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래화는 지금이라도 그가 농담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권이태는 진심이었다. 그는 래화에게 커다란 티셔츠를 한 장 입히곤, 날름 안아다가 부엌으로 데려갔다.
래화를 식탁 의자에 앉혀 놓더니, 언제 봐 뒀는지 서랍에서 앞치마를 꺼내 제가 입었다. 짧은 반바지에 앞치마 하나만 덜렁 걸친 권이태는 래화에게 으스댔다.
“잘 어울리지?”
래화의 사이즈에 맞춰서 산 앞치마인지라, 그에게는 몹시 작았다. 옆으로 가슴이 다 비어져 나왔다.
천이 모자란 가슴 부분과 다르게 배 부분은 조금 느슨했는데, 떡 벌어진 흉근에 비해 배는 납작한 탓이었다. 그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 허리띠를 묶어도 앞치마가 약간 헐렁거렸다.
앞치마 입은 근육질 남자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권이태는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래화를 매도했다.
“너무 야해? 꼴려도 참아. 밥은 먹어야지.”
“…….”
래화는 대답 대신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권이태는 킥킥거리며 더 좋아했다.
“식탁 위에 그거 마시고.”
커다란 텀블러에 야채와 과일을 갈아서 만든 주스가 담겨 있었다. 집에 믹서기가 없으니 직접 만든 건 아닐 테고, 장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의 주스 가게에서 사 온 듯했다.
“너 이런 거 좋아할 거 같아서.”
난 싫지만, 하면서 권이태가 덧붙였다. 과연 그는 싫어할 만한 건강 주스였다. 무슨 주스일까 궁금해하며 한 입 먹어 보니 아는 맛이었다. 사과와 당근, 비트를 넣고 만든 ABC 주스였다.
“이거 ABC 주스네.”
“ABC?”
“애플, 비트, 캐롯. 그래서 ABC 주스.”
“자기는 이름 이상한 거만 좋아하네.”
“……빨리 밥이나 해.”
밥하라고 구박하니 권이태가 비실비실 웃었다.
“뭐 먹고 싶은데?”
정말 기어코 요리를 할 모양이었다. 래화는 자신이 좋아하면서도 초보 요리사가 할 만한 음식을 궁리해 보았다.
“계란국.”
“그거 물 끓여서 계란 풀면 끝이잖아.”
“응.”
“너무 쉬워.”
권이태는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슥 내밀었다.
“이거 해 줄게.”
화면에는 너튜브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남자 요리사가 찜닭을 만드는 영상이었다. 래화는 영상 아래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 황금 레시피 안동 찜닭 만들기!! (초보도 가능)>
안동 찜닭이라니, 너무 어렵지 않은가…….
첫 요리치고 난이도가 상당했다. 물론 영상에는 ‘초보도 가능’이라고 쓰여 있긴 했다.
하지만 저런 영상에서 흔히 말하는 초보란 대개 기본적인 칼질, 재료 손질, 불 조절 등등을 다 할 줄 알고 찜닭만 처음 만들어 보는 사람을 뜻하는 법이었다.
“정말로……?”
불안하게 쳐다보자 권이태는 당당히 말했다.
“나 칼질 잘한다니까.”
“요리가 칼질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잖아.”
“나름 공부도 했어.”
아침부터 찜닭은 조금 그렇지 않냐고 설득해 보려다가, 지금이 점심때임을 뒤늦게 인지했다.
다른 방법으로 설득하려던 래화는 앞치마를 갖춰 입은 권이태를 보곤 마음을 비웠다.
“그래……. 해 줘…….”
저렇게까지 해 주고 싶다는데, 한 번쯤 밥상 받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다 태운다든가 해서 못 먹을 수준만 아니라면, 맛없어도 티 내지 않고 먹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래화 놀랄 준비 해라.”
비장한 출사표를 던진 권이태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싱크대에 늘어놓았다.
주스를 마시며 구경하던 래화는 큼직한 통닭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토막 난 닭이 아닌 생닭을 사 온 것이다.
“너 닭 손질할 줄 알아?”
“그쯤이야.”
영상 한두 개 찾아봤는데 별 것 없더라며, 아까 래화에게 연고를 발라 줄 때 썼던 니트릴 장갑을 양손에 착 끼고선 식칼을 치켜들었다.
평범한 식칼인데도, 그의 손에 들리니 유독 칼날이 예리하게 번뜩이는 듯했다.
식칼을 손에서 돌리는 위험한 퍼포먼스로 래화의 속을 한 번 뒤집어 준 후, 권이태는 본격적으로 닭 손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잘했다. 정확히는 잘하긴 하는데 조금 무서웠다.
탕. 탕. 탕.
세 번 칼을 내려쳐 필요 없는 닭 꽁지와 날개 끝부분을 날렸다. 배와 다리 사이에 스윽 칼집을 내더니, 손으로 붙잡고 뼈를 꺾었다.
우득, 닭의 다리뼈를 꺾는 소리가 음산했다. 뒤이어 지방과 연골을 칼로 사악 발라내고, 필요 없는 뼈를 발골했다. 신속한 손놀림에 통통한 생닭이 무참히 토막 났다.
분명히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인데, 어째서인지 연쇄 살인마가 시체를 처리하는 현장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닭 손질은 고작 몇 분 만에 끝났다. 초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손질을 마친 권이태는 토막 난 닭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끓는 물에 간단하게 데치고, 한 번 더 헹군 다음 체에 받쳐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채 손질은 더욱 능숙했다. 칼질을 한 번 할 때마다 감자와 당근이 텅텅 썰려 나갔다. 시원시원하게 토막 낸 다음, 대파와 고추도 착착 썰었다.
래화가 주스를 다 마셨을 즈음에는 냄비에서 찜닭이 열심히 바글바글 끓는 중이었다. 권이태는 찜닭이 끓는 동안 싱크대와 주변 정리까지 말끔하게 마쳤다. 그리곤 취사가 끝났다고 노래 부르는 밥솥을 열었다.
“……아.”
짤막한 소리에 무슨 일인지 대충 알 듯했다.
“밥 망했어?”
그가 솥을 꺼내서 래화에게 보여 줬다. 물을 너무 적게 넣었는지, 쌀밥이 아니라 하얀 돌덩이를 만들어 놨다.
“밑에 서랍 열어 보면 즉석 밥 있으니까 그거 먹자.”
“으응…….”
약간의 난관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식사가 차려졌다. 냄비째로 식탁에 갖다 놓은 권이태는 의기양양하게 뚜껑을 열었다.
래화는 박수를 쳐 주었다. 많이 걱정했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갈색 빛에 좌르르 윤기가 도는 찜닭은 냄새도 근사했다.
심지어 맛도 좋았다. 한 입 베어 문 래화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맛있네……?”
“거 봐.”
눈이 동그래진 채로 권이태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까닥이곤 래화의 앞접시에 닭다리를 두 개나 놓아 줬다.
“너도 하나 먹어.”
“난 됐어. 너 많이 먹어. 나 아침이랑 점심은 많이 안 먹는 거 알잖아.”
“아니,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닭다리를 혼자서 다 먹는 건, 한국인의 양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래화는 젓가락으로 닭다리를 집어서 권이태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나눠 먹자. 너 고생했으니까.”
“고생하긴 했지.”
그가 음흉하게 웃었다.
“어젯밤에 자기랑 떡 친다고…….”
“밥이나 먹어.”
젓가락으로 감자를 들고 왔다. 야채는 조금 설익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감자를 한 덩이 먹고, 고기를 먹으려 하는데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이 없어서 뼈랑 살을 발라낼 수가 없는 탓이었다. 뜯어 먹을 생각을 하자 벌써 힘들었다. 래화는 권이태의 접시에 슬쩍 고기를 올려놓았다.
“뼈 발라 줘?”
말 꺼내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묻더니, 젓가락으로 살코기만 발라서 래화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래화는 살뜰한 수발을 받으며 점심을 먹게 되었다.
래화는 우물우물 밥을 먹으며 권이태가 젓가락으로 이런저런 반찬을 집어다 주는 걸 구경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날라리처럼 생겨서 의외로 젓가락질을 잘했다. 제대로 된 정석 젓가락질이었다.
“아, 1층 CCTV 말인데.”
권이태가 밥 먹다 말고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원격 조종 되는 거라서 어제 집 들어오기 전에 핸드폰으로 껐어. 녹화된 거 있나 확인도 했고.”
걱정할까 봐 말해 준다며, 그가 덧붙였다. 어제 권이태와 현관문에서 저지른 엄청난 짓을 떠올린 래화는 들고 있던 당근을 툭 떨어트렸다.
식탁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당근을 권이태가 젓가락으로 날렵하게 붙들었다. 래화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혹시 음성도 녹음돼?”
“아니. 음성 녹음 필요하면 말해. 넣어 줄게. 근데 이거 한국에선 불법이야.”
권이태는 래화의 접시에 새 당근을 올려 주었다.
“개인 정보 보호법인가……. 아무튼 그거 때문에 CCTV에 음성 녹음되도록 하면 불법이거든. 감옥 가.”
자신은 최정이 만들어 준 걸 써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공장에서 아예 음성 녹음 장치 없이 기계가 생산될 거라며 말했다.
기관총 쏴 갈기던 사람이 개인 정보 보호법을 운운하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 필요하면 녹음장치 달아 줄게.”
“그리고 나 감옥 가고?”
“자기가 왜 감옥 가. 내가 대신 가야지. 덕분에 최초로 가 보겠네. 사식 넣어 줘.”
농담 한번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래화는 그에게 자신이 음성 녹음이 필요하지 않음을 열심히 확인시켜 주었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며 식사를 거의 끝낼 즈음이었다.
“근데 래화야.”
그가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질문했다.
“아직도 내가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