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이를 위한 아침……. 어린이가 좋아하는……. 한식…….”
래화는 너튜브 검색창에 문구를 적으며 중얼거렸다. 검색 버튼을 누르자, 너튜브에서 인기 요리 영상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핸드폰을 쥐고 고심했다. 권이태는 저녁엔 먹방 너튜버처럼 무지막지하게 먹어 댔지만, 아침과 점심에는 소식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집밥을 먹이기 시작한 뒤로는 양이 좀 늘긴 해서, 보통 성인 남자만큼은 먹었다.
아침이니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면 좋겠는데.
앞치마 주머니에 한손을 찔러 놓고 이런저런 영상을 눌러 보았다. 그러다 괜찮아 보이는 메뉴를 발견했다.
“새우 계란찜이랑 소고기 주먹밥……. 이거 해야겠다.”
영상에서 조리법을 확인하고, 재료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실에서는 여전히 초코우유 군대가 래화를 맞이해 주었다. 래화는 눈으로 스으윽 초코우유의 개수를 헤아렸다.
근래 초코우유 줄어드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원래대로라면 권이태가 하루에 몇 통씩은 해치웠을 텐데, 최근에는 래화가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이니 이상한 걸로 끼니를 때울 새가 없었던 것이다.
냉동실을 슬쩍 열어 보니, 아이스크림도 거의 안 먹는 듯했다. 군것질이 줄어서 다행이었다. 특히 초코우유는 액상 과당이니까 몸에 좋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씻은 다음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다진 소고기에 후루룩 밑간부터 하고, 작은 뚝배기에 물과 육수 팩을 넣어 끓였다. 육수가 우러나오는 동안에는 달걀을 풀고, 소고기 주먹밥에 쓸 야채를 꺼내서 도마에 늘어놓았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야채를 썰려던 때였다. 아직 잠기운이 묻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맛있는 냄새.”
너무 놀라서 손에 힘이 풀렸다.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날렵한 손길이 래화의 손을 움켜쥐어서 칼이 떨어지는 걸 막았다.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남자가 다소 격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다칠 뻔했잖아.”
잠시 심호흡을 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권이태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왜 그렇게 놀라? 누가 너 잡아먹으러 왔어?”
“……아니, 그냥. 오는 줄 몰랐어.”
“내놔.”
래화의 손에서 식칼을 뺏어 간 그는 손을 씻더니, 직접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래화는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정글도라면 모를까, 권이태한테 식칼이라니……. 혹시 야채를 썰다가 도마도 썰어 버리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요리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던 남자는 처음에만 잠깐 주춤거렸을 뿐, 금방 능숙하게 칼질해 나갔다. 시원시원한 칼질 소리가 일정하게 도마 위를 두드렸다.
순식간에 야채 다지기를 끝낸 권이태는 래화가 보는 앞에서 식칼을 허공으로 던졌다. 래화는 바짝 얼어서 비명 질렀다.
“악……!”
시퍼런 칼날이 번뜩거렸다. 한 바퀴 핑그르르 회전한 식칼은 권이태의 손에 다시 착 하고 떨어졌다.
어디 베이거나 다친 곳 없이, 말짱하게 식칼을 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십년감수한 래화 앞에서 권이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칼질 잘해.”
“…….”
“칼 쓰는 법도 배웠거든. 총을 쓸 수 없는 경우도 생기니까.”
심장이 떨어질 뻔했던 래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알겠으니까 제발 칼 내려놔.”
권이태는 얌전히 칼을 내려놓았다. 래화는 그에게 밑반찬을 꺼내고 수저를 놓는 일을 시켰다.
그동안 새우 계란찜을 뚝배기에 올려놓고, 소고기랑 다진 야채, 밥을 달달 볶았다. 스테인리스 볼에 밥을 담아 김 가루를 뿌리고, 주먹밥을 만들려고 하니 기웃거리던 권이태가 또 끼어들었다.
“내가 할게.”
그는 냉큼 스테인리스 볼을 들고 식탁으로 가 버렸다. 그리곤 비닐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뭉쳤다. 래화는 눈을 깜빡였다.
“…….”
주먹밥을 만들랬더니, 진짜로 자기 주먹만 하게 뭉치고 있었다. 래화는 왕주먹밥을 삼등분으로 나눠서 만들라고 충고하고 싱크대를 정리했다.
잠시 후, 몽글몽글하게 완성된 새우 계란찜과 다소 개성적인 모양새인 소고기 주먹밥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래화는 젓가락으로 권이태가 뭉친 주먹밥을 집어 보았다.
시킨 대로 주먹밥을 작게 나누긴 했는데, 모양새가 영 울퉁불퉁했다. 누가 봐도 동글동글한 모양은 아니었고, 뚝 하고 잡아떼 낸 듯한 생김새였다.
주먹밥을 하나씩 날름날름 먹어 치우던 권이태가 씩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잘 만들었지?”
“응.”
순순히 답하자 그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나 오늘 외출해. 빠르면 새벽에 들어오고, 늦으면 내일 밤에 귀가할 거야. 그동안 최정이 경호해 줄 거고.”
이따 카페 출근하는 시간 맞춰서 최정이 집 앞으로 올 거고, 혹시 밖에 나갈 일 있으면 최정 끌고 나가면 된다며 설명한 권이태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고객님 경호랑 관련해서 외출하는 거야. 의뢰 성실하게 하는 중이니 오해하지 마.”
그의 부연 설명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입맛에 맞는지, 주먹밥에 계란찜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운 권이태는 래화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 그릇을 싱크대에 넣었다.
간단하게 물로 헹구고 식기세척기에 차곡차곡 쌓아 넣어 작동까지 시킨 다음, 래화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식탁을 행주로 닦고 있던 래화는 움찔 놀랐다. 권이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묘한 침묵이 고이기 전에, 그는 피식 웃어 보였다.
“왜 자꾸 놀래, 자기야.”
장난스러운 어조가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걷어 냈다. 권이태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나 나간다.”
달칵, 현관문이 닫혔다. 혼자 빈집에 남은 래화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얼마간 그렇게 있다가, 실내화를 직직 끌며 화실로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출근까지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드로잉 조금만 하다가 나갈 생각이었다.
기계적으로 드로잉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던 래화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종이에는 이상한 꽈배기 같은 선만 잔뜩 그려져 있었다. 삐뚤빼뚤 엉켜 버린 선을 응시하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관계를 되돌리자는 말 이후, 권이태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깔끔하게 행동했다. 그에게는 이런 일들이 흔한 모양이었다. 혹시나 상처를 줬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래화도 똑같이 아무렇지 않게 굴려고 노력 중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날의 강렬했던 자극이 이미 마음에 화상처럼 새겨져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이 또한 잠잠해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래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지금이야 동거까지 하고 있지만, 어차피 1년 뒤에 끝날 관계였다. 미리 관계의 끝에 익숙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터였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래화가 원했던 고요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문 옆에서 쪼그려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일찍 나오셨네요. 연락드리려던 차였는데.”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최정이 깍듯하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가 뭐라고 호칭하면 될까요?”
“뭐, 편하신 대로요? 최정 씨라고 하셔도 되고.”
“그럼 최정 씨라고 부를게요. 저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래화는 최정과 함께 카페로 향했다. 최정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권이태처럼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얌전히 할 일만 했다. 래화가 커피를 한 잔 가져다주자 깜짝 놀라며 좋아하기도 했다.
오전 근무를 끝내고 다음 타임 직원과 교대를 끝낸 래화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 연락 없이 조용한 핸드폰의 메시지 함을 공연히 들락거리다가, 저를 졸졸 따라오는 최정을 돌아보았다.
“잠깐 화방 좀 들리려구요.”
“네!”
최정과 함께 화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여러 가지 사고 집에 돌아왔다. 최정을 보내고, 래화는 집에서 혼자 손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생각해 두었던 구상 몇 가지를 스케치해 보기도 했으나, 막상 종이 위에 올려 보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냥 죄다 별로였다.
최악이다…….
래화는 신경질적으로 연필을 던져 놓고 소파에 앉았다. 등을 기대고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핸드폰을 쥐었다.
예전에 권이태가 저장해 놓았던 최정의 번호를 찾아 전화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물었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
최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저하고요?
“네.”
-왜, 왜요……?
“친해지고 싶어서요.”
최정은 굉장히 난처한 듯 꿈지럭거리며 말했다.
-좀 곤란한데……. 권이태한테 혼날지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래화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최정 씨도 저한테 궁금한 거 있지 않아요?”
-…….
“7시까지 집 앞으로 와 주세요.”
-……네!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최정은 결국 래화와 저녁을 먹기로 결심했다.
최정과 함께 찾아간 곳은 카페 맞은편에 있는 화덕 피자를 굽는 레스토랑이었다.
먹어 본 적은 없지만, 손님들이 종종 맞은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로 건너오곤 했다. 불평하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아마 맛이 괜찮을 듯했다.
최정은 여기저기 흠집이 난 나무 탁자와 손때 묻은 메뉴판을 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이라도 청담동 가실래요?”
래화가 이런 데서는 식사를 못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최정을 내버려 두고, 래화는 직원을 불러다 디너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직원이 가져다준 레몬 맛 나는 물을 먹으며, 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정은 이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최정 씨.”
“네!”
“제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시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