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강건호가 일하는 병원은 부유한 집안에서 정신 질환을 앓는 가족을 요양 보내는 곳이었다.
이미 치료가 어렵다는 걸 깨닫고, 실력 좋은 대학 병원보다는 몸이라도 편하게 지내길 바라는 가족들이 주로 이곳을 이용했다.
간호사로 일하며 온갖 환자들을 다 만났고, 별별 일을 다 겪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강건호에게도 유난히 마음에 남는 환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래화였다.
처음 이래화를 만난 그날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여자 환자는 여간호사가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래화는 이례적으로 남간호사인 강건호가 담당하게 되었다.
병원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강건호가 병원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지라, 중요한 환자를 도맡아서 담당하곤 했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디 돈 많은 집 아가씨가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래화를 만나게 되었다.
제일 작은 사이즈의 병원복이 살짝 짧고 헐렁하게 보이는 늘씬한 몸매. 접어 올린 소맷단 아래에 드러난 팔뚝은 사슴처럼 날씬했고, 복숭아뼈가 톡 튀어나온 발목도 가늘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꽉꽉 들어찬 이목구비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이래화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안정제에 취해 멍한 표정을 한 그녀가 저를 바라보았을 때, 강건호는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머무르는 2년 동안 성심성의껏 돌봐 주었고, 퇴원하는 날에는 그 누구보다 슬퍼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첫사랑의 추억처럼 희미해진 이래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조용한 병원에 갑작스레 찾아든 한 남자 때문이었다.
가족이 입원할 거라 미리 병원도 살펴볼 겸, 오래 일하신 분한테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싶다며 연락해 온 남자.
시간을 내어 주시면 섭섭잖게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말에 자신의 오프날에 방문 약속을 잡았다.
그리하여 만나게 된 남자는 대단했다.
주차장에 세워 놓은 스포츠카는 강건호의 오랜 드림 카였고, 입고 온 정장이며 신발까지 싹 다 명품이었다.
부내의 절정은 남자가 손목에 찬 시계였다. 비싸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하이엔드급 모델로, 남자가 몰고 온 차보다 더 비싼 것이었다.
저게 다 얼마야…….
강건호는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남자가 입고 걸친 것들의 값어치를 전부 합치면, 걸어 다니는 건물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무얼 하면 젊은 나이에 저렇게 돈을 벌어들이나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별건 아니지만 수고해 주시는 게 감사해서.”
그런 남자가 쇼핑백을 내밀었을 때는 기대에 가득 찼다. 하지만 언뜻 비치는 과자 상자를 보고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상품권이나 홍삼쯤은 될 줄 알았는데, 과자 상자라니.
겉보기와 다르게 쪼잔한 놈이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기숙사 방에 숨겨 놓고 혼자만 몰래 먹을 생각을 하던 때였다.
남자가 과자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철제 틴 케이스 안에 오만 원짜리가 빼곡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끼쳤다.
“이래화라고, 아시죠?”
“아, 알죠…….”
얼어붙었던 강건호가 억지로 입술을 움직여 더듬더듬 답하자, 남자는 쇼핑백을 손에 쥐여 주었다. 손에서 축 늘어지는 쇼핑백이 묵직했다.
“담배 피우십니까?”
“예, 예. 피웁니다.”
“저쪽 벤치에서 같이 한 대 하면서 천천히 얘기 나눌까요.”
어디 카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장소가 마뜩잖다며 남자가 설핏 웃었다. 입꼬리를 슥 올리는 얼굴이 남자답고 잘생겨서 감탄이 나왔다.
경계심은 빠르게 무너졌다. 믿기지 않는 수준의 돈을 주는 것으로 보아, 뭔가 나쁜 짓을 부탁할 것 같긴 하지만…….
나쁜 짓에 좀 가담하면 뭐 어떤가. 돈을 이만큼 주는데.
과자 상자 안의 돈은 얼추 눈대중하기에도 제 연봉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솔직히 이만한 돈을 들이대면 누구나 다 저처럼 반응할 터였다.
거금을 내민 남자는 심지어 성격도 서글서글했다. 그는 강건호와 나란히 맞담배를 피우며 살갑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저보다 형이신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하시죠.”
“어……. 그래도 되나.”
“당연하죠, 형.”
보조개가 쏙 파이도록 웃는 남자의 행동에 강건호는 헤벌쭉해졌다. 이런 대단한 남자가 형, 형, 하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굴어 준다는 것에 흐뭇한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남자는 처음엔 간단한 질문을 했다. 별것 아니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도 선뜻 답할 만한 것들이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는 남자에게 병원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는 내부를 꼼꼼하게 구경했고, 몇 가지 곤란한 부분들을 물었다. 그래도 무리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병원 구경을 마친 후에는 남자의 스포츠카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전부 강건호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상상도 못 할 장소들이었다.
조용한 룸 형식의 술집에서 남자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일 즈음에는, 강건호는 그와 형, 동생하는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동생 덕분에 내가 이런 데 와서 술도 마셔 보네.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들떠서 하는 말에 남자가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강건호는 그가 부어 준 술을 단박에 들이켰다.
흥이 올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빨리 취하는 느낌이었다. 왠지 술맛도 좀 이상한 것 같고……. 비싼 술을 처음 먹어봐서 그런 건가.
이상할 만큼 알딸딸해진 강건호는 흐려지는 정신에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형, 벌써 취하셨어요?”
“아니, 무슨 소리냐. 아직 괜찮지.”
강건호는 벌게진 얼굴로 또 술잔을 받았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남자는 병원의 기밀 사항을 물었다.
환자의 개인 정보나 직원들의 신상, 몇 년 전에 지병으로 사망한 이래화의 담당 의사에 관한 것, 진료와 처방 내역 등등.
말해서는 안 되는 정보였지만, 앞선 질문들처럼 술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실컷 대답해 주고 나서, 강건호는 남자를 만났을 때부터 계속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래화 씨랑 가족끼리 아는 사이라고?”
“네. 부모님끼리 친하시고, 저하고는 그냥 얼굴 정도만.”
“래화 씨는…… 잘 지내?”
“그럼요.”
“그렇구나. 이젠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지만…….”
마음의 빗장이 자꾸만 느슨해졌다. 강건호는 저도 모르게 숨기고 있던 제 욕망을 말해 버렸다.
“그래도 다시 병원에 오셔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남자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검은 눈동자가 선뜩하게 빛났으나, 강건호는 눈치채지 못했다.
“형.”
남자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래화 좋아했어요?”
정확하게 짚은 속내에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티 나나? 나 진짜 좋아했어.”
“그러셨구나…….”
말꼬리를 늘이던 남자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남자는 굴곡 없이 모양 좋게 뻗은 손가락으로 한참 담배를 들고 있다가, 재떨이에 재를 툭 털고서 물었다.
“왜요?”
“예쁘잖아.”
“에이, 그게 다예요?”
“그건 아니지만, 우리 동생 지인분인데, 말조심해야 하는데…….”
“뭐 어때요.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그냥 아는 지인이라서 별로 친하지도 않아요.”
살살 부추기는 말에 강건호는 오랫동안 담아 둔 속마음을 꺼냈다.
“사실 이래화 때문에 내가 좀…… 변태적인 부분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증상 심한 환자들 보내는 안정실, 알지? 아까 봤던 곳.”
푹신한 쿠션으로 둘러싸인 벽과 환자를 묶을 수 있는 철제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좁은 공간.
이래화는 종종 그곳에 갇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자주 의사가 안정실로 보낸 것이다. 심지어 별다른 증상이 없는데도 강박을 지시해 침대에 묶어 놓았고, 재갈까지 물리도록 했다.
강건호는 안정실에 갇힌 이래화를 감시 카메라로 항상 구경했다.
“침대에 묶여서 조용히 누워 있는데, 진짜 얌전하고……. 솔직히 안정실 들어갈 환자가 아니었어.”
이래화의 일상은 지극히 단순했다. 다른 환자들과 달리 난동 부리는 일도 없었고, 말수도 적었다.
쉬는 시간에는 보호대를 찬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색연필을 쥐고, 흰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림을 그리려는가 했지만, 그냥 종이만 보다가 다시 병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말썽이라곤 하나도 없는 환자인데 툭하면 안정실로 보내진 것이다.
“형 생각에는 왜 그랬던 것 같아요?”
“음…….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이래화가 밉보인 게 있었나 봐. 의사가 약도 항상 강한 걸 처방해 주더라고.”
“그래요? 근데 퇴원은 왜 시켜 줬대요.”
“어어, 그러게…….”
남자가 짙게 미소 지었다. 그는 강건호의 술잔에 호박색 양주를 그득 따라 주며 말했다.
“저도 비밀 말해 드릴까요.”
둘이서 술잔을 부딪치고 쭉 들이켰다. 남자는 술에 젖은 입술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걔 정상이었어요. 안 미쳤는데 가족들이 억지로 집어넣은 거예요.”
“와, 어쩐지……!”
누가 뒤통수를 탁 때린 느낌이었다. 술기운이 오른 강건호는 마구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이래화 이상했어! 진짜 이상했다니까! 내가 환자 여럿 봐 왔는데, 이래화는 오히려 약물 처방받으면 상태가 더 나빠졌거든. 근데 의사는 자꾸 더 센 약만 먹이고. 쓸데없이 안정실 보내고.”
“의사가 가족한테 돈 받아먹은 거 아니에요? 가둬 두라고.”
“그런가? 그러기엔 또 본인 의지로 입원한 거긴 했는데……. 아무튼 수상했지. 그래도 덕분에 나는 좋았지만.”
“뭐가 좋았는데요?”
“이래화 침대에 묶여서 누워 있는 거. 은근히 야하더라고. 구경 잘했지.”
“……그랬구나. 재밌네.”
“묶어도 놨겠다, 내가 안정실에 진짜 감시 카메라만 없었으면.”
“없었으면?”
“어……, 없었으면.”
“없었으면, 뭐.”
남자가 묵직한 양주병을 탁자 모서리에 내려쳤다. 잘 깨지지도 않는 양주병이 남자의 손길 한 방에 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양주가 뚝뚝 흐르는 깨진 병을 든 채, 남자는 싱긋 웃었다.
“계속 말해 봐, 씨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