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먹던 아이스크림으로 얻어맞은 이선우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되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그러면서 재차 래화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래화야, 이쪽으로 와.”
그의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래화를 불량배에게서 구해 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불량하긴 한데, 그게 남편이었다.
난처해진 래화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선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남편이라고는 짐작도 못하는 듯했다.
“선우 오빠, 지금 오해하는 거 같은데.”
적절히 소개할 방법을 잠깐 고심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결국 무난하고 정석적인 소개말을 꺼냈다.
“내 남편이야.”
“……뭐?”
그리고 이선우는 딱 이세연이 놀란 만큼 놀랐다. 충격받아서 눈이 휘둥그레진 그를 놔두고, 일단 권이태에게 이선우를 소개했다.
“이태 씨, 인사해. 내 사촌 오빠. 이선우라고…….”
이선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하면서도 권이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릴 때부터 예절 교육을 엄하게 받은 부잣집 아들다운 면모였다.
하지만 권이태는 제게 내민 손을 보면서도,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싱긋 웃기만 했다.
“권이태입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사에 래화와 이선우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래화는 황급히 악수 좀 하라는 뜻으로 권이태의 팔뚝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권이태는 슬쩍 래화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곤, 이선우도 다 들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더러워서 손잡기 싫어, 자기야.”
이선우의 손등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묻힌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속삭이는 시늉만 낸 말은 당연히 이선우의 귀에도 들어갔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무례함에 휘말려서 정신 못 차리던 이선우가 뒤늦게 불쾌함을 표시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는 불가촉천민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권이태를 노려보다가, 래화를 불렀다.
“래화야.”
많은 의미가 함축된 부름이었다. 래화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답했다.
“우선…… 카페 가서 이야기해, 오빠.”
대충 얼버무려 놓고, 권이태를 끌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권이태는 끌려가는 동안에도 열심히 이상한 말을 해 댔다.
“누나, 잘 생각해. 원래 어린 게 더 맛있어. 늙은이는 퍼석하다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대체 이선우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래화는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사촌 오빠라고 했잖아.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너무 무례하게 굴지도 말고.”
하지만 권이태는 곧장 알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래화를 내려다보았다.
“노력할게.”
그리고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사촌 오빠가 너한테 이상한 생각만 안 하면.”
***
이선우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곳은 SNS에서 유명한 카페였다.
독특한 곡선형의 건물 디자인과 블랙 인테리어의 깔끔한 분위기 덕분에, 한가한 평일 오후에도 손님이 올 만큼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이선우와 단둘이 있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래화가 일부러 고른 장소였다. 룸 식보다는 권이태가 경호하기도 좋았다.
이선우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은 래화는 불안한 눈으로 권이태를 흘긋 살폈다.
멀찍한 곳에 떨어져 앉은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시선에 살갗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더 불안한 점은 권이태가 슬링 백을 앞으로 고쳐 메더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저 안에 최소 권총 한 자루 이상이 들어 있음을 아는 래화로서는 무척 신경 쓰이는 손동작이었다.
그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더 있었는데, 탁자 위에 떡하니 올려놓은 차키였다.
권이태는 이미 스포츠카로 창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묘기를 보여 준 바가 있었다. 부디 그가 SUV로 카페 문을 부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래화는 속으로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이세연처럼 짜증 나는 상대면 권이태가 까칠하게 굴어도 상관이 없는데, 이선우에게는 나름 호감이 있는지라 곤란했다.
최대한 노력해서 이 난관을 잘 헤쳐나가겠다고 결심하며 몹시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네, 오빠.”
얼굴이 굳어 있던 이선우는 래화의 인사에 그제야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게.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우리.”
래화는 찬찬히 이선우를 뜯어보았다. 옅은 색채와 단정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기억 그대로였다. 침착하고 차분한 분위기도 똑같았다. 한결같은 그의 모습이 마음에 편안함을 주었다.
이선우도 한참 말없이 래화를 살피더니, 가만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몇 년 만에 봤는데, 너 정말 그대로네. 여전히 예쁘고, 귀엽고.”
그의 칭찬에 래화도 살짝 웃으며 답했다.
“오빠도 바뀐 거 하나도 없어.”
“칭찬이지?”
“당연히 칭찬이야.”
래화의 대답이 재밌는지, 이선우가 잠깐 소리 내서 웃었다.
“한국은 언제 들어왔어?”
“어제. 한국 들어오자마자 너한테 가장 먼저 연락하고 만나러 온 거야.”
갑자기 확 부담스러워지는 말이었다. 래화는 그냥 대놓고 이유를 물어보았다.
“왜?”
직설적인 질문에 이선우는 미소 지었다.
“성격 여전하구나.”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의 냅킨을 만지작거렸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가락이었다.
“너 결혼했다는 이야기 듣고 놀라서 한국 온 거니까. 원래 귀국할 예정이긴 했지만……. 예정보다 많이 일찍 들어오긴 했나.”
“…….”
“네 남편 많이…… 의외롭긴 하다.”
이선우는 만지작거리던 냅킨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저런 사람 좋아했어? 조금 더 단정하고 조용한 사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른스럽고.”
“……그러게.”
“오빠가 보기에는, 래화야.”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선우를 관찰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그는 말을 고르려 애쓰고 있었다.
잘 교육받은 모범생답게 무례한 단어를 빼려고 애쓰는 듯한데, 그걸 빼고 나면 권이태를 설명할 표현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선우가 골라낸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래화 너하고 너무…… 안 어울리지 않아?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면…….”
무슨 일이야 많았지만, 이선우에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에게 이정환이 제 손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특히 이선우는 대산 건설을 물려받겠다고 욕심내는 중인데 말이다. 래화는 그냥 간단하게 답했다.
“내가 고른 사람이야.”
이선우는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께서도 전부 아시는 거지.”
“응, 반대하셔.”
“…….”
산뜻한 대답에 이선우는 더욱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아이스 커피를 들이마시는 걸 보며 래화는 내심 의아해했다.
사촌지간이라곤 하지만 호칭만 그럴 뿐이었다. 실상은 혈연 없는 남남이고, 대산 건설을 생각하면 서로 경쟁 관계에 가까웠다.
당연히 서먹해야 옳은데, 이선우는 유난히 래화를 챙겨 주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태까진 이선우가 잘해 줄 때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만날 일이 자주 없기도 하고, 래화한테 잘해 주는 남자들은 항상 많았던지라 그의 호의에 더 둔감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래화는 강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용건만 빨리 물어보고 도망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래화에게도, 이선우에게도 말이다.
권이태가 얌전히 잘 앉아 있나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본론을 꺼냈다.
“오빠,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
생각에 잠겼던 이선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궁금한데?”
“이세연, 혹시 누구랑 약혼한 적 있어?”
“세연이가? 없는데…….”
워낙 천방지축이라 누가 걔를 데려가겠냐며, 그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타박하는 말투지만, 동생을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서슴없이 드러내는 가족애가 신기해서, 래화는 잠시 이선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시선을 받은 이선우는 귀 끝이 불그스름해졌다. 그가 손으로 괜스레 귓불을 문지르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세연이 고등학생 때였나? 약혼할 뻔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래화가 이선우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의 귀는 조금 더 붉어졌다. 래화는 잔뜩 집중한 채 그에게 말했다.
“나 처음 듣는 얘기야.”
“그냥 잠깐 이야기 나오다가 말아서, 아마 회장님께서도 모르실 거야. 제대로 성사되기도 전에…….”
이어진 말에 래화는 그대로 굳어졌다.
“상대가 죽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