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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 키치웨딩-44화 (44/132)

44화

어릴 적엔 멋모르고 아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류설연은 방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죽었어.”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꾸미거나 돌려 말하는 일 하나 없이 직설적으로 말해 주곤 했다.

이정환과 재혼한 뒤로는 친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아예 무시해 버렸다. 기껏 용기 내서 질문하더라도, 류설연은 커다란 눈으로 래화를 빤히 쳐다보다가 생긋 웃기만 했다.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니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다. 그저 죽었다고 했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잊었을 뿐이었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저를 안아 주었던 품을 떠올리긴 했다. 다른 건 모두 희미하지만, 커다란 품이 숨 막히도록 안아 주었던 기억을.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희미해져서, 최근 몇 년 동안은 떠올리지도 않고 살아왔었는데…….

“내가 알고 있어, 래화야.”

여태껏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친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선우가 꺼냈다. 래화조차도 먼지 쌓인 구석에 밀어 두고 잊어버렸던 존재를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의도로 꺼낸 화제는 아닐 터였다. 그가 정말로 래화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됐다.

“다 말해 줄게……. 아까 네가 궁금하다고 했던 것도 알아 놓을게.”

끊어지려는 인연을 다시 이어갈 빌미로 이 얘기를 꺼내면 안 됐다.

“연락해 줘. 조용한 장소에서 둘이 보자. 그때 사과도 제대로 할 테니까.”

매달리는 이선우의 말이 귓가에서 흩어졌다. 옅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이선우가 오늘 저를 완전히 들쑤셔 놓을 작정인 듯했다.

어지러움을 견디다가 눈앞에 있는 너른 등에 이마를 박았다. 등에 이마를 대고, 잠깐 가만히 숨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섬유 유연제 냄새와 시원한 향수 내음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무슨 향수 쓰는 거지…….

권이태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어두운 숲을 닮은 시원한 향은 맡고 있노라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향수를 궁금해하다 보니 어느새 기분이 썩 괜찮아졌다. 래화는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권이태 옆에 나란히 섰다.

“선우 오빠.”

단단한 권이태의 팔뚝을 손으로 쥔 채, 이선우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 좋아해?”

정곡을 찔린 듯, 이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달라붙은 그에게 래화는 또렷하게 말했다.

“우리 사촌 관계고, 나 유부녀야. 단둘이서 만나자고 연락하는 거, 조금 그렇잖아.”

“…….”

이정환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다. 이선우까지 지긋지긋한 상황에 보태 줄 필요는 없었다.

이선우는 멀거니 래화를 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연신 달싹거렸지만, 래화는 무시했다.

더 이상 말 섞을 가치가 없는 상대였다. 너무 피로해서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래화는 권이태의 팔뚝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래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잡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선우가 발작하듯 울컥 외쳤다.

“래화야, 오빠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선우 씨.”

래화의 암묵적인 승인도 떨어졌겠다, 이제 참을 이유가 없어진 권이태가 삐죽하게 받아쳤다.

“왜 남의 부인이랑 드라마 찍으시나? 뻔히 남편이 보고 있는데, 고백 타임이라도 가지시려고?”

그는 이선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이선우가 흠칫 떨었다. 긴장하여 마른 침을 삼키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권이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뒤지실래요?”

“존대할 거면 똑바로 하시죠. 차라리 반말을 하든지.”

“뒤질래?”

“…….”

파랗게 질린 낯을 하고서도 아득바득 받아치던 이선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멈칫했다가, 이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커피를 뒤집어써 갈색으로 얼룩진 셔츠를 입은 몰골이 초라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존심 부리는 것이 이세연의 오빠다웠다.

“협박은 무슨. 겨우 이런 걸로.”

한쪽 입꼬리 끝만 비죽하게 올려 웃은 권이태가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악수 한번 할까? 아까 못 했잖아.”

이선우는 손을 내밀지 않았지만, 권이태는 멋대로 그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래화는 보았다. 푸른 핏줄이 솟아오르는 손등을.

“윽……!”

이선우가 눈을 부릅뜨며 괴로운 신음을 삼켰다.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으나, 관자놀이에는 이미 식은땀이 맺히는 중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이에게 권이태가 속삭였다.

“이래화 손 함부로 잡지 마, 새끼야. 존나 귀하신 손이니까.”

***

카페를 벗어나 권이태의 SUV에 올라탈 때까지, 래화는 조용했다. 말할 힘조차 없는 탓이었다.

권이태도 굳이 그런 래화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그냥 차문을 열어 래화를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 줬다. 그리고 나선 클래식 음악을 잔잔하게 깔아 놓고 집으로 향했다.

한참 입 다물고 조용하게 음악만 듣고 나니 조금 기력이 생겼다. 래화는 살짝 입술을 열었다.

“오늘…….”

그리고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이태가 끼어들었다.

“사촌 오빠야, 남편이야.”

“당연히 남편인데.”

“그럼 다음에는 그 새끼 손 정도는 부러뜨려도 되지?”

불퉁하게 뱉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 사고방식이 남달랐다. 미친 짓이지만, 그래도 내 편일 때는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해 줄 것 같은 사람.

하늘의 별 정도는 총으로 쏴서 따 줄 수 있을 남자에게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어?”

“나 오래 사는 게 인생 목표인데.”

“근데 자꾸…….”

“래화야.”

권이태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나도 아무 때나 그러는 거 아냐.”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까 맡았던 향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차 안에도 가득 번졌다. 래화는 꼭 그에게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아버지 만나고 싶으면 내가 찾아봐 줄게.”

“아니야.”

류설연이 죽었다고 했으니, 찾아봤자 묘지나 보게 될 것이었다. 만일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연락이 없는 상대였다. 보고 싶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연락했을 텐데, 조용한 건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가.

가뜩이나 최근에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사건들이 많았는데, 친아빠라는 사람까지 힘들게 한다면 버티기가 어려울 듯했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괜찮다는 말에 어째서인지 권이태는 눈매를 찡그렸다. 흘긋 쳐다보는 눈빛은 괜찮지 않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가 짤막하게 답했다.

“……그래.”

래화는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가슴팍을 단단하게 가로지르는 벨트를 꾹 움켜쥐었다.

“있잖아.”

이어지는 말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도 그는 래화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아까 선우 오빠가 래화야, 라고 불렀을 때 징그럽고 지긋지긋했거든. 회장님이 그렇게 부를 때도 되게 싫어. 그런데 너는, 네가 날 불러주는 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래화는 한참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가장 무난한 말을 골랐다.

“다른 것 같아. 아니, 너는 달라. 항상…….”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쳤다. 권이태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핸들을 꺾더니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그는 핏줄 돋은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쥔 채, 잠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앞을 노려보던 시선은 이내 래화를 향해 날아왔다.

“또 그러네, 이래화…….”

화가 난 듯한 눈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없던 일로 하자더니.”

“내가 뭘.”

“너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보잖아.”

“그런 눈이 뭔데……?”

하지만 권이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가 잇새로 내뱉듯 중얼거렸다.

“사람 착각하게…….”

안전벨트의 버클을 풀고, 그는 완전히 옆으로 몸을 돌려서 래화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때는 그냥 놀라서 키스했다 치고 넘겼는데, 지금은 뭐냐고. 나 안 무서워?”

“……무서워.”

“그러면 래화야.”

향기의 밀도가 짙어져 무겁기까지 했다. 짓눌리는 감각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나랑 키스하고 싶어?”

래화는 기대하고 있었다.

맞닿는 시선이 길어졌다. 사냥한 짐승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직전, 최후의 심판을 앞둔 그가 느릿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붉은 혓바닥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음란했다. 마치 선악을 가르치는 뱀처럼, 간악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키스만,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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