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39화 (39/132)

39화

정적이 흘렀다. 이정환은 느릿하게 되물었다.

“다 죽었다고……?”

“예.”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골이 띵한 느낌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박 실장은 그동안 가만히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박 실장.”

“예, 회장님.”

“내가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실수했군. 늙으니 아집만 늘었어.”

“아닙니다, 회장님.”

깍듯한 답에도 이정환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 실수임이 명백한 탓이었다. 박 실장은 이번 일을 만류했다.

그럼에도 이정환은 억지로 밀어붙였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초조함과, 자신이 겪은 굴욕을 어떻게든 충격적이게 되갚아 주고 싶다는 욕심이 뒤섞인 결과였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무리 없이 처리할 거라 생각했건만, 권이태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이정환은 씁쓸한 후회에 젖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 뭐가 어떻게 됐는지나 말해 보게.”

“조직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서로 언쟁을 벌였고, 그러다 과격해지며 싸움이 벌어졌다는 게 공식적인 경찰 조사 결과입니다. 조직원 하나가 격분한 끝에 불법 사제 기관총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놈이로군.”

박 실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정환은 허탈하게 웃었다.

“격분해서 기관총을 사용한 게 그놈이야…….”

“예, 권이태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걸 조직에 내분이 일어난 것처럼 포장해 놨단 말이지.”

“전문적인 업체의 도움을 받은 듯한데, 그래도 이만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일 처리 솜씨가 범상치 않습니다.”

박 실장의 말에는 희미한 감탄이 깔려 있었다. 그 또한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해 봤기에,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더욱 잘 아는 것이다.

“이번 일로 보셨겠지만, 강제적인 수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정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상견례 때 권이태를 회유하려던 게 실패하면서 일이 꼬였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좋은 방향으로 되돌리기에도 늦었다.

“내 이제부턴 전적으로 박 실장 말에 따르겠네. 어찌하면 좋겠는가.”

“회장님. 제가 최대한 여러 방안을 생각해 보겠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이제는…….”

박 실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신중하지만 단호한 말이 뒤를 이었다.

“래화 아가씨와의 관계를 끝내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에둘러서 말하고 있으나, 뜻은 명백했다.

이래화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외람되지만, 회장님 사후도 고려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정환의 나이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죽고 나면 더 이상 래화를 감시할 이가 없었다. 박 실장의 말뜻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이정환은 깊게 침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박 실장도 알지 않는가.”

류설연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작품. 그녀가 남긴 흔적들 중에서 과거가 아닌, 유일하게 현재에서 생동하며 변화하는 존재.

이정환은 이래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태껏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다.”

충언하는 박 실장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 또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어렵게 꺼낸 말일 터였다.

박 실장의 말은 항상 옳았다. 침묵하던 이정환이 나직하게 답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네. 우선은 래화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으로 하지.”

***

주말은 카페 일을 쉬는 날이었다. 래화는 아침을 먹자마자 앞치마를 입고 물감을 꺼냈다.

일전에 칠해 둔 밑 색을 확인하며 물감을 배합하고 희석제를 조금씩 넣어서 섞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

래화는 가만히 미간을 좁히고 캔버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음에 완벽하게 들어찼던 구상인데, 이상하게 갑자기 너무 거슬렸다. 뭐가 거슬리는지 알 수 없어서 한참 고개를 갸웃거렸다.

10호 캔버스 말고 15호를 해야 했나? 구상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건가? 아직 수정이 가능하니 방향을 살짝 바꿔볼까. 아니면…….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고심하던 래화는 잠시 작업을 중단했다. 너튜브에서 좋아요를 눌러 놓은 평화로운 명상 음악을 틀고, 리클라이너에 길게 누워서 고민했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느낌이 왔었는데. 완벽하게 느낌이 와서, 이제 그리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래화는 손등을 이마 위에 얹었다. 창문을 열어 놨는데도 물감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그림에서 손을 놓으니 또다시 잡생각이 들었다.

이정환은 왜 그랬을까.

그가 저에게 일말의 책임감과 애정을 품고 있어서, 류설연처럼 미치지 않도록 돌봐 준 것이라 여겼다.

몰래 화실을 만든 게 들켜서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도, 이정환이 격분한 나머지 순간 화를 누르지 못해 그런 거라고 혼자 납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납치까지 해서 손을 망가뜨리려 했다.

여태까진 그래도 자신의 행동이 ‘사랑’이라며 포장했는데, 이제 래화가 말을 안 듣기 시작하니 꾸밀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들고 있던 망치를 떠올린 래화는 양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단단하게 얽어 잡고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정환은 류설연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녀의 모방작을 그려 내는 래화가 싫은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을 망가뜨리려는 걸지도 몰랐다.

류설연의 모방작…….

리클라이너에 누운 채 캔버스를 쳐다보았다. 원래 생각했던 색 대신 다른 색을 입히고, 표현 방식을 바꿔서 작업하는 쪽으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봐도 상상 속에서 완성된 작품은 결국 류설연의 그림과 똑같았다.

“…….”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문제의 원인을 깨달은 래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비슷하기야 하겠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다른 차별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완성작은 또다시 류설연의 모방작이었다. 조금 비슷한 수준이 아닌, 완벽하게 복사해 넣은 듯한 모방작.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로 강렬했던 영감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걸작이 탄생하리라고 확신했던 순간이 거짓말 같았다.

그냥 다른 걸 그릴까…….

팔레트 나이프로 캔버스를 찢어 버리는 상상을 하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권이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와.”

권이태는 달라진 게 없는 캔버스를 보고 한마디 했다.

“하나도 안 그렸네.”

정곡을 찔린 래화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고민하는 중이야.”

권이태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래화는 리클라이너에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슬링 백을 멘 그는 꼭 체대생 같았다. 목에 있는 뱀 문신만 아니라면 정말로 사람들이 대학생으로 보았을 터였다.

“나갈 준비 안 해?”

“사촌 오빠 만나러 가는데 무슨 준비씩이나 해. 대충 하고 갈 거야.”

거지꼴로 나가겠다는 말에 권이태는 이상할 만큼 재밌어했다. 그가 리클라이너 위에 길게 흐트러진 래화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장난쳤다.

“일찍 나가서 약속 전까지 잠깐 놀자.”

“그림 그려야 되는데…….”

“밖에서 기분 전환하다 보면 좋은 생각 날 수도 있잖아?”

원래 예술가들은 그렇게 영감 얻는 거 아니냐며 아는 체를 해 댔다. 영감을 위해 향정신성 약물을 제공하겠다던 과거에 비하면 대단한 발전을 이룬 말이었다.

“산책 가자, 산책.”

그는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을 만큼 살살 잡아당기며 래화를 꼬셔 댔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서, 잠깐 고민하다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기로 했다.

크게 꾸밀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이것저것 신경 쓰게 되었다. 통 넓은 연청바지에 딱 붙는 흰색 반팔 티, 크롭 기장의 가죽 자켓을 입고, 작은 미니 백을 멨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고 간단하게 화장도 했다. 준비를 전부 마치자,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뭔가 무척 공들인 차림새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오늘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던 래화는 내심 만족하며 거실로 나갔다.

이미 한참 전에 준비를 다 끝내고 거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권이태가 래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인상을 썼다.

“대충 하고 나간다더니?”

이제 별걸 가지고 다 시비였다. 래화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권이태는 굉장히 불만스러워하면서 래화와 함께 외출했다.

오늘 권이태가 끌고 나온 차는 안전하기로 유명한 자동차 브랜드의 SUV였다. 원래 래화가 운전하던 차와 똑같은 브랜드이기도 했다.

도대체 차가 몇 대인지, 어째 볼 때마다 바뀌는 것 같았다. 래화는 안전벨트를 매며 그에게 말했다.

“너한테 이 차도 있을 줄 몰랐어.”

“왜?”

“조금…… 네 취향 아니잖아.”

권이태는 화려하거나 거대한 차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태 보아 왔던 그의 차들은 전부 그런 종류였다. 이런 얌전하고 보수적인 느낌의 차를 타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렇긴 한데, 여기 차가 튼튼하니까. 오늘 내가 실수로 어디 들이박을지도 모르잖아.”

생전 안 하던 교통사고 걱정을 하며, 권이태는 매우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다.

“사람을 한 명쯤 차로 쳐 버린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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