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담뱃갑을 보고 대체 무슨 기억을 떠올린단 말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듯 답하니, 권이태는 잠깐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삐죽 솟아오른 제 머리카락을 슥슥 빗질했다. 그러더니 또 엉뚱한 말을 해 댔다.
“담배 피워 볼래?”
“뭐?”
“술도 마셨잖아. 나쁜 짓 더 해 보자.”
담배 정도야,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든, 권이태와 한 섹스보다 정신 건강에 나쁜 짓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만 그러했을 뿐이고, 래화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으응…….”
그가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꿎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던 찰나였다.
“야.”
짧은 장면들이 눈앞을 스쳤다. 습기 때문에 텁텁한 공기, 이마에 송골송골 배어난 땀, 무더운 햇볕, 작은 그늘, 바람결에 흔들리는 녹색 나뭇잎.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얼룩진, 아직 앳된 티가 묻어나는 남자아이.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는 커다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에 가려지지 못한 입술 끝에 새겨진 상처가 보였다. 목에는 벌건 손자국이 찍혀 있었고, 옷 안쪽으로 언뜻 드러나는 살에도 폭력의 흔적이 가득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자리한 미성숙함 때문일까.
아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고, 눈부신 여름 햇살 아래에서도 짙고 어두웠다. 망가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약속을 속삭였다.
“내가 죽여 줄게.”
이게 뭐지.
번개 치듯 반짝 떠오르고 사라진 기억의 단편에 래화는 눈을 깜빡였다.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그 순간에 자신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무더운 여름날의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러나 잊었던 기억이라 하기에도 한없이 낯설었다. 래화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저런 사람은 없었다. 의문에 빠져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문신 말이야.”
내뱉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을 깨닫고 질문했다.
“성인 되고 나서 한 거지?”
“어.”
“왜…… 한 거야?”
“딱히 좋아해서 한 건 아니고.”
권이태가 고개를 대각선으로 젖혔다. 목빗근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뱀 문신이 유연하게 꿈틀거렸다.
“그냥 기록이라고 해야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적어 둔 거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긴 손가락이 문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뱀의 비늘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모양새가 야릇했다. 권이태는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접어 웃었다.
“잘 어울리지?”
“아니. 그거 때문에 너 진짜 양아치 같아.”
진심을 담아 혹평해 주었다. 그러자 권이태가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어째서인지 문신이 별로라는 비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여간 진짜 이상했다.
문신 새길 때 아프진 않았을까. 걔는 아픈 걸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
아픈 걸 싫어한다는 사람이 누구지.
자꾸 뜬금없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손에 쥐고 가만히 뜯어보려는 찰나, 선뜩한 의문이 들었다.
이거 설마…… 내가 망상하는 건가?
없었던 일을 망상하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드는 순간, 지독한 꽃향기가 숨통을 막았다. 허상의 꽃향기 속에서 류설연이 흐느끼듯 웃었다.
“내 작은 꽃…….”
환청이 귓가에 쨍 하고 울리자, 래화는 곧바로 모든 생각을 멈췄다. 호흡이 점차 빨라졌다. 덜덜 떨리는 양손을 기도하듯 꽉 맞잡고 헐떡이던 때였다.
“……이래화!”
권이태가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래화를 살폈다.
“너 괜찮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천천히 깍지 낀 손을 풀고 그를 밀어 냈다. 막혔던 숨을 고르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웠다. 희게 질린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니 복잡하던 문제도 전부 깨끗하게 결론이 내려졌다. 래화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단 하나였다.
이래화는 ‘정상’이어야 했다.
어젯밤은 너무나 비일상적이었다. 안온한 수평선을 유지하던 래화를 단숨에 진창으로 처박았던, 잔인할 정도로 자극적인 순간들.
새로운 자극은 매력적인 만큼 위험했다. 지금도 래화는 위태로운 경계선에 서 있었다. 권이태와 여기서 더 가까워진다면, 결국 선을 넘게 될지도 몰랐다.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비정상적인 자극에 정신이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래화는 절대 류설연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처럼 미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생각을 끝낸 래화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수해서 미안해.”
“……무슨 실수?”
“술기운에 실수했어.”
권이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동안, 래화는 손을 몇 번이나 주먹 쥐었다가 펼쳤다. 끝 모를 초조함에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권이태는 아주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나운 눈빛이 래화를 직시했다.
“어린놈 따먹고 모른 척하시겠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놀란 래화가 입술을 벌리고 굳은 사이,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어제 줄줄 싸면서 자지러지길래 꽤 괜찮게 좆질한 줄 알았는데, 별로였어?”
“그런 게 아니라!”
래화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싶은데, 머릿속이 뒤엉켜 쉽지 않았다. 겨우 튀어나온 건 앞뒤가 다 잘린 말뿐이었다.
“……무서워서.”
검은 눈동자 속 동공이 줄어들었다. 잠깐 굳었던 권이태는 뒤늦게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짧은 중얼거림이 혼잣말처럼 이어졌다.
“무섭다고.”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매가 차가웠다. 래화가 더 자세히 말하려는 순간, 권이태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마. 싫다는 사람 억지로 어떻게 할 생각 없으니까.”
따뜻한 손이 래화의 뺨에 닿았다. 엄지로 희게 질린 뺨을 가볍게 문지른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너랑 진지하게 뭘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
“깔끔하게 관계 돌립시다, 고객님. 됐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피식 웃으며 손을 떼어 냈다.
“더 자. 난 처리할 일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방문이 닫혔다. 혼자 남겨진 래화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수월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울적한지 모를 일이었다.
***
“씨발.”
철컥, 철컥. 빠른 손놀림이 정확하게 총기를 조립해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돌격 소총 하나를 조립한 권이태는 잠시 허공에 총을 겨눴다가, 이번에는 역순으로 분해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부품을 분해하던 그는 다시금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순식간에 돌격 소총 토막 살해의 현장을 만들어 놓던 때였다. 태블릿 PC의 화면이 반짝 켜졌다. 메이의 연락이었다. 거치대에 태블릿을 얹어 놓고 책상 의자에 앉았다.
-안녕, 태이.
탁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반쯤 감긴 눈을 한 젊은 여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바짝 올려 묶은 그녀는 기다란 막대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다 말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이가 너 요새 기분 좋다고 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좋은데?”
-하하하, 미친 새끼야.
낮게 웃음을 터트린 메이가 손가락 두 개로 양쪽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눈빛이 기분 좋은 거면 다시 병원 들어가야 해.
권이태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확인한 그녀는 히죽 웃고는 토독토독 타자를 두드렸다.
-말한 거 전부 확인 끝냈어. 지금 자료 전송 중인데 잠시만 기다려. 여기 인터넷이 너무 느려……. 아, 제이 접속했다. 바로 연결할게.
액정 화면이 삼분할로 나뉘며 최정이 나타났다. 막 샤워를 마치고 온 듯,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 대던 최정은 화면으로 권이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질색했다.
-어우.
최정이 메이랑 똑같은 손동작을 했다.
-얘 눈깔 왜 이러는지 아시는 분?
그래서 권이태도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나 기분 좋은데.”
-개소리 멈추시고 지금 당장 거울이나 보시죠? 누구 하나 죽일 눈깔인데?
그러더니 메이랑 둘이서 낄낄 웃어 댔다. 메이가 막대 과자를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물었다.
-그런데 태이, 정말 무슨 일 있어? 플러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플러이?”
-이래화 별명. 내가 붙였어.
데저트에서는 닉네임을 사용하길 권장했다.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업계이기도 하고, 긴박하게 일 처리하는 경우가 많으니, 통신에서 헷갈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최정은 제이, 권이태는 태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태국인인 메이 또한 그녀의 1)츠렌을 닉네임으로 쓰고 있었다. 데저트의 대표인 슈미트도 본명이 아니라, 흔하고 간단한 이름을 딴 닉네임이었다.
최정과 권이태야 서로 친해서 본명을 부르지만, 여럿이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닉네임으로 호칭했다. 작전 대상에게 닉네임을 붙이는 것도 흔한 일이었지만…….
“왜 플러이인데?”
그러자 메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태국에서 본명 대신 사용하는 별명. 본명은 길고 어려워 가족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