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18화 (18/132)

18화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훌쩍거리던 이세연이 울음을 뚝 멈췄다.

이세연은 입을 틀어막았고, 강미옥은 고개가 돌아간 채 얼어붙었다. 얼마 뒤에 그녀가 천천히 이정환을 돌아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회, 회장님…….”

“내가 래화 정신적으로 힘든 애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이정환이 목에 핏줄이 퍼렇게 돋아나도록 고함을 질렀다.

“애들이야 뭘 모른다고 쳐도, 제수씨는 세연이가 래화 앞에서 허튼 행동 못 하도록 알아서 챙겼어야지!”

“죄송해요, 회장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벌겋게 부어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싸고 싹싹 빌어 대던 강미옥이 래화를 돌아보았다.

“래화야……. 미안하구나.”

억지로 웃는 입술이 파들거렸다. 눈이 웃지를 않으니, 미소는 어색함을 넘어서 기괴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머리 아프진 않니? 혹시 어지럽거나, 이명 들리거나, 뭐 그렇진 않고?”

비굴한 그녀의 모습이 역겨워 구역감이 치솟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미옥의 행동이 아니라, 이런 상황을 만든 이정환이 역겨웠다.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아빠였다. 방식은 다소 과격하더라도 무엇보다 딸을 우선시하는 행동에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래화는 숨이 막혔다. 이정환이 매사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덕분에, 래화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주 조금만 실수만 저질러도 가만 놔두질 않는데, 누가 버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정환이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다는 의심이 드는 게 가장 괴로웠다.

래화 곁에 모여드는 이들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잘라내서 아무도 남지 않도록, 결국 래화가 혼자 남도록 말이다.

지겹게 반복되었던 상황을 다시금 겪으며, 래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멀쩡해요. 아픈 곳 없어요.”

동요를 내비쳐선 안 된다.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간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여겨질지도 몰랐다. 래화는 입매를 굳히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도 그만하세요. 상견례 하러 왔는데 이게 무슨 소동이에요. 남편 앞에서 부끄럽잖아요.”

“……그래.”

이정환이 길게 숨을 뱉고선 가장 안쪽의 상석에 털썩 앉았다. 래화는 강미옥에게 빨리 나가라고 말없이 고갯짓했고, 강미옥은 얼른 이세연을 붙잡아다 끌고 나갔다.

사람 두 명이 빠지니 룸 안이 조용해졌다. 래화는 권이태와 함께 이정환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두 남자는 아직 서로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정환은 권이태에게 말을 붙이는 대신, 직원을 호출했다.

“어, 이제 식사 준비해 주고. 그리고 그거 좀 들고 와 줘요.”

불분명한 대명사에도 직원은 싱긋 웃으며 네, 회장님 하고 답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더니 금방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룸을 가득 메웠다.

성인 남자도 한 품에 들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꽃바구니였다.

플로리스트가 귀하고 값비싼 수입 꽃들로 정성껏 꽃꽂이한 꽃바구니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나 기뻐할 만한 꽃 선물이었지만, 래화의 얼굴은 굳어졌다.

“…….”

향긋한 꽃 내음이 밧줄처럼 숨통을 조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데 아빠가 빈손으로 오기도 좀 그러니까, 우리 래화가 좋아하는 꽃이라도 줘야겠다 싶더구나.”

이정환의 목소리에 괴상한 이명이 섞여서 들렸다. 평소에도 꽃에 거부감을 느끼긴 했지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정환이 선물하는 꽃’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머리에 산소가 전해지지 않아 자꾸 몽롱해졌다. 입술을 벌리고 얕게 호흡하던 래화는 테이블 밑으로 오른손을 내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오른손의 소지, 그 다음은 약지, 그리고 중지, 검지, 엄지까지. 차례대로 하나씩 접어서 완전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손가락을 펼쳤다가 다시 접으며, 매끄럽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일을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떨면서 손가락을 접어 대던 때였다.

“……!”

강한 힘이 오른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전해진 체온에 놀라서 어깨가 움찔 튀었다.

왜, 갑자기…….

래화는 반사적으로 돌아보려는 눈동자를 간신히 붙들었다. 도자기 접시에 시선을 고정해 놓고, 권이태가 손을 놔주길 기다렸다.

무척 수상하게 행동했지만, 이정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진 탓이었다. 그는 아련한 눈으로 꽃바구니를 한참 바라보았다.

“네 엄마도 꽃을 참 좋아했는데…….”

싱그러운 꽃을 눈동자 가득히 담고서 생각에 잠긴 이정환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과거의 추억을 되짚는 동안, 래화는 테이블 밑에서 권이태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

붙잡힌 오른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손이 큰 만큼 악력도 좋은지, 짓누르듯 잡은 힘이 상당했다. 이리저리 비틀고 잡아당겨도, 겨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끙끙대다가 실수로 권이태의 손을 할퀴었다. 남의 살갗을 할퀴는 느낌에 지레 놀라서 손가락을 확 움츠렸다.

“…….”

그제야 권이태가 손에서 힘을 풀어 주었다. 그는 꽉 붙드는 대신, 래화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느릿하게 끼워 넣었다.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더니, 손끝으로 살살 훑었다. 성난 길고양이를 달래듯 사근사근한 손길이었다.

이제 얼마든지 권이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래화는 저도 모르게 얌전히 붙들려 있었다. 형편없이 경련하던 손가락은 진즉 얌전해진 뒤였다. 호흡까지 완전히 돌아왔을 즈음, 그는 래화를 놓아주었다.

래화는 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어찌나 꽉 붙들었는지, 살에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원래대로 피부색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했는데, 다행히 꽃바구니에 가려서 이정환 쪽에서는 손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래화,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설연이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너라도 곁에 남아 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꽃잎을 가볍게 손으로 문지르던 이정환이 래화를 보며 웃었다.

“아빠는 설연이가 남겨 준 마지막 선물이 너라고 생각한단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선 괴로워서 제대로 말도 못 했을 텐데, 지금은 훨씬 나았다. 붉은 기가 희미하게 남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문지르며 그에게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히 음식이 준비되면서, 끔찍한 꽃바구니는 잠시 퇴장하게 되었다. 이정환은 직원의 손에 들려 나가는 꽃바구니를 보며 집 화병에 꽂아 두라는 마지막 헛소리를 잊지 않았다.

래화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DS 호텔을 벗어나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박을 생각이었다.

간단한 식전주와 안주, 전채 요리가 테이블 위에 하나씩 놓였다. 한입거리로 예쁘게 만든 요리들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정환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권이태에게 말을 붙였다.

“상견례라고 했는데, 많이 단출하군.”

왜 부모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는지 에둘러 묻는 말에 권이태는 싱긋 웃었다.

“모르셨습니까? 저 고아입니다, 장인어른.”

“일전에 통화할 때도 생각했지만, 참 성격이 직설적이야.”

이정환이 식전주를 쭉 들이켜며 권이태에게 눈짓했다. 권이태는 빼지 않고 군말 없이 이정환을 따라 잔을 비웠다.

래화는 입술만 축이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입에 넣을 기분이 아니었다.

“래화는 최근엔 괜찮은 거냐.”

“네.”

맑은 술이 담긴 잔에서 시선을 떼고, 이정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해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것 같아요. 이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저 놔주세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익숙하게 안으로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이정환이 감태와 육회로 만든 전채 요리를 집어 먹으며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병원은 가야지.”

“…….”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거 아니냐.”

“…….”

“아빠가 네 손가락을 부러트렸다는 망상 말이다.”

쨍그랑!

뾰족한 파열음이 울렸다.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래화의 손에 잔이 부닥친 것이다. 뒷걸음치는 구두 굽에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바작바작 밟혔다. 손이 미친 듯이 경련했다.

래화는 입을 벌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에선 작은 비명조차 나오지 못했다.

속에서는 피맺힌 비명을 내지르는데도, 색색거리는 호흡만 비어져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뻐근한 통증이 심장 위를 갈랐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이 온몸을 찢어 놓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에게 속삭였다.

“아니야…….”

꺼져 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한 마디였다. 제대로 들렸을지도 모를 만큼 작게 속닥이곤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한 가운데 래화의 힘겨운 숨소리만이 퍼졌다. 권이태가 거칠게 한숨을 쉬었다.

“하…….”

욕설이 생략된 듯한 숨을 뱉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의자를 소리 나게 뒤로 밀며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술에 물었다.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듯 담뱃갑을 던졌다. 네모반듯한 담뱃갑은 정확히 이정환의 가슴팍을 맞추고 툭 떨어졌다.

“장인어른.”

떨어진 담뱃갑을 내려다보던 이정환이 눈을 치떴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담배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한 손에는 담배를 끼우고, 나머지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권이태가 삐딱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사위랑 둘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