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8화 (38/132)

38화

비아냥거리는 말에 래화는 강조했다.

“진짜로 사촌 맞아. 이세연 오빠, 이선우. 그리고 별로 안 친해.”

“그럼 더 수상하지 않나.”

“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래화는 권이태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문자 보내는 거. 완전 수상하잖아.”

딱 붙어서 말하는 탓에 참을 수 없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다시금 힘껏 그를 밀어 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꽉 안겨서 숨이 답답했던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뒤돌아서서 권이태를 쳐다보니, 그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장난을 쳤다는 듯, 눈썹을 한번 스윽 치켜세우곤 말했다.

“이정환 명령 듣고 움직이는 거 아냐?”

그런 의미에서 수상하다는 뜻이었구나. 뒤늦게 그의 말뜻을 이해한 래화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산 건설과 DS 호텔은 완전히 분리된 회사였다.

본래는 계열사로 묶여 있었으나, 이정환이 대산 건설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호텔을 이학수에게 내어 주며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정환이 굳이 멀쩡한 계열사를 분리한 것은, 이학수가 대산 건설에 간섭하는 일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이학수는 여전히 대산 건설을 향한 욕심을 놓지 못했다.

이정환의 슬하에 자식이 없는 탓이었다.

양녀인 래화가 있긴 하지만, 따로 경영을 배우지 않았다. 회사 일에 욕심을 보이지도 않으니, 도전해 볼 만하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하여 이학수는 제 아들, 이선우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아이비리그에서 막 MBA 과정을 끝낸 이선우는 본래 가을쯤 한국에 들어와, DS 호텔에서 중간 관리직부터 시작하여 업무를 배울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학수는 어떻게든 제 아들을 대산 건설에 밀어 넣겠다고 결심했다. 이정환이 자리를 내주지 않자, 그는 아예 이선우가 대산 건설 공개 채용에 지원하도록 했다.

이선우의 스펙이 차고 넘치는지라, 서류는 당연히 합격했다. 이번에 한국으로 입국하는 이유도 대산 건설에서 필기시험을 보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면접까지 올라가면 거기서부턴 다시 이학수의 입김이 닿을 테니, 떨어지기도 힘들 터였다. 그리고 말단 사원에서부터 업무를 익히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참으로 지독한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래화는 이선우를 꽤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학수 집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학수나 강미옥, 이세연처럼 래화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만날 때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어쩌면 딱히 서로 엮일 구석이 없어서 관계가 좋았는지도 몰랐다.

뻔질나게 래화를 찾아와 염탐하고 괴롭히는 이세연과 다르게, 이선우하고는 끽해야 일 년에 서너 번, 가족 모임 때나 얼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선우가 대학교를 진학하며 미국으로 가버린 후에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다.

“회장님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는 맞지만……. 그래도 이세연 같은 짓을 할 성격은 아닌데.”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그건 그런데.”

얼굴도 가물가물한 이선우를 떠올리다가 중얼거렸다.

“이세연이 이거 알고 있으려나…….”

이세연은 제 오빠를 병적으로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래화가 이선우와 단둘이 만난다면 아마 난리가 날 터였다.

생각이 이세연에까지 다다르자 자연스럽게 잠시 묻어 두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래화는 흘깃 권이태를 보았다.

약혼할 뻔했댔지…….

권이태는 이미 앞서서 약혼 이야기를 딱 잘라 부정했다. 물어봤자 그때와 똑같은 대답만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세연과 강미옥이 착각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세연은 래화가 궁금해하면 알려 주긴커녕, 그걸로 더 방방 날뛰며 래화의 속만 긁어 놓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때마침 적절하게 물어볼 사람이 등장했다. 고민하던 래화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 선우 오빠 만나야겠어.”

“……선우 오빠?”

“아, 이름이 이선우야.”

대충 대답을 던져 주며 이선우에게 답장을 보내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권이태가 너무 조용했다. 래화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권이태는 싱긋 웃었다.

“알았어, 누나.”

그리고 어딘가 싸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오빠 한번 만나러 가 보자.”

***

-자기! 자기야! 이리 와 봐. 빨리!

화면 속의 류설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외치는 말에 이정환은 다급하게 방으로 뛰어왔다.

천장에서 아래를 비추는 카메라 앵글이 방 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소파 위에 걸쳐 놓은 원피스 두 벌, 방긋 미소 짓는 류설연, 그리고 당황한 얼굴의 이정환까지.

-오빠는 뭐가 더 좋아? 고르기가 너무 어렵다.

류설연은 비슷한 디자인의 원피스 두 벌을 가리키며 종알거렸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서 달려왔던 이정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류설연의 옆에 서서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 주었다.

작은 꽃이 잔잔하게 수놓인 원피스였다. 두 벌 다 무늬와 재질이 비슷했는데, 천 색깔만 아이보리와 화이트 정도로 조금 달랐다. 한참 고심하다가 하나를 골라 찍었다.

-왼쪽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오른쪽.

류설연은 냉큼 오른쪽 원피스를 집어 들고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흔들리는 몸을 따라 결 좋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렸다.

경쾌한 웃음소리에 이정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따라서 웃던 이정환은 이내 그녀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해 주었다.

둘이서 쪽쪽 소리 내며 서로의 뺨에 입 맞추다가, 류설연이 작은 탄성을 내었다.

-아참, 이제 래화 올 시간인데.

-…….

-래화한테도 물어볼래. 어느 쪽이 나랑 더 잘 어울리는지.

-지금 고른 거 괜찮은데 뭘 또 물어봐.

-하지만 알잖아.

류설연은 원피스를 제 몸에 대고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하늘거리는 천이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봉긋하게 솟아올랐다가 살며시 가라앉았다.

-래화는 내 꽃인 걸.

삐릭,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래화야!

류설연이 원피스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외쳤다.

-래화야, 이리 와 봐!

이정환은 작게 미소 지으며 리모컨으로 영상을 정지시켰다. 화면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 류설연을 잠시 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 USB가 놓인 진열대로 향했다.

연도별로 가지런히 진열된 USB 중에서 하나를 골라 PC에 연결하자, 세부 폴더가 주르륵 떠올랐다. 월별로 분류된 폴더 안에는 일자별로 다시 폴더가 나뉘었고, 그 안에는 또다시 장소별로 이름이 정리된 여러 개의 파일이 들어 있었다.

‘거실’이라고 이름이 적힌 파일을 클릭하다 말고, 이정환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TV가 벽에 걸린 거실은 몇몇 전자기기가 바뀌고 오래된 느낌이 조금 더해졌을 뿐, 방금 영상에서 나왔던 모습과 동일했다.

류설연이 죽은 지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건만, 이곳만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류설연이 썼던 화구, 그녀가 입었던 옷과 걸쳤던 장신구, 심지어 죽기 직전에 썼던 칫솔 하나마저도.

이정환은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고스란히 남겨 두었다. 병적이라 표현해도 모자라지 않을 행위였으나,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추억에 잠긴 채, 여생을 마무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새로운 영상을 재생하려던 때였다.

“회장님.”

박 실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정환이 류설연의 영상을 보고 있을 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이정환은 박 실장이 가져온 소식을 짐작하곤,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박 실장의 보고는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다.

“실패했습니다.”

이정환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황망하게 재차 물었다.

“아니, 어째서? 실패할 수가 없었을 텐데.”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고 폭력배 조직 하나를 통째로 밀어 넣었다. 거금을 들여 간부급 인사를 포함해, 전부 힘 좀 쓴다는 놈들로 고용했다. 그 수가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니.

심지어 권이태는 다른 지역에 나가 있고, 이래화의 곁에는 비리비리한 놈 하나만 붙어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움직였는데 말이다.

“상황이 어찌 돌아간 게야. 래화가 도망치기라도 한 거야?”

“그것이 아니라. 고용했던 이들이…….”

박 실장은 마른 침을 삼키곤 답했다.

“전부 죽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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