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42화 (42/132)

42화

분명하게 들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얼어붙었던 래화는 느릿하게 되물었다.

“어쩌다가……?”

“원래도 몸이 약했는데, 결국 병으로 사망해서 약혼 얘기가 흐지부지됐던 걸로 기억해.”

“병이 있었다고? 어떤 병?”

“그것까진 잘 모르겠는데.”

“그 집안에 다른 아들은 없었어?”

“음, 외동이라고 들었어. 이건 확실해.”

상대 집안이 외동이란 말을 듣고 래화랑 똑같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며, 이선우가 설명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세연이 병으로 죽은 사람을 착각할 만큼 멍청하진 않다. 하물며 강미옥도 그 자리에 있었고, 똑같은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는데…….

정답을 얻을 줄 알고 들어온 곳이 미로의 중심부였다.

래화는 손등으로 입술 위를 지긋하게 눌렀다. 이선우가 저를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평소 이세연에게 길가의 풀벌레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던 래화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사촌에게 난데없이 옛적에 파기된 약혼을 물어보고, 심지어 약혼 상대에 관해서 캐묻기까지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수상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래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오빠, 그러면……. 혹시 어느 집안이랑 약혼 얘기했는지 알아……?”

이선우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대답했다.

“글쎄.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그때 나 미국에 있었잖아. 학교 때문에 정신없어서 집안일에는 거의 신경 못 썼어.”

“응……. 고마워…….”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억지로나마 감사 인사를 했다. 래화는 왠지 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아봐 줄까?”

엉망으로 뒤엉켜 버린 문제 속에 갇혀서 끙끙거리던 래화는 깜짝 놀랐다. 이선우는 놀라는 래화를 보며 눈매를 한껏 휘었다.

“이 핑계로 래화랑 또 연락할 수 있으면 나야 좋지. 그런데 세연이 약혼자는 왜 궁금한 거야? 그 정도는 알려 줘야 오빠도 마음 편하게 알아볼 수 있겠는데.”

“아니야. 괜찮아. 지금 대답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가뜩이나 권이태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세연과의 문제까지 끼얹어 버리면 그가 억지로라도 끼어들어서 이혼시키려고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선우도 결국 이학수 집안의 사람이었다.

래화에게 다정히 대해 주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터였다. 그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

이선우도 래화가 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그가 긴 숨을 뱉었다.

“래화야.”

“응, 오빠.”

“네가 나 못 믿는 거 아는데. 우리 집안 상황상 그게 당연한 것도 알고……. 그래도 조금 서운하긴 하다.”

“미안해.”

변명 없이 담백한 사과에 이선우는 옅게 미소했다. 그는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지? 결혼하고 행복해?”

“응.”

말하고 보니 너무 단답이었다. 이선우는 성의 있게 답해 줬는데, 래화도 기본은 해야 할 터였다.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을 덧붙였다.

“안정감이 들어서 좋아.”

말하고 보니 진실이었다. 권이태와 동거한 이후로는 불안함이 훨씬 덜했다. 저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 행복해.”

“그럼 다행이긴 한데…….”

어딘가 몽롱한 눈빛으로 래화를 바라보던 이선우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오빠한테 연락해. 오빠 집에 방도 많고, 일 때문에 잘 안 들어가서 너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

래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아까부터 자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래화를 이성으로 보고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들에게서 받았던 느낌들. 그것이 이선우한테도 느껴졌다.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이선우가 느닷없이 말했다.

“미국에서 네 생각만 했어.”

이세연과 똑같은 색의 말간 눈동자가 래화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계속, 계속……. 래화, 네 생각이 계속 나더라.”

그는 말을 던져 놓고 오랫동안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다 테이블에 가지런하게 놓인 래화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어. 그게 전부였는데.”

움찔 놀라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조여 오는 악력이 상당했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네.”

움켜쥐는 힘이 너무 강해서 통증이 느껴졌다. 당장 집에 돌아가면 붓을 잡아야 하는 손이었다. 래화는 이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나 손 놓아줘.”

하지만 이선우는 래화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되레 힘껏 붙들어 왔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손이 떨릴 정도였다.

아릿한 고통이 바늘처럼 심장을 찔렀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호흡이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나 지금 아프니까 손 놔줘.”

재차 말했지만 그는 귀가 멀어 버린 듯,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해 댔다.

“래화야,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붙잡는 힘이 더 강해진 순간, 래화는 제가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잡아챘다. 그리고 이선우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

얼음과 커피에 흠뻑 젖은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래화는 이선우를 노려보며 명령했다.

“정신 차리고 손 놔.”

드디어 손이 풀려났다. 가빠진 숨을 골랐다. 이선우는 얼떨떨하게 앉아 있다가, 늦은 사과를 했다.

“미안, 미안해, 래화야. 내가 잠깐 다른 생각 하다가.”

그러나 어딘가 맥이 빠진 사과였다. 래화는 그의 사과에서 비슷한 과거를 떠올려버렸다. 되짚고 싶지 않은 기억이 억지로 머릿속을 비집고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 래화야…….”

몰래 만든 화실을 이정환에게 들켰던 날.

래화는 음악을 틀어 놓고 혼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이정환이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많이 혼나겠구나 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저를 과보호하는 이정환을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괜찮다고, 나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엄마처럼 되진 않을 거라고.

여태껏 열심히 그린 그림들을 보여 주며, 그에게 엄마의 뒤를 이어 훌륭한 화가가 되겠노라고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정환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래화의 그림들을 본 그는 희번덕하게 눈을 뒤집고선 닥치는 대로 모든 걸 부쉈다. 그러다 나무 이젤을 바닥에 내려쳐 각목처럼 만들더니, 공포에 얼어붙은 래화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래화의 손목을 책상 위에 단단히 붙잡아 놓고…….

“…….”

손가락은 한 번에 부러지지 않았다. 이정환은 부러진 이젤로 몇 번이나 래화의 오른손을 내려쳤다.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안 된다고 발버둥 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른손의 손가락을 전부 부러트리고 나서야 이정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부러진 이젤을 툭 떨어트리더니, 뒤늦게 사과했다.

“아빠는 래화를 사랑해서, 너마저 설연이처럼 잃고 싶지 않아서……. 래화야, 아빠 마음 이해하지……?”

미안하다고,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고.세뇌하듯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에게 뭐라고 대꾸를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오른손을 보고만 있었던 것 같았다.

괴물처럼 부풀어 오르고 마디가 꺾여서, 두 번 다시 붓을 잡지 못할 듯 망가진 오른손을…….

아마 그때 이미 무의식 속에서는 깨달았을 것이다. 정말로 이정환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괴로워서, 래화는 이정환의 말을 믿어 버렸다. 어리석은 신뢰를 덮어쓰고 계속 외면하다가, 그가 제 앞에 망치를 휘두르는 조폭을 보내고 나서야 진실을 받아들였다.

“나 그만 갈게.”

래화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감추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을 찾으려 뒤를 돌아보았다.

“…….”

권이태가 없었다.

앉았던 테이블은 텅 비어서, 쟁반이나 빈 음료수 컵도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권이태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당혹스러운 감정에 서운함이 스며들었다.

왜 혼자 가버린 거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서, 래화는 손으로 심장 위를 꾹 눌렀다. 옆에서 이선우가 뭐라고 떠들어 댔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 분 먼저 가신 거야? 말도 없이?”

“…….”

“내가 바래다줄게. 래화야, 응?”

집에 가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래화에게 필요한 건 권이태였다.

핸드폰을 꺼내 권이태에게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너른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던 햇빛이 가려지며 그림자가 졌다.

똑똑.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래화와 이선우는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애타게 찾던 이는 그곳에 서 있었다.

슬링 백을 앞으로 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권이태는 유리창에 손을 짚은 채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래화는 제 핸드폰에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너무 감동적이다.

권이태가 슬쩍 웃으며 커피에 흠뻑 젖은 이선우를 가리켰다.

-뺨도 때려 봐.

바짝 조여든 마음이 갑자기 탁 풀어졌다. 래화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권이태.”

-나 없어서 놀랐어? 밖에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왜, 왜 먼저 나갔어……. 옆에 붙어 있어야지…….”

밀려오는 안도감에 자꾸 목이 메었다.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가 괜히 그를 타박했다.

“나한테 뺨이나 때리라고 시키고…….”

-무슨 소리야. 지금 바로 서비스 들어갈게. 차 가져와야겠다.

그는 검지로 이선우가 선 쪽의 유리창을 톡, 톡, 두드렸다. 날카로운 눈이 이선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윽 훑어 내렸다.

그리고 권이태는 경쾌하게 질문했다.

-오빠 분 전치 몇 주로 만들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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