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잘각, 조금 녹아내린 각 얼음이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래화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만 끄덕이곤 위스키를 홀짝였다.
“안 놀라네?”
“놀랐어.”
“보통은 사람 죽였다고 하면 기겁하지.”
바퀴벌레를 죽였대도 그것보단 더 놀라겠다며, 권이태가 혀를 찼다. 래화는 얼음만 담긴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그에게 반문했다.
“네 성격에 죽이고 싶은 사람을 살려 두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맞는 말이긴 한데.”
권이태는 재밌어하며 한참 웃었다. 두 번째 잔도 금방 비었다. 래화는 세 번째 잔을 받았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덕분인지 입술이 느슨해졌다.
“어떻게 죽였는지 물어봐도 돼? 총 같은 걸 막 쐈나…….”
“한국은 총기 소지 불법이야.”
전에 래화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 써먹은 권이태가 실실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계획이나 우발은 아니었고. 대충 미필적 고의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러나 한가로운 목소리 아래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아주 옅고 희미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똑같은 감정을 느낀 적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그건 가장 가까워야 할 존재에게 품은 분노였다. 래화는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가족이었어?”
“응.”
선선하게 대답한 권이태는 술잔을 살살 흔들었다. 그가 공연하게 잘각잘각 얼음 소리를 내며 래화를 물끄러미 보았다. 머무르는 시선이 길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도 비슷하니까.”
피로 묶여서 쉽게 잘라 낼 수도 없는, 강제로 이어진 인연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잘라 내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둘이서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조용히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한 병을 다 마셨다.
권이태는 위스키 병에서 마지막 잔을 따라 내어 훌쩍 마셔 버리곤 새로운 술을 꺼내 왔다. 이번에는 사과 향이 올라오는 위스키였는데, 얼음을 넣지 않고 더블 샷 잔에 스트레이트로 주었다.
꽉꽉 눌러서 담아 준 술을 받아다 크게 한 모금 마시며 권이태를 확인했다. 취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도 술을 잘 마시는 모양이었다.
벌써 반쯤 비운 술잔을 흘긋흘긋 살피다가,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회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너도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망상병 걸려서 헛소리하고, 없는 일을 멋대로 지어낸다고 생각해?
마구 치솟는 질문들을 혀 밑에 감춰 눌렀다. 힘껏 눌렀는데도 불쑥 튀어나오려고 해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권이태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누가 손으로 잡아당겨 늘리기라도 한 듯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답을 들었다.
“그냥 너 이상하다는 얘기. 근데 이정환이 네 손가락은 왜 부러트렸는데?”
“……내 말 믿어?”
“못 믿을 것도 없지.”
대수롭지 않게 드러내는 신뢰에 목이 메었다.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던 거대한 좌절을 작은 돌멩이처럼 만들어 주는 그가 좋았다. 래화는 조금 더 솔직해졌다.
“몰래 화실 만들어 놓고 그림 그리다가 들켰어.”
“…….”
“내가 엄마처럼 될까 봐 걱정하시거든. 엄마의 마지막 흔적인 나까지 똑같이 잃고 싶지 않대.”
이정환은 류설연의 자살이 그림 때문이라고 여겼다. 래화도 계속 그림을 그린다면, 그녀처럼 미쳐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부러트리는 극단적인 방법도 래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행한 것이었다.
“웃긴 이야기 해 줄까.”
권이태는 조용했다. 그러나 분명히 듣고 있었다. 차분한 청자는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무엇을 말하든 담담하게 들어 줄 것 같아서, 빗장 풀린 듯 깊은 이야기를 쏟아 내 버렸다.
“나 그림…… 엄청 못 그린다?”
말끝에 어색한 웃음을 덧붙였다. 태연하게 말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자꾸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할 줄 아는 게 엄마 흉내뿐이거든……. 맨날 류설연 짝퉁이라는 말밖에 못 들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남 따라 하기밖에 못 하는 화가.
그런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화풍을 바꿔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에는 류설연의 아류작만 그려 댔다.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점점 더 똑같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단한 작품을 내고 싶은 욕심만 많고, 그걸 해낼 실력은 안 되고……. 그래도 그리고 싶은 걸 어떡해.”
권이태라는 새로운 영감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제 작품을 내놓으면 류설연의 미공개작이냐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앞으로 1년간 죽기 살기로 노력해 봤자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래화는 그려야 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었다.
“나 멍청하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뒤늦은 부끄러움에 발개진 뺨을 손등으로 식혔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조금 어지러웠다. 살며시 권이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는 잘 그려 줄게. 진짜 최선을 다해서…….”
래화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 모델 해 줘.”
물끄러미 래화를 보던 권이태는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에 휙 털어 넣었다. 그가 술잔을 책상에 다소 거칠게 내려놓았다. 유리잔 바닥이 나무 책상과 부닥치는 소리가 딱 하고 선명하게 퍼졌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래화 앞에 섰다. 양옆으로 팔을 뻗어 소파 등받이를 짚으니, 래화는 그의 품에 온통 갇혔다.
고개를 들고 멍하니 남자를 보았다. 날카로운 선으로 찢어진 눈매, 그 안에 담긴 검은 눈. 무겁고 짙으면서도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그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물감이 있다면 가장 아끼는 색이 되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물감을 섞어도 이 오묘한 색을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계속 똑같지 않으니까. 어떨 땐 서늘하고, 가끔은 가볍고 투명해지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물감이 아니고서야, 그와 똑같은 검은색을 만들어 내진 못하리라.
탐나는 색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미동 없이 또렷하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순간, 래화는 입술을 벌렸다.
“너 눈동자…….”
생각이 제멋대로 흘러 나갔을 때는 이미 손을 뻗은 뒤였다. 천천히 눈가를 쓰다듬었다.
“되게 예쁘다…….”
어루만지는 손길을 따라 권이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졌다. 그가 이내 느릿하게 눈을 치떴다. 홀린 듯 검은 눈을 바라보던 래화는 욕심을 참지 못했다.
“나한테 줘.”
권이태가 비뚤게 웃었다. 그는 이마를 툭 맞댔다.
“눈알은 못 파 줘, 예또야.”
낮은 목소리가 오싹해서 허리가 움찔 떨렸다. 아릿한 간지러움에 몸을 들썩이며 대꾸했다.
“나 또라이 아닌데. 예쁜 건 맞지만.”
그가 낮게 웃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더운 숨결이 야릇하게 살갗에 와 닿았다.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붉은 혓바닥이 보였다. 느릿하게 기어 나온 혀는 천천히 래화의 입술을 핥았다. 아랫입술에서부터 윗입술까지, 꾹꾹 누르듯 핥아 올리고서 속삭였다.
“대신 다른 거 줄게.”
래화는 그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와락 끌어당기는 순간, 몸이 뒤로 밀렸다. 소파에 파묻힌 채로 격하게 입술을 맞댔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계속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짜릿하게 치솟는 감각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져 눈을 질끈 감았다.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침입자에게 여린 살을 내어 주었다.
어느새 잔뜩 고인 침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혀끝이 입천장을 살살 간질일 때마다 꼬리뼈 부근이 찌릿했다. 그러다 깊은 곳까지 쑤시듯 파고들면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목덜미를 끌어당기던 손이 흘러내려 그의 가슴팍을 짚었다. 단단한 상박이 가볍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키스했을까. 시간을 헤아리는 감각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가, 갑자기 권이태가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밀어 냈다.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하…….”
래화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아무렇게나 손등으로 닦았다. 여전히 뜨거웠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도, 맞닿은 살갗도, 그리고 검은 눈동자도…….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취해 버린 모양이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한없는 충동이 속을 들쑤셨다. 갑자기 불쑥 화가 났다. 래화는 힘껏 눈을 치뜨고서 뾰족하게 물었다.
“끝이야?”
“그러면.”
“나는 너한테 라면도 끓여 줬는데.”
권이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가 손가락에 얽힌 래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게 진짜…….”
그가 들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고하는 듯한 말에도 래화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한참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권이태가 입매를 비죽 끌어 올렸다. 팽팽하던 끈이 툭 끊어지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