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3화 (33/132)

33화

처음에는 이래화한테 잘해 준 놈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저 또한 잘 대해 줄 생각이었다. 물어볼 것만 물어보고, 곱게 돌려보내 주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 새끼가 잘해 준 게 아니라 흑심을 품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성이 나가 버렸다.

권이태는 주먹에 둘둘 만 넥타이를 풀었다. 핏물에 찐득하게 젖은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끄으…….”

바닥에 엎어져서 경련하는 강건호의 머리를 구둣발로 툭 쳤다.

“언제까지 엎어져 있을 거야.”

강건호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곧장 테이블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은 주먹 쥐어서 단정하게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였다.

권이태는 얼음 바스켓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서, 각 얼음을 한 조각씩 그에게 집어 던졌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각 얼음은 정확하게 강건호의 이마를 맞추고 떨어졌다.

“그러게 왜 함부로 좆대가리를 세워, 응?”

“죄송합니다…….”

“이래화 다시 입원할 일 없으니까 찾지 마, 새끼야.”

“네! 네……!”

강건호는 얼음을 고스란히 맞으며 질질 짰다. 시뻘겋게 물들어 퉁퉁 부은 얼굴에서 땀과 피, 그리고 눈물이 한데 뒤섞여 줄줄 흘러내렸다.

동정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으나, 불행히도 권이태는 그런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얼음 바스켓을 뒤적거리며 제일 크고 단단한 각 얼음을 골라내던 권이태가 문득 손을 멈췄다.

“하나만 물어보자. 환자 중에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부분적으로 기억 상실 일어나는 케이스, 있지?”

“네……. 심리적 방어 기제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강건호는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보나,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기억에서 지우는 겁니다. 기억을 잊어버려도 무의식에는 남아 있기 때문에 신경증적인 행동이나 심인성 장애가 나타날 수 있거든요.”

권이태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손으로 괜히 얼음 바스켓을 크게 휘저으며 정신 사납게 굴었다.

“좋았던 기억을 잊는 경우는?”

“어……. 거기까진…….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 잘…….”

“형, 존나 쓸모없다.”

권이태는 얼음 바스켓째로 강건호에게 집어 던졌다. 바스켓은 정확히 강건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고, 그에게 시원한 얼음 폭포를 선사해 주었다.

좌르륵 쏟아지는 얼음을 맞은 강건호가 갓 잡힌 생선처럼 펄떡대는 동안, 권이태는 생각에 잠겼다.

전산망에 남는 병원 기록 따위는 메이가 전부 구해줄 수 있다. 권이태가 확인해야 하는 건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이었다.

하여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간호사를 만났고, 술에 자백제까지 타 먹여가며 그나마 몇 가지 정보를 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건호의 증언도 결국 추측일 뿐이고,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자꾸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래화를 담당했던 의사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담당의만 살아 있었으면 복잡하게 돌아갈 것 없이 금방 문제가 해결되었을 텐데.

이래화 기억에 관해서도 물어볼 수 있었을 테고.

아무래도 의사는 이정환이 죽인 게 분명해 보였다. 입맛이 씁쓸했다. 수년 전에 이정환이 다 작업해 놓은 걸 뒤늦게 파헤치려니 영 쉽지 않았다.

이래서는 증거가 안 된다. 이걸로는 팀원들 설득하는 일도 어려웠다. 물론 자신이 명령하면 따라 주기야 하겠지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잠깐 눈을 감고 있는데, 기어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한쪽 눈만 스윽 떠서 쳐다보니, 강건호가 쩔쩔매면서도 끝끝내 질문했다.

“제가 오늘 한 말……. 녹음하고, 그러시진 않았는지……?”

“이야…….”

히죽 웃으며 일어나자 강건호는 갑자기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또 처맞을까 무서운 모양이었다. 권이태는 양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서서 그를 지긋하게 보았다.

“인생 망할까 봐 걱정돼? 하긴, 오늘 하면 안 되는 말 많이 했지.”

“…….”

“녹음은 안 했어. 걱정하지 마.”

강건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뒤이은 말에 금방 어두워졌다.

“너 같은 새끼 하나 조지는데, 무슨 녹음씩이나…….”

피식 웃으니, 강건호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쑤시면 오줌 지리겠다 싶어서, 적당히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던 때였다.

삐빅. 삐빅. 삐빅.

핸드폰에서 알림이 세 번 울렸다. 이래화가 일정 반경 이상을 벗어나면 울리도록 설정한 알림이었다.

권이태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위치 추적 어플을 켰다. 지도에 표시된 이래화와 최정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할 이래화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정도 함께 말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 놈한테서 과자 상자를 챙겨 술집을 나오며 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왜.

“뤼진 움직였어?”

-아니? 내가 지금 그거 막느라고 죽어 가는 중이잖아.

“그럼 이정환인가…….”

상견례 이후로 한번 날뛰겠다 싶었건만, 이런 사고를 치다니. 권이태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는데, 메이가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야?

“이래화 납치당한 거 같은데.”

-헉! 플러이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메이가 동동거리며 말했다.

-제이가 붙어 있던 거 아냐? 그런데도 납치당할 정도면 제법 머릿수가 있나 보네. 예상되는 곳 몇 군데 있는데, 바로 연결 들어갈게. 잘하면 그냥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 같아.

“글쎄, 굳이……. 시간만 벌어 놔.”

-…….

잠시 침묵하던 메이는 갑자기 보드라운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태이, 알지? 너는 참을성이 좋은, 아주 선량한 존재야. 지랄병 따위는 정신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물론 권이태는 그녀의 말을 고스란히 무시했다.

“마카오 적당히 마무리하고 한국 들어와. 역시 둘이서는 부족해.”

-알았어. 36시간 안으로 마무리 짓고 갈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였다. 통화를 종료한 권이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래화 앞에서 무서운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때맞춰 발렛 직원이 가져온 차를 노려보다가, 껄렁거리면서 제게 다가오는 직원에게 손을 까닥였다.

“거기.”

그리고 과자 상자를 열어 지폐 한 뭉치를 꺼내며 물었다.

“혹시 운전 잘해요?”

***

서울 외곽에 위치한 낡은 조립식 판넬 창고는 트럭이나 컨테이너가 문제없이 드나들 정도로 큼직했다.

그러나 환기를 제대로 시킨 적이 없는지, 내부가 온통 먼지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속이 괴로웠다. 등을 기댄 벽과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 때문에 몸이 으슬으슬했다.

래화는 옅게 호흡하며 묶인 손을 꼼지락거렸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감각이 둔했다. 가늘게 몸을 떨자, 최정이 소근거렸다.

“괜찮으세요……?”

함께 붙잡혀 온 그는 래화의 옆에 나란히 묶여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최정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죄송해요. 제가 싸움을 잘하진 못해서……. 권이태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래화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격렬하게 반항했던 탓에, 최정은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는 뺨 한쪽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내일쯤이면 시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본인 입으로 항상 자신은 육체파가 아니라고 하지만, 최정 또한 훈련받은 용병이었다. 일반적인 수준이었다면 오늘의 납치 시도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아까 그건…….

수십의 남자들이 한 번에 달려드는 광경은 다시 떠올려도 아찔했다. 심지어 그들이 품에서 칼을 꺼냈을 땐, 최정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말 안 듣는 래화를 제어하기 위해, 이정환이 질 나쁜 사람을 이용하는 일은 여태까지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을 동원한 적은 처음이었다.

외부에 노출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일을 벌였다는 건, 이정환이 아예 끝을 보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인지도 몰랐다.

끝을 본다는 건 어떤 뜻일까.

온갖 무서운 상상이 떠올라서 힘들었다. 래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래화와 최정을 납치한 조폭들이 무엇 때문인지 저들끼리 삿대질하면서 격하게 싸워 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창고 구석에 박아 두고, 가운데에 모여서 서로 목에 핏대 세우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고함을 질러 댔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고, 아무도 이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덕분에 최정은 래화에게 편하게 속닥거렸다.

“손 너무 불편하시면 제가 살짝 풀어 드릴게요. 잠시만요.”

그가 운동화를 바닥에 툭툭 쳤다. 운동화 밑창에서 작은 칼날이 툭 튀어나왔다.

최정은 익숙하게 제 손목의 끈을 잘라 냈다. 래화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었다가 다시 헐겁게 묶어 주고, 자기도 똑같이 끈을 느슨히 묶어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바 없이 감쪽같이 묶어 둔 후, 최정은 다시 얌전하게 포획된 인질로 되돌아갔다.

이런 상황에 몹시 익숙한 듯했지만, 어째서인지 무척 불안해 보였다. 그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면서 초조하게 창고 문을 힐긋댔다.

래화는 조폭들이 아직도 싸우느라 바쁜 걸 확인하고, 최정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최정 씨는 괜찮아요?”

“아, 저야 괜찮죠…….”

최정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게, 권이태가 이제…… 지랄병 터질 때가 됐거든요…….”

너무 오래 참았어요, 하면서 하얘진 얼굴로 달달 떨었다. 눈앞의 조폭 수십 명보다, 구하러 올 권이태를 더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래화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랄병이 뭔데요?”

그때였다. 창고 바깥에서 타이어가 자갈밭을 구르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고…….

쾅!

창고 문을 들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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