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29화 (29/132)

29화

-태국어로 보석이라는 뜻이야. 네가 플러이 때문에 보석 뿌리고 다니길래.

메이는 양손의 검지를 쭉 펴서 옆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질을 받은 최정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제이한테는 파파라차 사파이어 준다고 그러고, 위치 추적용으로 산 웨딩링도 10만 달러나 주고 맞췄다며. 다이아몬드 빡빡한 걸로.

-그거 더 비싼 거로 하려다가, 플러이가 손을 많이 쓰니까 캐럿 큰 다이아몬드는 불편하다고 그 정도에서 끝낸 거야.

-낭만적이네, 태이. 반지 예쁘더라. 난 진주 사 줘. 봐 둔 거 있어.

주먹을 쥔 메이가 네 번째 손가락만 세워 보였다. 가운뎃손가락과 한 칸 차이인 묘한 손동작을 화면에 가득하게 채워 놓던 그녀는 권이태의 반응이 없자 머쓱히 손을 내렸다.

어차피 비밀로 할 일도 아니었으니, 권이태는 그냥 진주 사 주겠다는 말만 짧게 하고 말았다. 메이가 흐흣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플러이랑 무슨 관계야?

“뭐긴 뭐야. 고용 관계지.”

-재미없게 굴지 말고.

“…….”

권이태는 말없이 지긋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움찔한 메이가 슬그머니 먹던 막대 과자를 내려놓았다. 최정이 핸드폰을 번쩍 치켜올리며 어색하게 외쳤다.

-때마침! 지금 딱! 전송이 완료되었는데! 우리 일 얘기를 시작해 볼까아……?

권이태는 핸드폰으로 전송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무표정하게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메이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그때 DS 호텔에서 봤던 영상은 진짜야.

권이태는 가볍게 눈매를 찌푸렸다. 딥러닝 기반으로 목소리와 영상을 합성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조사 좀 해 봤는데 정신병원 입원 과정도 굉장히 퍼펙트한 케이스. 환자가 자기 상태를 명확히 인지하여 가족의 도움을 받아 입원 진행했고, 병원 내에서 치료도 적극적으로 받았다고 하는데…….

메이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자해란 말이지.

이래화는 오른쪽 손가락이 죄다 부러진 채로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의 플러이는 본인이 정상이다, 스스로 손가락을 부러뜨리지 않았다, 이렇게 주장하지만, 결국 말뿐이고. 이정환은 입원 기록에다가 영상까지 가지고 있으니 훨씬 신뢰가 가지. 게다가 조사하면 할수록 정황상으로는 확실히, 플러이가 겪은 사건이 워낙…….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메이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 3페이지 확인해 봐. 이번에 새로 알아낸 건데, 단순히 류설연의 시체랑 함께 발견된 게 아니더라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구급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래화는 류설연이 목을 매달고 죽어 가는 과정을 전부 보았다고 증언했다.

류설연은 친딸을 노끈으로 의자에 칭칭 묶어 놓고, 제가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 것이다.

그녀가 왜 그런 끔찍한 짓거리를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일한 증인인 이래화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정환 또한 그런 딸을 적극적으로 감싸고 나서서, 경찰 조사는 결국 아무것도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근데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어. 플러이 담당했던 의사가 지병으로 사망했더라? 플러이 퇴원하고 몇 개월 뒤에.

-오……. 타이밍이 꽤 의심스러운데?

-그렇지? 의사는 죽었지만, 담당 간호사는 아직 해당 병원에서 근무 중이야.

“병원 찾아가서 간호사 확인해 볼게.”

-오케이. 그리고 전에 제이한테 들었겠지만, 뤼진 말인데.

이래화는 과거 이정환의 눈을 피해서 몰래 화실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결국 이정환에게 발각되어 화실이 폐기 처분 됐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래화의 그림 몇 점이 유출되었다.

-그때 화실 폐기 처리하던 직원 하나가 그림을 빼돌렸더라고. 바로 퇴사하고 류설연 미공개작이라고 그림 팔아먹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뤼진한테 들어간 거지.

마카오의 유명한 카지노 재벌, 뤼진은 류설연의 극성스러운 팬이었다. 그림을 구입한 그녀는 유화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것을 보곤, 이것이 진짜 류설연의 그림이 아닌 모방작임을 알아보았다.

뤼진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분노가 식고 난 후에 다시 모방작을 살펴보곤,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미 죽은 화가를 되살릴 수는 없으니, 죽은 류설연과 완벽하게 똑같은 화풍을 가진 모방 화가라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판 직원은 이미 이정환에게 제거당한 뒤였다. 이정환은 모방작을 그린 화가가 중국인인 것처럼 위장해 두기까지 했다.

뤼진은 중국 땅을 뒤져 가며 열심히 화가를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마카오의 마피아에게 화가를 찾아 달라는 청부를 넣었다.

뤼진의 거금을 받아먹은 마피아들은 모방 화가의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덕분에 현재는 화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상태였다.

-마피아랑 엮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정보 좀 흩뜨려 놓으려고 마카오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어려워. 이것 때문에 슈미트랑 마카오에서 더 있다가 한국 들어갈 것 같아.

“확인했어.”

-와, 플러이 진짜 인기 좋다. 지금 최소 세 사람이 노리는 거잖아.

최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타자를 두들기던 메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정환, 뤼진……. 나머지 하나는 누군데?

-태이.

그리고 최정과 메이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권이태는 웃는 두 사람을 구경하다가 조용히 총을 집어 들었다. 기다란 돌격 소총의 총구를 어루만지며, 상반신을 의자에 느슨하게 기댔다.

“둘 다…… 심심해?”

-아니.

-전혀.

메이는 빠르게 도망갔다.

-병원 주소랑 간호사 연락처 등등은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있어. 그럼 안녕.

메이가 순식간에 화면을 끄고 사라지고, 최정만 남았다. 당연히 따라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최정은 미적거렸다.

-……야.

“이틀 뒤에 병원 찾아가 볼 테니까, 나 대신 이래화 경호해.”

-어어. 근데…….

“왜.”

-너 이래화랑 무슨 일 생긴 거 맞지?

권이태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대체 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게 이래화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사방에서 물어 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래화 때문이 맞긴 했다. 실컷 같이 뒹굴어 놓곤, 다음 날에 실수였다면서 밀어 내다니. 그것도 무섭다는 이유로 말이다.

“……무서워서.”

이래화 저 또라이가 날 무서워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는데, 핑계를 대는 것일 터였다. 아마 정신적인 문제인 듯한데, 자신이 어떤 부분을 건드려서 겁을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캐물을 수도 없었다. 권이태는 아주 효과적인 여러 가지 심문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유리 인형처럼 여리고 약한 이래화에게 쓸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속이 답답해서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때였다. 손가락에 네크라인이 걸려 티셔츠가 잠깐 늘어졌다. 최정이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야, 씨발, 잠깐! 너 그거 뭐야!

“뭐.”

-목에, 와씨, 목에 그거!

옷자락이 끌어 내려지며 어제 이래화가 남긴 잇자국이 보인 듯했다. 최정이 펄떡펄떡 난리를 쳐 댔다. 권이태는 심드렁하게 그의 잔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가만히 안 놔둘 줄 알았다고! 어쩐지 아주 잡아먹으려는 눈으로 쳐다보더라니!

“이제부터 가만히 놔둘 거니까 신경 꺼.”

-진짜 그 흉기를 휘두르다니 양심도 없……, 어?

최정이 당황해하면서 질문했다.

-왜 가만히 놔두는데?

“……실수했어.”

권이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1년 뒤에는 의뢰 끝인데. 서로 사는 세계도 너무 다르고……. 너도 알다시피 나 지랄병도 있잖아. 돌아가야지.”

-한국 와서 계속 괜찮길래 정착하는가 싶었는데.

“일시적인 거야. 언제 발작 날지 몰라.”

-그건 그렇지만…….

최정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 형이 오늘 위로해 준다. 술 사 들고 갈 테니까 기다려라. 같이 양주 까자.

“씨발.”

-왜 또 씨발인데.

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자동 반사처럼 욕이 나왔다. 그놈의 술 때문에 지금 이 꼴이 났다. 아니, 생각해 보면 술 마신 이래화가.

“너 눈동자 되게 예쁘다…….”

“나한테 줘.”

술 마신 이래화가 너무 귀엽고 예쁘게 굴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홀린 듯 제 눈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이래화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섭다고 속삭이던 이래화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대비가 너무나 확연해서, 기분이 더욱 좆같아졌다.

권이태는 손으로 눈을 덮었다. 들쭉날쭉 하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술 안 마셔,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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