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1화 (31/132)

31화

최정은 입을 벌린 채 굳어졌다. 그가 어, 어, 어, 하고 이상한 소리만 내는 사이, 점원이 경쾌하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식전 빵 나왔습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치아바타가 접시에 미어터지도록 담겨 있었다. 너무 많이 담아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아슬아슬했다.

남자 점원은 래화 쪽으로 접시를 좀 더 가깝게 밀어 주곤, 사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사라졌다.

“……원래 이렇게 빵을 많이 주나?”

치아바타 산에 당황한 최정이 중얼거렸다. 래화는 빵이 쏟아지지 않도록 한 조각을 제 접시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식사하고 나서 대답해 주셔도 괜찮아요.”

“네에…….”

약간의 유예를 얻은 최정이 래화의 눈치를 보며 치아바타를 뜯어 먹었다. 래화는 빵을 접시에 얹어 놓고, 잔에 담긴 레몬수만 조금 마셨다.

이어서 나오는 메뉴들도 전부 풍성하기 짝이 없었다. 양도 다른 테이블의 두 배는 되었고, 주문하지 않은 메뉴도 서비스로 마구마구 나왔다.

“가게가 엄청 친절하네요.”

연신 감탄하던 최정은 힐끔 래화를 보았다.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되레 당연하단 듯 무덤덤한 래화의 반응에 의아해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질문했다.

“이런 일 자주 있으신 거죠?”

“어떤 일이요?”

“가게에서 서비스 왕창 받고, 직원들 완전 친절하고, 뭐 그런 거요.”

“대부분 잘해 주시는 편이에요.”

“……와.”

최정의 감탄은 피자가 나왔을 때 절정에 달했다. 무려 피자가 두 판이나 나온 것이다.

마르게리타 피자와 페퍼로니 피자를 한 판씩 내려놓은 직원이 싱긋 웃으며 래화에게 말을 붙였다.

“한 판은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맞은편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 맞죠?”

“네.”

“저 카페 자주 가는데.”

직원의 말에 래화는 조용히 탁자 위에 왼손을 올리며 대꾸했다.

“그래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편이라서요.”

“…….”

왼손의 결혼반지를 본 직원이 조용해졌다. 그는 맛있게 드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사라졌다. 최정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랑 같이 있는데도 저러네요. 보통 남자랑 둘이 오면 남자 친구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에요.”

“남자 친구 정도는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렇구나…….”

새로운 세계를 만난 최정은 연신 감탄하며 피자를 열심히 먹어 치웠다. 식사 때이기도 하고, 최정이 원래도 잘 먹는 편이라서 서비스로 나온 음식들을 남기는 일 없이 해치울 수 있었다.

래화도 열심히 먹어 보려 했지만, 왠지 입맛이 없어서 몇 입 먹다가 말았다. 아침에 권이태와 함께 식사할 때는 안 그랬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잔뜩 배부르게 먹은 최정은 행복해했다. 그러나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호로록 마실 즈음에는 다시 래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아까 그 이야기 말인데요…….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게 아닐까…….”

최정이 애써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래화는 딱 잘라 버렸다.

“오해는 아니죠. 실제로 병원도 입원했었으니까.”

래화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외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바를 꺼냈다.

“권이태가 오늘 외출한 거. 내가 진짜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러 간 것, 맞죠?”

“……그게.”

“나 입원했던 병원 찾아갔겠네요.”

“…….”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진 짐작 가요. 그때 회장님하고 권이태가 둘이서 독대했을 때, 회장님은 내 이야기가 전부 정신병자의 망상이라고 말씀하셨겠죠.”

“…….”“최정 씨한테 나는 정상이니까 믿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끝이 갈수록 점점 더 축 처졌다. 마지막에 다다라선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오늘 권이태가 어디로 갔는지……. 그것만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래화가 말을 끝맺은 후에도, 최정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유리잔에 박아 두었다. 고사라도 지내듯 한참 유리잔만 보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권이태는 래화 씨를 믿고 있습니다.”

래화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태 동정심 때문에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해 줬던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최정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래화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권이태’가 믿고 있다고, 사실을 전할 뿐이었다.

“걔가 오늘 래화 씨 입원했던 병원 찾아간 건 맞는데요. 이정환하고 한 내기 때문에 찾아간 거예요.”

“회장님하고…… 내기를 했다고요?”

“어, 음, 이게 바깥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집으로 돌아가서 마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럴까요.”

래화가 순순히 동의하자, 최정은 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달려갔다. 래화는 계산을 시도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꼼짝없이 얻어먹어 버린 래화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잘 먹었어요. 제가 밥 먹자고 했으니까, 사 드려야 했는데.”

“어휴,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계산하셨잖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니, 최정이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래화 씨 미모 덕분에 받은 서비스들을…….”

“…….”

“정 마음에 걸리시면 다음에 집밥 한 번만 더 얻어먹게 해 주세요.”

하여 래화는 집밥 1회 제공권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집밥이 역시 최고라며 조잘조잘 떠드는 최정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했다. 최정과 함께 걸어가는데, 항상 다니던 길이 막혀 있었다. 수리 중 팻말을 세우고, 그 뒤에서 인부들이 맨홀 뚜껑을 열고 무슨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아, 이쪽으로 가야 빠른데 말이죠.”

뒤통수를 벅벅 긁는 최정이 곤란해하다가 다른 길로 향했다. 원래 다니는 길보다 좁고 인기척이 드문 길이었다.

공사장 옆을 지나는 길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 하필이면 가로등도 고장 났는지, 제대로 켜지지 않고 깜빡거려서 길이 더 어두웠다.

애옹,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으슥함을 느끼며 걸어가던 때였다. 최정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래화 씨.”

그가 골목 안쪽,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했다. 깜빡. 가로등의 불빛이 꺼졌다가 켜졌다. 그리고 다시 또 깜빡.

잠시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지기 직전, 래화는 남자 여럿이 골목길 안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최정이 낮게 속삭였다.

“전기 충격기 들고 오셨죠?”

***

이래화가 입원했던 병원은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다. 이름만 병원이고, 고급 요양 시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단정한 중소형 세단으로 가득한 병원 주차장에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카가 들어섰다.

주차선에 맞춰서 한 번에 주차한 권이태는 잠시 스티어링 휠을 쥔 채로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핸드폰만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때맞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는 바람에서 희미한 습기가 느껴졌다. 하늘도 우중충하고 흐렸다. 저 멀리 몰려드는 먹구름을 보아하니, 조만간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권이태는 일단 담배부터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연기를 스읍 빨아들이며 병원을 바라보았다.

이래화는 이곳에 2년 동안 갇혀 지냈다.

기록에 따르면 행동이 모범적이고 예후도 좋은 환자였는데, 본인의 선택으로 입원 기간이 길어졌다고 되어 있었다.

선택이라…….

일단 진짜로 이래화의 선택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터였다.

권이태는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오늘 아침에 이래화가 저와 눈이 마주치고 기겁하던 모습이 떠올라 버린 탓이었다.

일부러 평소랑 다를 바 없이 행동했는데도 겁을 냈다. 아주 눈앞에서 사라져 줘야 안심할 모양이었다. 느릿하게 담배를 피우며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오늘 만나기로 했던. 지금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입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담배를 마저 피운 후 냄새를 털어 냈다. 대강 옷을 털고 정돈했을 즈음에, 훤칠한 키의 남자가 주차장 입구로 들어왔다.

입원 당시 래화를 담당했던 남자 간호사였다.

권이태는 느긋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남자 간호사는 권이태를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이 많이 입원하는 곳이지만, 이렇게 젊은 사람이 스포츠카를 끌고 나타난 경우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권이태는 그에게 가짜 명함을 내밀며 간단하게 인사했다. 명함에 적힌 대표 직함에 남자 간호사의 눈이 더욱 반짝거렸다.

슬쩍 미소 지은 권이태는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던져 놨던 백화점 쇼핑백을 가져왔다.

“별건 아니지만 수고해 주시는 게 감사해서.”

쇼핑백을 슬쩍 곁눈질한 남자 간호사는 안에 담긴 과자 박스를 보고 살짝 실망한 눈치를 내비쳤다. 그래도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권이태는 쇼핑백을 건네지 않았다. 빈손으로 멀뚱히 바라보는 남자에게 여유로이 말했다.

“가족이 입원할 곳을 찾고 있는데, 제 지인이 과거에 여기 입원한 적이 있다고 해서요.”

“아, 그러세요?”

“이래화라고.”

쇼핑백에서 과자 박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얄팍한 틴 케이스 안에는 샛노란 오만 원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남자를 보며, 권이태는 비죽 웃었다.

“아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