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7화 (37/132)

37화

“……나 혼자?”

권이태가 핸드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래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정환한테서 너 지켜 줄 수 있고, 네가 마음껏 그림 그리도록 후원해 줄 재력도 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마카오에 있다는 거고?”

“응.”

“너는 왜 같이 안 가.”

“거기 가면 경호가 필요 없으니까. 굳이 돈 낭비해 가면서 날 붙들어 둘 이유가 없지.”

“…….”

“만약 마카오 간다고 하면, 기간 계산해서 남은 의뢰금은 돌려줄 테니까…….”

“싫어.”

래화는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싱크대에 거칠게 그릇을 집어넣었다. 도자기끼리 부닥치며 깨질 듯한 소리가 났지만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가슴팍이 달싹거릴 만큼 씨근덕거리며 숨을 쉬다가, 홱 소리가 나게 권이태를 돌아보았다.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날카롭게 말했다.

“넌 의뢰가 장난이야? 왜 네 마음대로 조건을 바꿔?”

말하고 보니 너무 흥분해서 애처럼 말했다. 래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데.

권이태의 입장에서야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임무는 래화를 경호하는 것이니, 의뢰인의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을 방법이 있다면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도 자꾸 화가 나는 이유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래화 혼자 떠나라고 말해서인 듯했다.

나는 왜 당연히 같이 움직이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남편이라 부르고 동거까지 하지만, 의뢰가 끝나면 사라질 관계였다. 물론 서로 하룻밤을 보내긴 했어도, 고작 그런 것으로 평생을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 마음은 서운했다. 일단 감정을 가라앉히고 속에서 말을 골랐다.

권이태는 그런 래화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매에 언뜻 미소가 스쳤지만, 래화는 보지 못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 납치 이정환이 배후인 거 알지? 한국에 있으면 이런 일 얼마든지 또 생길 수 있어. 마카오에서는 안전하게 그림 그릴 수 있으니까 말해 주는 거야.”

“…….”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거잖아.”

“……환경 갑자기 바뀌는 거, 정신적으로 영향 많이 받아. 마카오까지 가게 되면 적응할 시간 필요할 텐데 그런 데다가 시간 낭비하기 싫어.”

후원은 그냥 언급도 하지 않았다. 래화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절대로 안 갈 거니까 더 이상 얘기 꺼내지 마.”

권이태가 갑자기 씩 웃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슨하게 앉았던 그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같이 간다고 하면.”

래화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허리에 싱크대가 툭 부딪쳤다. 권이태는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갈 거야?”

입술이 저절로 달싹였다. 무심결에 응, 하고 답할 뻔한 것을 참았다. 왜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오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래화는 무표정하게 받아쳤다.

“안 간다고 했잖아. 한국에 붙어 있을 거니까 나 똑바로 지켜.”

그리고 오른손을 괜스레 주먹 쥐었다가 펼치며 말했다.

“두 번 납치당하게 만들면 의뢰금 반으로 깎을 테니까.”

“으응, 알았어……. 내가 잘할게.”

퉁명스러운 말에도 권이태는 기분 좋게 웃었다.

“마카오 가지 말자, 래화야.”

그리곤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권이태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래화에게 휘적휘적 손짓하며 핸드폰을 들이댔다.

“자, 여기다 대고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이래화 씨, 마카오 가실 겁니까?”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래화는 핸드폰 가까이 다가가 의사를 표시했다.

“안 갈 거예요.”

“들었지? 우리 자기가 죽어도 안 간대.”

권이태가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한국이 좋다니까 더 이상 마카오는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권이태가 말을 끝맺은 후에야, 상대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래화 씨.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끝이 정확하게 끊어지는 딱딱한 발음에는 희미한 독일어 느낌이 묻어 있었다. 래화는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대표님이신가요?”

-네. 편하게 슈미트라 호칭하시면 됩니다.

슈미트는 마치 대학 교수 같은 어조로 질문했다.

-태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은 건가요?

태이라니…….

굉장히 귀여운 애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칭에 정신이 팔린 사이, 듣고 있던 권이태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나 의심해?”

-너라면 안 하겠어요, 태이?

“하겠지.”

다시 얌전히 입을 닫은 권이태를 뒤로 하고 슈미트가 차근차근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조건이지 않을까요. 안전이 보장되고, 원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별로 좋은 조건이 아니어서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잠깐 무언가를 확인하듯 침묵하더니, 우아하게 제의를 건넸다.

-곧 한국에 입국할 예정입니다. 직접 뵙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약속을 잡을까요.

“네. 괜찮아요.”

-태이를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슈미트는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액정 화면이 꺼지는 것까지 확인한 래화는 혼자 중얼거렸다.

“신기하네.”

“뭐가?”

“한국어를 되게 잘해서.”

언뜻 흘려들으면 외국인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유창했다. 하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래화와 달리, 권이태는 별것 아니란 듯 말했다.

“지금 팀에 태국인 하나 있는데 거기는 더 잘해.”

“어쩌다가 다들 한국어를 배운 거야?”

“메이는 원래 한국어에 관심이 많았고, 슈미트는 나 때문에 배웠지.”

“……대체 무슨 짓을 하면 한국어를 배우게 만드는 건데.”

“원래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 아니겠어?”

어느 날 보니까 슈미트가 주말마다 대학교를 찾아가 한국어학과 교수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더라며, 권이태는 한쪽 입꼬리를 삐뚤게 올려 웃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얄미운 동시에, 슈미트와 권이태의 관계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슈미트가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권이태에게 많이 굽혀 주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권이태가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가 권이태를 대하는 말투에선 애정이 묻어났다. 오랜 관계에서 쌓인 신뢰가 밑바탕에 깔린 단단한 애정이었다.

권이태가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아도, 주변 사람에게 뭔가 잘해 주는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최정만 봐도 권이태에게 구박 들으면서도 열심히 찰싹 붙어 있었다…….

권이태를 이제 얼추 안다고 생각했건만, 또다시 튀어나온 새로운 면에 호기심이 들었다.

물끄러미 그를 관찰하는데, 권이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래화가 아까 싱크대에 던져 놨던 그릇을 차곡차곡 식기세척기에 쌓으며 물었다.

“주말 내내 그림 그릴 거야?”

“그래야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없는데…….”

요리할 때도 그렇고, 자꾸 옆에서 뭘 도와주려고 들었다.

그가 저렇게 물으면 시킬 일이 없는데도 뭔가 역할을 하나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권이태한테 팔레트나 좀 들고 있으라고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드르륵,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권이태의 핸드폰에 온 연락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권이태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래화의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드르륵, 드륵, 드륵.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엔 진동이 세 번이나 연이어서 울렸다. 의심할 것도 없이 확실하게 래화의 핸드폰에 날아온 메시지였다.

광고 메시지인가?

친구가 없는 래화는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래화야.]

[나 한국 들어왔어.]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혹시 내일 시간 될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만나고 싶은데…….]

권이태가 등 뒤로 다가와 화면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밀어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메시지를 보낸 이가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당황해서 메시지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권이태가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그가 래화의 머리를 지긋하게 누르며 물었다.

“누구야?”

“사촌 오빠인데…….”

이학수 집안의 장남, 이선우였다. 래화가 대답하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보고 싶다, 래화야.]

귓가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이태가 스윽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등 뒤에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놀란 래화가 뒤돌아보려 했지만, 권이태는 턱을 꾹 눌러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요새는 사촌 오빠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도 해 대나?”

그가 비뚤어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상 좋아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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