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19화 (19/132)

19화

DS 호텔은 건물 전체가 금연 구역이었다. 흡연을 하려면 외부의 지정된 흡연 구역으로 가야 했는데, 호텔 건물과 꽤나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이정환 회장에게 금연 구역이니 밖에 나가서 담배 피우라는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원들은 곧장 흡연할 장소를 마련했다.

이정환이 먼저 흡연 장소에 간 사이, 권이태는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자리를 떴다. 상태가 좋지 않은 이래화는 그동안 스위트룸에서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권이태는 화장실로 향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경호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무장도 가스총 정도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쪽수로 제압하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발상이 뻔히 보여서 우스웠다.

화장실에 들어온 권이태는 칸이 전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눈알 빠지겠다.”

콘택트렌즈 카메라는 역시 눈이 좀 뻑뻑했다. 답답하다고 투덜거리니, 귀 뒤쪽에 숨긴 골전도 이어폰을 통해 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보다 더 얇은 렌즈는 없다고! 초박형 카메라 중에서 제일 최신이다.

장비 구하느라 힘들었다며 얼마간 징징거린 최정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권이태……. 너 사고 치는 거 아니지? 이미 충분히 사고 친 상황인 건 알고 있지?

“……뭐, 대충.”

-그리고 지금까지 상황으로만 봐서는 이정환이 아가씨를 굉장히 아껴 주는 거 같던데.

최정은 권이태가 착용한 콘택트렌즈 카메라와 골전도 이어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달받고 있었다.

-강미옥한테 싸대기 날리는 거 봐 봐. 아가씨한테 나쁜 소리 했다고 바로 응징도 해 주고, 꽃바구니 선물도 해 주고.

권이태는 짧게 입매를 비틀었다. 분명 최정처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일 터였다. 여태껏 이래화의 주변 사람들 모두 최정과 똑같이 생각했으리라.

“일단 이래화는 꽃 싫어하니까 참고하시고.”

-꽃을 싫어해? 꽃 선물받는 거 싫다, 뭐 이런 게 아니라, 꽃 자체를?

“어.”

-희한하네. 이름도 래화면서.

최정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권이태는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이정환 문제 있어. 정상인은 애초부터 사람 때릴 생각 자체를 못 하지.”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이정환이 거짓말했다는 증거는 못 되지.

“맞아.”

권이태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잔뜩 구긴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분명 제 얼굴임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물끄러미 보다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함께 거울 속의 권이태를 지켜보던 최정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기왕 얘기할 기회 만들었으니까, 누가 거짓말하는지 힌트 하나라도 건져 보자.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랫동안 화장실에 머물렀다.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권이태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정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정환이 기다리는 곳은 DS 호텔에서 가장 좋은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이었다. 1박에 수천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룸에서 이정환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정환의 등 뒤로 너른 통유리창이 도시의 야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야경을 등진 남자는 이 도시의 일부를 만들어 낸 사람이기도 했다.

화재경보기를 꺼 놨는지 연기가 자욱한데도 객실은 조용했다. 권이태는 말없이 이정환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가 피우는 담배를 확인했다.

시가 같은 걸 피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국산 브랜드인 저타르 담배였다.

“받게.”

이정환이 탁자 위로 무언가를 밀어 주었다. 아까 그의 가슴팍에 내던졌던 담뱃갑이었다. 돌려주시니 감사히 받아다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편의점 터보라이터로 딸깍 불을 붙이자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자네에 관해서 조금 알아봤는데, 전부 다 거짓이더군.”

권이태는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소파 등받이에 깊숙하게 몸을 파묻고 느슨한 자세로 이정환의 말을 흘려들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위조 신분을 쓰고 다니고……. 그 전에는 뭘 했는지, 진짜 신분은 찾을 수가 없어. 내가 이만큼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건 처음이네.”

이정환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 털어 냈다.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권이태는 참지 못하고 비죽 웃었다. 담뱃갑 집어 던졌을 때 노발대발하지 않고 인내하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뭐긴 뭡니까. 장인어른 고명딸 훔쳐 간 개자식이죠.”

이래화도 없겠다, 형식적인 예의마저 갖추지 않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이정환도 권이태가 순순하게 털어놓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네. 난 자네가 마음에 차질 않아.”

단정한 척 슈트를 입었지만, 특유의 날티는 여전히 감추지 못한 권이태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입장에서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자네라면 자네 같은 조건의 남자에게 소중히 기른 딸을 보내겠는가?”

“확실히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깔끔한 인정에 이정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래화가 좋다고 하니, 관계를 인정해 볼 생각이야. 그러니 서로 조금씩 양보하도록 하지. 결혼식도 해야 하지 않겠나.”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 가며 술술 속마음을 늘어놓는 태도에선 언뜻 살가움마저 느껴졌다. 매끄러운 밑 작업 끝에, 이정환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래화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게.”

이미 예상했던 말인지라 능숙하게 넘겼다.

“신혼부부한테 처가살이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하게 키운 딸이야. 바깥에서 고생하는 거 원치 않아. 래화 데리고 들어오면, 나도 여러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자네는 나를 적대시해선 안 돼. 래화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오히려 나를 믿어야지.”

“…….”

“래화가 아마 나에 대해 이상한 말을 했을 텐데……. 그 아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입원 치료까지 받았지만 여전해. 많이 위태롭고, 또 불안정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래화의 말을 전부 믿어선 안 돼.”

“장인어른. 일단 입 좀 다물어 보시고.”

권이태가 얼마 태우지도 않은 장초를 손가락으로 뚝 꺾고 재떨이에 던졌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말해 보게.”

“대산 건설 회장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한테 담뱃갑까지 맞아 가면서 참는 이유가 뭡니까?”

“질문하고 싶은 게 그건가?”

“래화 손가락.”

권이태는 가만히 이정환을 응시했다. 허공에서 부닥친 시선이 팽팽했다.

“회장님이 부러트리신 거 맞지 않습니까.”

“새파랗게 어린놈이 의심만 많군.”

이정환이 테이블 위를 더듬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거실의 TV가 켜졌다. 검은 액정 패널이 빛으로 채워졌다.

화면 가득 떠오른 이는 이래화였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래화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마도 의사인 사람에게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회장님이 원망스러워서……. 엄마의 죽음이 전부 회장님 탓 같아서.

바짝 마른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옅은 갈색 눈동자에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기가 유난하게 빛났다.

-그래서 제가 손가락을 부러트리고, 회장님 때문이라고 거짓말했어요.

젖은 눈동자에 온통 사로잡혔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탁자 위에 놓인 이래화의 오른손이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툭. 눈물방울이 보호대 위에 떨어졌다.

작은 물방울은 뒤이어 투둑투둑, 몇 번이나 보호대와 탁자 위로 떨어졌다. 희미한 목소리가 죄를 고백했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화면이 멈췄다. 리모컨을 눌러 영상을 정지시킨 이정환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제 내 말을 믿겠나?”

“…….”

“원한다면 영상을 보내 주도록…….”

시종일관 여유 부리던 이정환은 눈을 부릅떴다. 권이태가 이정환이 내려놓은 리모컨을 낚아채고는 TV를 향해 집어 던진 것이다.

리모컨이 쑤셔 박히며 액정이 쩍 갈라지고, 눈물 흘리던 이래화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 씨발, 진짜…….”

쾅, 소리와 함께 탁자 위 재떨이가 덜그럭거렸다. 멱살이 붙잡혀 끌려온 이정환이 허우적거렸다. 권이태는 허옇게 질린 그를 앞뒤로 탈탈 흔들었다.

“아니 그래, 이래화가 거짓말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장인어른 존나 씨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권이태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정환을 다그쳤다.

“왜 애를 울리고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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