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래화의 말에 권이태는 씩 웃었다. 이미 누구를 차로 칠지 정해 놓기라고 한 듯한 웃음이었다. 불안함을 느끼는 래화의 옆에서 그가 비죽비죽 웃으며 라디오를 켰다.
“일원 전자가 올해 1분기 123조 원 매출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전년 대비 9% 증가한…….”
아나운서가 낭랑하게 전달하는 뉴스는 금방 다른 방송으로 바뀌었다. 라디오 채널을 휙휙 바꾸던 권이태는 채널을 클래식으로 맞춰 놓았다.
의외의 선곡이었다. 분명히 걸 그룹 노래나 락 음악 같은 걸 좋아하겠거니 생각했는데, 클래식도 들을 줄은 몰랐다.피아노 소품곡이 잔잔하게 차 안에 깔렸다. 래화는 취향에 맞는 음악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때 대시보드의 거치대에 끼워 놓은 휴대폰이 반짝거리며 웅웅 진동했다. 백미러를 확인하던 권이태가 귀에 꽂은 무선 이어셋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무심했다. 상대의 말을 잠깐 들어 주던 권이태는 이내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데저트 통해서 연락 주십시오. 개인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조는 날카로워 베일 듯했다. 옆에서 듣는 래화의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듯했다. 길어지는 통화에 권이태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번호까지 찾아내서 연락하셨을 정도면, 다 알지 않으십니까? 돈 많이 준다고 해서 의뢰받지 않습니다.”
상대가 금액을 또 한 번 높여서 말한 모양이었다. 권이태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그럼 백 억쯤 줘 보시든지…….”
그러자 드디어 전화가 끊어졌다. 권이태는 무선 이어셋을 한 번 더 손으로 누르며 래화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나 한국 있다고 소문났는지, 가끔 일해 달라고 전화가 오더라고.”
“너 원래 개인 의뢰 안 받아?”
“응.”
“내 건 받았잖아. 데저트 통해서 연락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지?”
권이태는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타이밍이 좋았어. 마침 한국 오고 싶었거든.”
네 의뢰가 재밌어 보여서 받았다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왠지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감춘 듯한 설명이었다.
래화가 옆에서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권이태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특별 대우 받는 느낌이 어때?”
자세한 사정을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리는 말에 래화는 그냥 가벼운 헛소리로 받아쳤다.
“의뢰비 반으로 깎아 주면 느낌이 더 잘 올 거 같아.”
“으응, 내가 누나한테는 깎아 줄 수 있지. 아예 공짜로 해 줄까?”
괜히 헛소리 던져 봤다가 본전도 못 찾을 지경이었다. 래화는 순순히 항복 선언을 했다.
“농담이야.”
“나는 진심인데.”
둘이서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압구정에 도착했다. 유료 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도산 공원으로 향했다. 잠깐 산책하다가 이선우와 약속한 카페로 갈 생각이었다.
공원으로 걸어가는데, 핸드폰 케이스를 파는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저기 들렀다가 가자.”
마침 핸드폰 케이스를 새로 구매하려던 참이었다. 기본 케이스는 너무 얇고 힘이 없었다. 늘 쓰던 투명 케이스로 사야지, 하다가 옆에서 건들건들 따라오는 권이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밥도 얻어먹었고……. 이거라도 하나 사 줄까 싶었다. 래화는 권이태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빼곡하게 진열된 케이스를 둘러보던 래화는 커다란 흰색 토끼가 그려진 케이스를 하나 골라서 권이태에게 내밀었다.
“이거 사 줄게.”
약간의 심술을 더한 선택이었다. 귀여운 토끼 케이스라니, 권이태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권이태는 한술 더 떴다.
“커플로?”
“……어?”
그리고 어어 하는 사이에 래화의 손에도 토끼 케이스가 쥐어졌다. 권이태랑 비슷한 토끼인데, 크기가 작고 수박을 먹는 토끼가 그려진 케이스였다.
“이거 귀엽네. 곧 여름이니까.”
정신 차리니 이미 계산까지 끝낸 뒤였다. 어쩐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으로 케이스를 갈아 끼웠다.
커플로 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권이태한테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핸드폰 케이스를 끼운 뒤였다. 잠깐 착잡했던 래화는 이내 권이태의 손에 들린 토끼 케이스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인상 사나운 남자가 깜찍한 토끼가 그려진 핸드폰 케이스를 끼운 모양새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좀 덜 무서워하는 효과도 있을 것 같았다.
권이태도 새로운 케이스가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둘이서 나란히 새 케이스를 끼고 도산 공원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조금 더워서, 공원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권이태가 탄식했다.
“누나가 좋아하는 꼰대 아이스크림 없어.”
“……비비X 있거든?”
래화는 꼰대가 된 기분으로 팥 맛 아이스바를 골랐다. 권이태는 당연하다는 듯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골라서 계산했다.
“자.”
그가 포장지를 까서 건네주었다. 아이스바를 받아 든 래화는 잘 먹을게, 하고 인사했다.
기껏 핸드폰 케이스를 사 줬더니, 물 흐르듯이 또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게 되었다. 잠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20억 주니까 아이스크림 정도는 얻어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합리화했다.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원을 거닐었다.
여름의 초입을 앞둔 공원은 싱그러웠다. 파릇한 녹음에 눈이 시원할 정도였다. 상쾌한 풀 냄새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권이태의 말을 듣길 잘했다. 별다른 것 없이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무겁던 머리가 홀가분해졌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서 산책하는 일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간 집과 카페만 다녔다. 그러다 중간에 잠깐 납치당하고…….
그 외엔 최정과 화덕 피자 레스토랑 한 번 간 게 끝인데, 거기도 카페 맞은편이라 외출 느낌은 아니었다.
너무 반복적인 생활도 정신 건강에 해로울 터였다. 앞으로 종종 이렇게 외출 일정을 끼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권이태가 또 시비를 걸어 왔다.
“우리 자기는 어쩌다 깐순이 같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됐을까.”
“깐순이 아니고 깐X리. 그리고 지금 내가 먹는 건 비X빅.”
하여간 제대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이름 교육을 실시한 후, 아이스바를 조금씩 깨물어 먹으며 말했다.
“첫 아르바이트 구하고, 근무 첫날 일 마쳤을 때 사장이 사 줬는데……. 먹어 보니까 입맛에 맞아서.”
다른 팥 맛 아이스크림도 많지만, 깐X리가 제일 좋은 이유는 난생처음 혼자서 뭔가를 해 냈다는 추억이 엮인 탓이리라.
“그래서 그 뒤로 쭉 좋아했어. 난 한번 좋아하면 마음 잘 안 변해.”
궁금해하기에 기껏 열심히 설명해 줬더니, 권이태는 이상한 거만 물어 댔다.
“사장 남자였어?”
“응.”
“젊은 남자?”
“나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 덕분에 난 아르바이트 한 달도 못 하고 그만뒀고. 또 궁금한 거?”
권이태가 아이스크림 샌드를 두 입 만에 먹어 치우고,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뜯었다. 그는 하드 바 모양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웅얼거렸다.
“그냥, 사장 새끼가 허튼 짓은 안 했나 궁금해서…….”
“허튼 짓 했으면 어쩌려고.”
“뭐어……. 차로 쳤겠지. 20억 주면 그 정도는 서비스로 다 해 줘.”
실실 웃으며 하는 농담이 마냥 싫지 않아서, 래화는 그를 따라 웃었다. 작게 소리 내어 웃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먼저 웃은 쪽은 자기면서, 정작 래화가 웃으니 권이태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입술을 일자로 굳힌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실컷 키득거리던 래화도 서서히 웃음을 그쳤다.
“…….”
오후의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조용한 길에 서서, 래화와 권이태는 서로를 바라보는 채로 가만히 멈춰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다.
나뭇잎 사이로 얼룩덜룩하게 들이치는 햇빛, 그 아래에 자리한 남자.
래화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파헤치듯 바라보는데, 권이태가 눈매를 설핏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래화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마치 오직 단둘만을 감싼 듯하던 은근한 공기가 단박에 깨어졌다. 래화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고 단정한 인상의 남자가 래화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적잖이 놀란 표정을 한 그는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였다.
“선우 오빠……?”
래화가 이름을 부르니 이선우는 황급히 다가왔다.
“너 여기서 뭐 해? 저 사람은 누군데.”
그가 래화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탁 소리 나게 내쳐졌다.
“어허.”
이선우가 황당한 눈으로 제 손등과 권이태를 번갈아 보았다. 이선우의 손등에는 찐득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권이태가 무표정한 얼굴로 초콜릿 아이스바를 까닥거렸다.
“남의 부인 손목은 왜 붙잡으시나, 사촌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