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일전에도 한 차례 느꼈던 충동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단순한 흥미가 아니었다. 반드시 그를 그려야만 했다. 속에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영감을 하얀 캔버스 위에 쏟아 내야 했다.
당장 붓을 쥐고 싶어서 손가락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저릿저릿한 자극에 정신이 어지러워지니, 기다렸다는 듯 환청이 찾아왔다.
류설연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넘실넘실 흘렀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갔다.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래화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버려 둔 채 권이태를 바라보았다.
“이래화.”
“…….”
“래화야.”
“…….”
“왜 말이 없어. 혹시 혀 다쳤어?”
미간을 좁힌 그가 손가락으로 입술 위를 꾹 눌렀다.
“입 벌려 봐. 한번 보자.”
순순하게 입술을 벌렸다. 권이태는 손으로 양쪽 턱을 눌러서 더 크게 입을 벌리도록 만들었다.
몰랑한 분홍색 혀를 확인하고, 가지런한 치아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눌러 본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다 괜찮은데…….”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천천히 입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무거운 한숨이 들려왔다. 권이태는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내가 무서워서 그래? 나 갈까? 최정 불러 줘?”
래화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조금 삐죽해졌던 권이태의 눈빛이 다시 누그러졌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이미 정신이 망가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방금까지 창고 안에서 기관총 갈겨 대던 남자를 귀엽다고 여기진 못할 테니까…….
래화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권이태는 혼자서 이런저런 추론을 해 댔다.
“그럼 늦어서 화난 거세요, 고객님?”
그는 래화에게 어찌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열심히 변명했다.
“내가 계속 옆에서 지키고 있었어야 했는데, 잘못했…….”
권이태의 눈이 커졌다. 래화가 그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피부에 닿는 열기를 느끼며 천천히 손바닥을 미끄러트렸다.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의 뱀을 어루만졌다. 손에 닿은 뱀의 비늘이 잘게 떨렸다.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권이태가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뻣뻣하게 당겨졌다.
“고객님, 잠깐만.”
그가 래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손목은 그의 손에 한 줌도 차지 않았다.
사납게 손목을 붙들었던 권이태는 악력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나 놓아 주진 않았다. 권이태는 억눌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보시면 나 착각할 거 같은데.”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권이태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안개 속을 헤매듯 불분명한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날 자꾸……. 그런 눈으로 보면…….”
류설연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망가지지 않고서는 그려 낼 수 없는 그림도 있을 테니까.
망가지더라도…… 그리고 싶으니까.
“권이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아주 작게 이름을 부르곤 속삭였다.
“너 무서워…….”
숨소리처럼 내뱉은 속삭임에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잘게 일렁이는 검은 수면을 보며,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네가 날 망가뜨릴까 봐 무서워. 망가지더라도 너를 그리고 싶어지는 내가 무서워.
그가 주는 자극이 두려워서 도망쳤는데, 횃불에 달려드는 날벌레처럼 또다시 홀리고 있었다. 점점 더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낭떠러지까지는 이제 몇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래화는 눈앞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밀려오는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감촉과 함께, 그에게서 옮겨붙은 불꽃이 온몸을 감싸 왔다.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온통 달게만 느껴졌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이 밤바람에 떨고 있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피어오르는 열기에 맞춰 억눌렀던 욕망이 몸을 쭉 펼쳤다. 더 이상 숨기지도 못하게 속에서 활개를 쳤다. 래화는 숨을 헐떡이며 모든 걸 드러냈다. 그에게 발가벗은 밑바닥을 죄다 내보였다.
“흣, 으응…….”
말캉한 살덩이가 입 안의 점막을 핥고 어금니를 문질렀다. 여린 살을 게걸스럽게 헤집다가, 래화의 혓바닥을 가져가 문지르고 빨아 대기도 했다.
아랫배 안쪽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다리 사이에 저릿한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몸을 꼬며 작게 신음했다.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뜨끈뜨끈한 열기가 전해지는 육체를 욕심껏 끌어안고 탐했다. 손톱으로 뱀 문신 위를 가볍게 긁으니, 길고 매끈한 목줄기가 꿈틀거렸다.
울대가 움직이도록 침을 삼킨 그가 반듯한 눈썹을 찌푸리며 낮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좀 더 깊숙하게 래화를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이어지던 키스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권이태가 래화의 어깨를 움켜쥐고 뒤로 밀어 냈다. 맞닿았던 살갗이 떨어지며 작게 젖은 소리가 났다. 래화는 얼얼한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
그는 말없이 래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붉어진 눈매에 담긴 검은 눈동자는 또다시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존재를 바라보는 눈빛.
“이태야.”
이름을 부르니 권이태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며 속삭였다.
“나 집에 갈래. 그림 그리고 싶어…….”
납치당했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식적이지 못한, 비정상적인 말에도 권이태는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응.”
이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 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상이 맞아떨어진 게 왠지 기뻐서, 래화는 아주 작게 웃었다.
권이태는 래화를 조그만 인형처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팔뚝에 엉덩이를 받쳐 안은 후, 제 품에 기대게 했다. 얼굴을 파묻은 래화의 귓가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집에 가자.”
권이태는 과거에도 래화에게 똑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어딘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아마 내가 변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래화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상식 밖 아니냐? 이 정도면 이정환을 병원에 보내야겠는데.”
최정은 핸드폰을 얼굴 옆에 놔두고 중얼거렸다. 메이가 나직하게 답했다.
-그러게. 플러이의 손을 망가뜨리라고 할 줄은.
상견례에서 된통 당한 이정환은 여태 조용했다. 별다르게 연락하지 않고 조용하기에 무슨 짓을 꾸미나 했는데,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정환은 이래화가 그림 그리는 걸 반대했다.
이래화가 그림을 그리다가, 류설연처럼 광증을 앓고 자살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충분히 두렵고 걱정할 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선을 넘었다. 조폭을 고용해 이래화의 오른손을 망가뜨리라고 지시한 것이다.
청부 내용을 알게 된 메이는 곧바로 이정환이 고용한 조폭들에게 접촉했다. 그리고 이정환이 약속한 돈의 두 배를 줄 테니 이래화를 얌전히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창고에서 조폭들이 싸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난리가 났던 것이다.
수상하니까 지금이라도 손 떼자, 그래도 준다는 돈은 먹고 빠지자.
돈 더 준다는 쪽을 따르자, 원래 청부받았던 쪽을 따르자.
걸린 돈이 크니 더더욱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듯했다. 만일 순순히 협조했다면, 메이는 조폭들에게 돈을 주고 끝낼 생각이었지만…….
어리석은 욕심을 부린 그들은 기관총 엔딩을 맞이하고 말았다.
메이가 조폭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킨 덕분에, 래화는 손이 망가지지 않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메이가 그들에게 접촉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권이태의 추적이 좀 더 늦어졌다면.
지금쯤 래화의 오른손은 망가졌을지도 몰랐다. 두 번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도록 말이다.
물론 그런 상황까지 몰렸다면 최정이 어떻게든 수를 냈겠지만, 아무튼 위험했던 건 사실이었다.
최정은 양손으로 제 입술을 꾸욱 누르며 붕어처럼 만들었다. 그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웅얼거렸다.
“여태까지 했던 일들을 쭉 보면 분명 딸을 끔찍하게 아끼긴 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근데 이번엔 와아, 모르겠다, 진짜.”
-이번 일은 선 넘었지. 딸을 걱정해서 그랬다는 말로는 포장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이래화는 이미 한 차례 손이 망가졌었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었고, 실제로 이래화는 그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그런데 이정환은 래화에게 다시 똑같은 상처를 주려고 했다.
“이건 그냥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것 같잖아.”
생각이 흐르는 대로 말하던 최정은 저도 모르게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미치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