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21화 (21/132)

21화

권이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때마침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액셀만 꾸욱 밟았다.

늦어지는 대답에 래화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술 한번 마시자고 먼저 제안했던 건 권이태였다. 그러니까 얘기만 꺼내면 선뜻 그러자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어두운 차 안, 바깥에서 흘러드는 가로등 불빛으로 물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만 보고 운전하던 권이태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너 진짜 이상해.”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이래화, 너 진짜 이상하다고.”

래화는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딱히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건 없었다. 역시 이상한 쪽은 권이태 같았다.

기껏 건넨 제안이 무시당한 래화는 멋쩍게 있다가 다른 제안을 건네 보았다.

“그럼 라면 먹을래?”

권이태가 운전하다 말고 래화를 홱 돌아보았다. 래화는 그에게 전방 주시하라는 뜻으로 휘적휘적 손짓했다. 권이태는 무척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라면은 왜.”

갑자기 성질을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래화는 차분하게 당연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집에 가면 배고플 테니까 라면 먹자고. 밥하기 귀찮아.”

“자꾸 사람 착각하게 만들지?”

“라면 먹자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넌 영화도 안 봐?”

“음, 액션 장르만 보는데…….”

권이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괜히 흩뜨리다가 불퉁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알았어.”

‘이런 식’이 뭔지 잘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권이태는 아주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라면도 먹어? 절대 안 먹을 줄 알았는데.”

“건면만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래화는 권이태의 옆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미간에서 도통 힘이 풀리질 않았다. 저러다 눈썹 사이에 일자로 선이 새겨질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니 권이태는 자극적인 맛을 좋아했다. 건면은 밍밍하다고 싫어할지도 몰랐다. 고민하던 래화는 나름의 합의점을 제시했다.

“너 건면 싫어하면 그냥 라면도 사서 들어가고.”

“됐어.”

갑자기 차량 속도가 높아졌다. 몸이 뒤로 확 쏠릴 정도로 거칠게 밟아서, 래화는 깜짝 놀랐다. 권이태가 낮게 중얼거렸다.

“라면 맛없게 끓여 주기만 해 봐…….”

래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로등 불빛 때문일까. 그의 뺨이 조금 불그스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집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샤워부터 했다. 말끔하게 화장을 지우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대충 말리고, 휘적휘적 부엌으로 걸어갔다. 어색하게 부엌을 서성거리는 권이태가 보였다. 그가 식탁에 쌓아 놓은 라면 탑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라면 탑은 꽤 높았지만, 저것만으로는 양이 조금 적을지도 몰랐다. 권이태가 저녁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떠올리며, 밥솥에 남은 밥을 확인했다.

대충 라면에 밥 말아 먹으면 되겠지…….

앞치마를 두르고, 제일 위에 있는 라면을 집어서 포장지에 적힌 조리법을 신중하게 읽었다. 오랜만에 라면을 끓이는데, 무려 여섯 개를 한 번에 끓이려니 조금 긴장되었다.

라면 끓여 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한강물 라면이 되면 안 되니까, 라면 다섯 개에는 물과 스프를 얼마나 넣는지 인터넷에 검색했다.

정확한 용량만큼 계량컵으로 물을 받아다 냄비에 끓이는데, 권이태가 옆에서 또 알짱거렸다. 도와줄 필요가 없는데 계속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래화를 구경했다.

“많이 배고파? 생면 조금 부숴 줄까?”

“아니. 이거 계란 꺼내?”

“……응.”

그냥 심심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권이태를 조수 역할로 옆에 붙여 놓고 라면을 끓였다.

파랑 계란까지 넣어서 완성한 라면을 권이태가 식탁 위로 날랐다. 김치랑 밥솥에 남은 밥을 죄다 긁어서 권이태 앞에 놓아 주고, 늦은 저녁을 시작했다.

오성급 호텔에서 미슐랭 식당의 코스 요리를 놔두고 집에 와서 라면이나 끓여 먹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래화는 진심으로 라면이 훨씬 맛있었다.

아까 호텔에서는 식전주 한 모금 먹은 게 전부인데도 체하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면발에 국물까지 와구와구 먹어도 맛있기만 했다.

열심히 라면을 먹어 치우던 래화는 문득 맞은편에 앉은 권이태의 젓가락질이 굉장히 느릿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맛없어?”

“……매워.”

“저번에 제육볶음은 잘 먹었잖아. 김치 넣은 거.”

“그게 내 한계야.”

생각해 보니 제육볶음은 설탕도 살짝 넣어서 달달하게 만들었다. 오늘 끓인 라면은 꽤 많이 매운맛이라서 먹기 힘든 듯했다. 권이태가 끙끙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매운 줄 몰랐어…….”

“간장 계란밥이라도 먹을래? 금방 만들어 줄게. 아, 아니면 케첩 계란밥.”

“됐어.”

그러더니 또 꾸역꾸역 한 가닥씩 먹어 댔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권이태에게 밥공기에 물을 받아다 갖다 주었다.

“씻어 먹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면발을 씻어서 먹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소리 내어 웃자 권이태가 우뚝 젓가락질을 멈추고 쳐다봤다.

먹는 걸 보고 웃다니, 실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쉽게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산만 한 덩치의 근육질 남자가 라면을 한 가닥씩 씻어 먹는 걸 본다면 누구나 웃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러서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그동안 권이태는 계속 래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래화는 살짝 웃으면서 그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 너 귀여워서.”

권이태의 미간에 또다시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그냥 콧잔등을 찡그리곤 면발을 밀어 넣었다.

약간의 소동 끝에 라면을 다 먹어 치우고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끝냈다. 양치를 하고 나서 물을 마시러 잠시 나왔는데, 권이태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잘 거야?”

그는 모범생을 꼬시는 불량배처럼 턱 끝만 까닥였다.

“술 마시자며.”

아까 술 마시자는 말에 질색하길래 라면만 먹는 줄 알았더니……. 래화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애매한 시간이었다. 11시 취침이지만, 자기 전에 스트레칭도 해야 하고, 명상 시간도 10분 가져야 했다. 그냥 다음에 먹자고 할까 고민하는데, 권이태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2층에서 마시자.”

역시 권이태는 눈치가 빨라서, 고민하는 래화에게 가장 유혹적인 미끼를 흔들어 보였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래화는 오늘 하루만 정규 취침 시간을 지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슬쩍 권이태한테 다가가 검지를 치켜세웠다.

“그럼 딱 한 시간만.”

“왜?”

“11시에는 자야 해.”

“너 또 이상한 소리 할 거지.”

“이상한 소리? 그냥 10시부터 세포가 재생되는 시간이고, 멜라토닌이…….”

“알았으니까 가자.”

권이태가 덥석 손목을 붙들었다. 래화는 그를 뒤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미지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2층은 1층보단 공간이 좁았다. 방 2개에 화장실 하나, 그리고 거실이 끝이었다. 2층의 넓은 거실에는 회색 빈백 소파와 각종 운동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세상 재미없는 풍경이었다.

“2층 위험하다며.”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자 권이태가 피식 웃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졸졸졸 뒤쫓아 간 래화는 문 너머로 펼쳐지는 광경에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와아…….”

넓은 방의 벽 한 면에 총기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분해된 총과 부품, 수리 도구들이 놓여 있고, 그 외에도 수상한 상자와 캐리어 등이 잔뜩이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철제 스탠드 하나만 켜 놓아서 사위가 어두웠는데, 덕분에 그림자와 어둠으로 반쯤 뒤덮인 방은 정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가 났다.

래화는 상기된 얼굴로 총기를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길쭉한 장총과 짧은 권총들이 종류별로 다양했다. 액션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총들도 있었다.

“이거 다 쓸 줄 아는 거야?”

“왜, 하나씩 쏴 볼까?”

“아니.”

권이태라면 집 안에서 총을 쏠 것 같아서 얼른 거절했다. 래화가 총을 구경하는 동안, 권이태는 한쪽에 놓인 술 진열장에서 위스키 한 병과 유리컵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원도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온더락을 만들어 래화에게 건넸다. 그가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래화를 보며 슬쩍 웃었다.

“너 하나 줄게.”

막 술잔에 입을 가져갔던 래화는 놀란 나머지 그만 위스키를 꿀꺽꿀꺽 반이나 마셔 버렸다. 들이켜고 나서야 뒤늦게 맛을 느꼈다.

꿀과 과일 맛이 나는 셰리 위스키였다. 래화는 아린 목을 부여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책상에 걸터앉은 권이태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총 쏘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죽이고 싶은 사람 있으면 쏴.”

맞은편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은 래화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죽도록 싫고 미운 사람은 있지만, 그래도 죽이진 못할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럴 각오가 있었으면 용병이 아니라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을 터였다.

“누나 쫄보네.”

“상식적인 거야.”

래화의 대답에 권이태가 피식 웃었다.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손에 쥔 탓일까. 어쩐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래화는 반 남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물었다.

“너도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

“있었지.”

“……이젠 없어?”

“어.”

권이태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검은 눈동자 위로 언뜻 즐거움이 스쳤다.

“죽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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