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싫어!”
“래화야.”
“싫어, 싫다고! 그림 그리기 싫다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뺨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린 눈물은 턱 끝에 맺혔다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래화는 손에 든 필버트 붓을 반으로 꺾어 버렸다. 부러진 붓을 바닥에 내던지며 울먹였다.
“이제 그만해! 엄마, 나 더는 못 하겠어. 그만하자. 제발…….”
“래화야, 너부터 그만해야지. 지금 너무 흥분했잖니.”
“아아아악!”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는 제 모습을 류설연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몸이 새빨개지도록 울고 소리 지르는 래화와 다르게, 그녀는 침착했다. 래화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녀의 고요에 래화는 절망을 느꼈다.
넘을 수 없는 벽. 아무리 두드리고 내려쳐도 열리지 않을 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그래선 안 됐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래화는 멍하니 눈물을 툭툭 흘리며 류설연을 보다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
“그냥, 전부 다……. 엄마도, 나도……!”
무감한 얼굴의 그녀를 보며 래화는 울면서 웃었다.
“제발 죽어 줘, 엄마.”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섬찟한 폭언이었다. 그러나 악에 받친 저주를 들으면서도, 류설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 없이 물끄러미 래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럼 같이 죽을까?”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팔레트 나이프를 집었다. 나이프를 든 류설연이 래화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래화는 덜덜 떨면서 류설연을 바라보았다.
래화의 목덜미에 톡, 팔레트 나이프가 얹어졌다. 날이 뭉툭하지만, 금속의 싸늘한 감촉은 사람을 본능적인 두려움에 빠트렸다. 래화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엄마는 네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 우리 포기하지 말자.”
“…….”
“재능을 썩힐 수는 없잖니. 그건 안타까운 일이야.”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얼어붙은 래화에게 류설연은 더없이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작은 꽃…….”
**BAO**
커다랗게 숨을 들이켜며 잠에서 깨어났다.
“……!!”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래화는 가쁘게 호흡하며 몸을 웅크렸다. 침대 이불을 구깃하게 말아 쥐었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이상한 꿈이었다.
엄마랑 심하게 싸운 일은 종종 있었다. 둘 다 할 말을 참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리기 싫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괴롭고 힘들어도, 언제나 래화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재능에 애증을 품기도 했으나, 그래도 손에 붓을 쥘 때만큼은 언제나 행복했다.
역시 개꿈인가…….
최근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사건들에 시달리다 보니, 헛된 망상을 꿈으로 꾸는 모양이었다.
저런 일은 없었어.
래화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없애려 팔뚝을 문질렀다. 자꾸 불안감이 치밀었다.
나쁜 생각을 쫓아내고자 시선을 돌렸다. 창문을 바라본 래화는 깜짝 놀랐다.
새하얀 햇살이 눈부셨다. 오후까지 잠을 자 버린 것이다.
전날에 늦게 자더라도,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던 래화였다. 이렇게까지 늦잠 자 버린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멍하니 햇살을 맞고 있다가, 부스럭부스럭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얼른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러했고, 래화는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시 엎어졌다.
“아읏…….”
아릿한 근육통에 도저히 꼼짝할 수가 없었다. 래화는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에는 래화 혼자뿐이었다.
눈 뜨자마자 권이태가 보이면 민망했겠지만, 막상 그가 없으니 허전했다. 악몽이나 다름없는 개꿈을 꿔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디 갔을까…….
권이태를 생각하던 래화는 몸을 확인했다. 다행히 깨끗했다. 기절하듯 잠든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잘 씻긴 모양이었다. 저번에도 그랬는데 말이다. 은근히 챙기기를 잘하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키스마크와 잇자국이 남은 몸을 살피다가, 아래도 확인해 보았다. 좀 쓰리다 싶었는데, 역시나 발갛게 부어 있었다. 잔뜩 마찰 당한 허벅지 안쪽과 음부 전체가 발긋했다.
의외로 심하게 아프진 않았는데, 연고가 발린 덕분이었다. 씻기고 바로 발라 놓은 듯, 거의 마른 연고는 이제 흔적만 약간 남아 있었다.
손으로 조심조심 아래쪽을 더듬어 보던 래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일어났네?”
한 손에 니트릴 장갑을 낀 권이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밑에 어때? 괜찮아?”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래화의 음부와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일어난 김에 다리 벌려 봐.”
“…….”
쓰레기 보듯 쳐다보니, 권이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연고 바를 건데.”
래화는 얌전히 다리를 벌려 주었다. 그가 서랍장 위에서 연고 통을 집어 왔다. 왜 니트릴 장갑을 꼈나 했더니, 장갑 낀 손으로 연고를 듬뿍 덜어 냈다.
붉게 부어오른 살 위에 연고를 펴 바르는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대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심각한 권이태를 구경하다가, 조용한 공기가 어색해 질문했다.
“원래 핫젤이 다 그런 거야?”
이런 건 처음 써 봐서 비교군이 없었다. 정말이지 상식 밖의 물건이었다. 밑이 타는 듯이 뜨겁고 간지러운 감각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다들 이렇게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며 살아간다니, 믿기지 않았다.
“음…….”
허벅지에 연고를 바른 권이태가 음부 쪽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네가 피부 얇고 예민해서 그런 것 같은데…….”
확실히 래화는 피부가 많이 약한 편이긴 했다. 어디 살짝만 부딪쳐도 자국이 남고, 멍도 잘 드는 체질이었다.
“핫젤은 버렸어. 두 번 썼다간 너 죽겠더라.”
허벅지 안쪽까지 꼼꼼하게 바른 후, 권이태는 한 번 더 통에서 연고를 떠냈다.
“이제 안쪽 바를 거니까 조금 참아.”
손가락이 음부에 닿았다. 넓은 음순 위를 문지르다가, 아직도 탱탱 부은 음핵 위에 닿았다. 미끌미끌한 연고를 문지르는 감각에 래화는 숨을 멈췄다.
잔뜩 힘이 들어간 아랫배가 떨렸다. 긴 손가락이 틈새를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읏…….”
래화는 그만 흠칫거리며 밑을 꽉 조여 버렸다. 손가락을 깨무는 힘에 권이태가 비죽 웃었다.
“눈 뜨자마자 하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하읏……!”
하지만 연고 묻힌 손가락이 앞뒤로 긁듯이 두어 번 움직이자, 곧장 신음을 흘려 버렸다. 래화가 듣기에도 무척 기분 좋아 보이는 신음이었다.
“우리 자기, 변태 다 됐네…….”
그는 손가락을 살살 털어 주었다.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로 래화가 좋아하는 부분만 문질렀다. 결국 래화는 발가락을 쭉 벌리며 가벼운 절정을 맞았다.
잠에서 완전히 깨기도 전에 또다시 당한 래화는 힘이 다 빠져 버렸다. 이러다 정말로 복상사, 아니, 복하사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푹 퍼져서 꼼짝을 못 하고 있으니, 권이태가 피식 웃었다. 그는 촉촉해진 안에 빠르게 연고를 발라 주고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니트릴 장갑을 벗은 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래화의 이마에 쪽 하고 입 맞췄다.
“더 자.”
“싫어…….”
래화는 영혼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은 그림 그릴 거야…….”
이미 주말을 거의 다 날렸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처지이니, 쉴 수 없었다. 일어나겠다고 끙끙대자, 권이태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래화를 안아 들었다.
“그럼 밥부터 먹고 해.”
저번처럼 죽이라도 사다 놓은 모양이었다. 간밤의 격렬한 운동 때문에 잔뜩 허기진 상태이긴 했다.
“뭐 사 놨어?”
“아니.”
“……?”
이번엔 무슨 장난을 치는가 싶었는데, 권이태가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 줄게.”
쭉 찢어진 눈매가 반달로 휘어지고, 날씬한 뺨에 보조개가 파였다.
“너 좋아하는 걸로. 잔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