박해?”
권이태가 눈을 번뜩이며 이세연을 노려보았다.
“나도 협박해 줄까?”
격한 반응에 이세연이 히끅거리면서 입을 닫았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울먹이자, 결국 강미옥이 나섰다.
“협박이 아닙니다, 권이태 씨.”
난폭한 눈빛에도 강미옥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만나 뵙고 싶었을 뿐이에요.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도대체 연락이 되질 않더군요. 항상 래화 곁에 붙어 계시니 따로 만나기도 쉽지 않고…….”
“…….”
“10년 전 일이니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집안끼리 혼사가 오갔던 건 사실이잖아요? 인연이 신기하다 싶어서 인사드리려 했지요.”
권이태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
“네에, 그때요!”
이세연이 얼른 끼어들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잘 생각해 보시라고 종알거렸다. 권이태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글쎄……. 약혼은 모르겠고, 누가 와서 구걸했던 기억만 조금 나는 것 같은데.”
거지 취급에 이세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여태 가만히 듣고 있던 래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기야.”
세 사람의 시선이 래화에게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눈빛들이 따가웠지만, 래화는 권이태만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권이태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선 그가 낯설었다. 평소였다면 능글거리는 말로 받아쳤을 남자는 오늘따라 조용했다. 긴 침묵 끝에 느릿하게 흘러나온 대답은 단순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가 래화의 허리를 끌어당겨 가만히 품에 안았다. 힘주어 끌어안고서, 나직나직하게 말했다.
“저쪽이 착각하는 거야.”
다정한 말에는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무언가 더 설명해 주려나 기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래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권이태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은 수면 위로 일어나는 파문이 보였다. 누군가 던진 돌로 인해 생겨난 원치 않은 흔들림이었다.
당장 손을 넣어 헤집으면 수면 아래 감춰진 것을 꺼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만큼은 그의 비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정말이지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가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래서 래화는 그냥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훌쩍 넘겨 버리는 담담한 반응에 되레 권이태가 미간을 좁혔다.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던 이세연이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래화의 반응이 영 시원찮아서 약이 바짝 오른 것이었다.
“너 지금……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거지? 내가 이태 씨랑 약혼할 뻔했다는 게 거짓말 같아?”
래화가 무슨 말이건 하기만 하면, 조목조목 반박할 기세였다. 래화는 전투태세를 갖춘 이세연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을 소리를 해 줬다.
“그냥 네 말이 다 맞는 걸로 하자.”
“……어?”
“난 별로 상관없거든.”
권이태는 강미옥과 이세연이 탐내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이용 가치가 있으니 이렇게 접근해 왔을 터였다.
그리고 권이태를 이용하려는 계획의 끝에는, 그와 래화의 이혼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래화가 좋은 걸 차지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모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었다. 래화는 권이태에게 팔짱을 끼고선, 그의 팔뚝에 얼굴을 기댔다.
왼쪽 손으로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넷째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니까 남의 남편한테 관심 좀 그만 가져, 세연아.”
이세연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다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짓인지.”
“너 지금, 나, 나한테, 지금……!”
분기를 못 이긴 이세연이 갑자기 쭐쭐 울기 시작했다.
“으, 흐윽, 너무 말이 시, 심한 거 아냐?”
이세연의 눈물에 강미옥은 하늘이 무너진 듯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세연아! 이리 오렴.”
이세연이 쪼르르 다가가 옆에 앉자, 강미옥은 핸드백에서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아기, 마음 여리기도 하지. 이렇게 순해 빠져선…….”
그녀는 딸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톡톡 두들기며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세연이 히이잉, 하고 코 막힌 소리를 내면서 훌쩍였다.
래화는 흐느끼는 이세연을 구경했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려 대는 와중에도 화장이 번지지 않는 게 가장 신기했다.
어느 샵에서 했는지는 몰라도, 오늘 울음 터뜨리기로 작정하고 워터프루프를 빵빵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 같았다.
“래화 너, 이게 무슨 짓거리야!”
강미옥이 이세연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며 발칵 화를 냈다.
“하여간 천박한 핏줄 티 내는…….”
그런데 말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흘깃 권이태를 향했다.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말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찰나였다. 강미옥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강미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흐리곤, 액정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회장님께서 도착하셨다고 하네요.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는 걸로 하고.”
다시 우아한 태도로 돌아간 강미옥이 권이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다음에는 조용한 자리에서 한번 뵙죠, 권이태 씨.”
권이태는 고스란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싫습니다, 강미옥 씨.”
“도와드리기 위해서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셔요. 후회하실 일은 없을 테니까.”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닫이문을 열어 준 직원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풍채 좋은 남자가 룸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늦었군.”
눈썹 색이 짙은 남자는 눈빛이 뚜렷하여 호랑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한 그는 대산의 회장, 이정환이었다.
이정환이 천천히 룸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래화를 보았으나, 래화는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그 다음으로는 권이태를 보았는데, 두 남자가 오래 눈을 마주하기 전에 강미옥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시선을 채 갔다.
“회장님!”
강미옥은 반색을 하며 그에게 종종 뛰어갔다. 방금까지 오만하던 태도가 말끔하게 사라진, 몹시 비굴한 태도였다.
“이제 오셨어요? 제가 잠깐 뵙고 인사라도 드릴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학수는 어쩌고.”
“그이는 잠깐 해외 나갔어요. 급하게 일이 생겨서.”
강미옥은 이정환에게 딱 붙어서 생글생글 살갑게 웃었다. 이정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세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세연이는 왜 울고 있어?”
“그게…….”
이세연이 손수건을 말아 쥐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이래화는 무시해도 이정환한테는 껌뻑 죽는 모녀였다. 이세연도 이번만큼은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 눈치껏 입을 꼭 다물고 기다렸다.
강미옥이 난처하단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가 중립적인 척하며 말했다.
“래화가 조금 모진 소리를 해서요. 세연이가 워낙 마음이 여리다 보니 상처를 잘 받네요. 원래 아이들끼리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래화와 이세연 둘 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였다. 래화는 짧게 비웃었으나, 굳이 무어라 말을 보태지 않았다.
“래화야.”
“…….”
“너는 할 말 없고?”
“……네.”
눈도 안 마주치고 짧게 답하자, 이정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정환이 룸에 들어선 순간부터, 래화는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이정환도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희미한 짜증이 섞인 한숨을 뱉어내더니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
“회장님, 제가 애들 금방 화해시킬 테니까…….”
철썩.
그리고 강미옥의 뺨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