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6화 (36/132)

36화

헉.

말해 놓곤 제풀에 놀란 최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메이와 최정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자신들이 진실에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섬뜩함이 등골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스쳐 가는 직감을 놓치지 않았다.

-제이. 방향 수정하자.

“오케이.”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 무얼 어떻게 하자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이정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앞서 이래화의 손가락을 부러뜨린 사람은 이정환이다.

-방향 수정한다고 치면, 역시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이정환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어. 너무 이상하잖아.

죽은 아내를 사랑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을 가슴으로 품었다. 심지어 양딸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하고, 미리 유언장까지 작성했다.

류설연이 자살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한 번쯤 흔들릴 법한데도, 지금까지 이정환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가 단 한 번도 유언장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류설연의 흔적이라서 플러이를 아끼는 거라고 쳐. 그러면 당연히 플러이를 최대한 온전히 보존하고 싶지 않을까? 손가락을 왜 부러트리겠냐고.

그것도 류설연 닮았을 텐데, 하며 메이가 빈정거렸다.

“둘이 많이 닮기는 했지…….”

-아무튼 내 말은,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마리에 애가 탔다. 메이는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류설연이 죽은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좀 더 쉬울 것 같은데…….

이래화가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해주면 제일 좋겠지만, 그건 가뜩이나 불안정한 그녀의 정신을 완전히 자극하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방법은 곧장 넘겨버리고, 그녀는 래화의 안부를 물었다.

-플러이는 좀 어때?

“그게…….”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서 뒹굴거리던 최정은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건너다보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실에 틀어박혀서 미친 듯이 그림 그리는 중.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의 사건이 뭔가 영감을 준 것 같더라.”

-……거기서 영감 받을 게 대체 뭐 있는데?

“내 말이. 예술하는 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늘의 사건’을 떠올려 본 최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기관총을 쏴 갈기던 권이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도 플러이 덕분에 살았지.

“그건 맞아.”

메이도, 최정도 똑같이 동의하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권이태의 지랄병치고 오늘은 정말 온건하게 끝났다는 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몰살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마…….

“으으.”

최정은 몸을 부르르 떨며 생각을 멈췄다.

-태이 얌전해진 거 봐.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

“시집 아니고 장가.”

-아하.

메이가 장가, 장가, 하면서 헷갈리는 한국어 단어를 다시 외워 두었다. 워낙 발음이나 문장 구사력이 좋아서 종종 한국인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녀는 태국인이었다. 가끔 이렇게 단어 실수를 하곤 했다.

-슈미트가 구해 준 청소 업체랑은 연락했고?

“거긴 태이가 지금 만나는 중.”

창고에서 일어난 대참사를 처리해 줄 ‘청소 업체’는 이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맡는 업체였다.

시체와 혈흔 등을 치우고, 혹시 살아 있는 놈들도 깔끔하게 마무리해서 정리해 주며, 원하는 형태를 말하면 그에 맞춰서 현장을 세팅해주기도 했다. 업체에서 청소만 끝내 주면 나머지는 메이가 정리할 예정이었다.

-다행히 외곽지라서 처리가 쉬운……, 슈슈!

메이가 말하다 말고 반갑게 외쳤다. 뒤이어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메이를 나무랐다.

-메이.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지 않나요.

각지게 떨어지는 발음이었다. 마치 교수 같은 어조의 주인은 데저트의 대표, 슈미트였다. 최정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오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대표님. 안 그래도 할 얘기 많은데.”

-뤼진을 만나고 왔어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들어온지라.

슈미트의 말에 최정과 메이 둘 다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뤼진이 너무 많이 알고 있더군요.

메이가 신경질적으로 태국어 욕을 뱉었다. 슈미트는 그런 메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뤼진 쪽은 우리가 의뢰 맡기 전부터 플러이를 찾아다녔으니, 아무리 막아 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메이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며 익숙하게 위로해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태이부터 불러들이도록 합시다. 의논할 일이 생겼어요.

“의논이라면…….”

슈미트가 느릿하게 말했다.

-뤼진이 꽤나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거든요.

***

가장 먼저 보이는 종이에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도구로 그렸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그려 대다가, 마침내 마음에 드는 구상을 얻었다. 기쁨에 차서 캔버스를 꺼냈다. 하얀 캔버스에 색깔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던 래화는 똑똑 노크 소리에 깨어났다.

“……!”

권이태가 팔짱을 끼고 문간에 서 있었다.

“흐름 끊어서 미안한데,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그가 턱 끝을 까딱였다.

“너 밤새웠어.”

래화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창밖이 어느새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정오의 햇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어…….”

갑자기 잊고 있었던 모든 피로가 밀려왔다. 힘이 쭉 빠지면서, 손에 쥔 붓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물감이 튀었지만, 바닥에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바닥에 온통 흩뿌려진 종이들 때문이었다.

종이 수십 장이 넓은 방바닥을 가득 채웠다. 종이마다 하나도 빠짐없이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전부 래화가 떠오른 구상을 스케치해 둔 종이였다.

권이태는 제 발 밑에 깔린 종이들을 말없이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의 눈길이 스케치에 닿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전부 그를 그려 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선은 가장 마지막으로 래화 앞에 놓인 캔버스에 닿았다.

“…….”

밤새도록 수십 장의 종이에 온갖 스케치를 해 댄 끝에 정한 것이었다. 거친 붓칠로 뒤덮인 캔버스를 한참 바라보던 권이태는 이내 질문했다.

“저게 나야?”

“아직은 그냥 밑그림 수준이야. 저기에 물감 더 얹고…….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너야.”

래화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모델 앞에서 그림을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민망했다. 권이태가 뭐라 말이 없어서,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약간의 변명을 곁들었다.

“지금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색 더 얹으면 훨씬 괜찮아져. 우리 엄마 그림 본 적 있어? 아마 그거랑 비슷할 거야. 물론 이번엔 다른 느낌으로 해 보려고 시도하는 중이지만, 그래도 좀 비슷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만약 네가 엄마 화풍을 싫어하면…….”

“래화야.”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래화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나 그림 잘 몰라. 류설연 화풍이 뭔지도 모르고.”

“…….”

“내가 관심 가지는 건 네 그림뿐이야. 뭘 그리든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응.”

종이를 밟을 수 없으니, 권이태는 문간에 서서 손을 까닥였다.

“이리 와. 쉬었다가 그려.”

래화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그대로 다리가 푹 꺾였다.

“이래화, 너 진짜…….”

바닥에 크게 엎어질 뻔한 래화를 받아 든 그가 날 선 눈을 해보였다. 래화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이 밟아도 괜찮으니까, 나 좀 옮겨 줘…….”

권이태에게 부탁해 일단 욕실로 갔다. 꼬질꼬질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오니, 고소한 죽 냄새가 났다. 홀린 듯이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권이태가 한쪽 팔을 탁자에 걸쳐 둔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래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죽 먹어. 사 왔어.”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죽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서 도자기 그릇에 옮겨 담고, 숟가락까지 갖다 놓은 행동이 섬세했다.

하지만 권이태는 꼭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핸드폰만 해 댔다. 그러다가도 래화가 맞은편에 앉아서 죽을 먹기 시작하자, 잘 먹는지 슬쩍 곁눈질로 확인했다.

래화는 입 안이 데지 않도록 죽을 조심조심 식혀서 먹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확 올라와서, 죽 한 그릇을 다 비워 버렸다.

생각해 보니 납치당하기 전에도 아침만 조금 먹고, 점심과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고 밤새 그림을 그렸으니, 배고파서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일이었다.

“잘 먹었어.”

말끔하게 비운 그릇에 권이태가 혀를 찼다.

“밥은 먹어 가면서 할 것이지.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아?”

“응.”

재깍 대답하자 그는 눈매를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그때부터 공연히 시비를 걸어 댔다.

목숨보다 좋냐, 누가 1000억이랑 그림 그리기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뭐 고를 거냐 등등. 시답지 않은 시비를 걸다가 갑자기 툭 하니 물었다.

“……너 마카오 갈래?”

“마카오? 갑자기 왜? 나 여권 없는데.”

“여권이 왜 없어.”

“회장님이 나 외국 나가는 거 싫어하셔서. 한 번도 안 나가 봤어.”

“그 새끼는 별짓거리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에게 래화는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혹시 한국에서 사고 쳐서 외국으로 도망가야 하는 거야? 너랑 같이?”

그렇게 제멋대로 총 휘두르고 다니더니 역시 큰일 났구나 싶었다. 영화에서 봤던 도피 생활을 떠올려 보는데, 권이태가 픽 웃으며 말했다.

“사고 친 거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래화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곧바로 얼굴이 굳어졌다.

“너 혼자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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