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DS 호텔은 본래 비인기 호텔이었다.
이학수가 이어받은 호텔을 소위 말하는 ‘핫한’ 호텔로 만들어 낸 것은 전적으로 강미옥의 공이 컸다.
강미옥은 호텔의 전면 리뉴얼을 도맡아 진두지휘했다. 화려하기만 한 인테리어를 싹 갈아엎어 최신 유행에 맞는 세련된 느낌으로 바꾸고, 호텔 이름도 대산 호텔에서 DS 호텔로 변경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DS 호텔을 띄우기 위해 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하는 것마다 화제 몰이를 했던 유명 화가, 류설연의 신작 전시회를 DS 호텔에서 연 것이다.
강미옥의 아이디어는 그대로 적중했다. 류설연의 전시회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미디어의 주목은 물론이고, 각종 SNS에서도 DS 호텔을 무수히 언급했다.
특히 류설연이 해외에서도 떠오르는 화가였기 때문에, 외국인들까지 DS 호텔의 존재를 알게 되는 등 커다란 홍보 효과를 누렸다.
류설연 또한 자신의 전시회가 호텔에서 화려하게 열리는 것을 즐거워했기에, 서로 이득이 되는 공생 관계였던 셈이었다.
하지만 DS 호텔의 발돋움에 류설연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미옥은 그녀를 혐오했다.
연예인 병 걸린 그림쟁이 년.
강미옥이 류설연을 평하던 말이었다. 강미옥도 류설연의 실력과 놀라운 화제성은 인정하는 바였다. 좋은 관계를 쌓아 두면 크게 도움 될 상대를 혐오하게 된 원인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했다.
류설연은 강미옥과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그녀는 이정환의 사랑과 후원을 받으며 편하게 살아가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그에 비해 강미옥은 덜떨어진 이학수를 멱살 잡고 끌고 가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류설연은 항상 그 부분을 꼭 집어내며 강미옥에게 빈정거리곤 했다. 심지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학수를 상대로 은근히 유혹하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서 하는 짓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에 껌뻑 죽는 남자들을 전시하는 일이 좋아서. 저한테 절절매는 남자들을 보는 게 재밌어서.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남의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려 했다.
다행히 이학수는 형인 이정환이 무서워 류설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강미옥은 한동안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년이 남겨 둔 딸, 이래화 때문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이정환 회장님께서…….”
강미옥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만 해도 분기가 차오른다는 듯, 파르르 떨면서 말했다.
“전문 경영인을 두고 일선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고 계시더군요.”
거실 소파에 둘러앉은 이들이 강미옥을 바라보았다. 강미옥은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DS 호텔의 회장이자 남편인 이학수와 자랑스러운 아들 이선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딸 이세연.
“이래화에게 재산 전부 물려주고, 경영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류설연과 결혼한 후, 이정환은 자식을 낳지 않았다.
유일한 딸인 이래화는 경영 쪽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이정환도 래화에게 회사 일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양녀나 양자를 들이지 않는 이상,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 그가 전문 경영인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 그 꼴 못 봐요. 뻔히 이씨 집안 핏줄들이 눈 새파랗게 뜨고 있는데! 그것도 경영 수업 다 받은 우리 선우가 있는데! 선우가 어디 빠지는 구석이 있어요? 똑똑하고, 성실하고……. 그런데 회장님께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실 수 있는 건지…….”
강미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세연이 얼른 얼음물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엄마, 여기 물!”
“고마워, 딸.”
그녀는 우아하게 잔을 비웠다. 냉수를 마시곤, 다시 고상한 사모님으로 돌아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여보! 나는 전부 대산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나도 알지…….”
이학수가 깊은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카리스마 있게 이끌어 주진 못할망정, 우유부단하게 구는 꼴을 보자니 속이 터졌다.
하지만 이미 이학수와 수년을 함께해 온 강미옥이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정도는 훤히 꿰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실상 다 넘어온 상태였다.
조금 무른 면이 있긴 하지만, 이학수도 강미옥과 다를 바 없이 탐욕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는 슬며시 강미옥에게 물었다.
“미옥아.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강미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권이태 씨를 끌어들여야 해요. 우리가 거기랑 직접 연락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권이태 씨 통해야죠. 그리고 여보도 그쪽 집안 분위기 알잖아요? 결국에는 권이태 씨가 다 물려받을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놈이 세연이한테 아주 무례하게 굴었다면서.”
“아이, 나 괜찮아요! 서로 좀 오해가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이세연이 방싯방싯 웃으며 강미옥의 말을 거들었다. 딸의 애교에 흐뭇하게 웃던 강미옥이 손을 저어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아무튼 여보. 들어 봐요.”
강미옥은 도도하게 턱 끝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궁리한 방법이 있는데, 마침 기회가 왔어요. 회장님 밑에 박 실장, 알죠? 요번에 연락 왔거든요. 우리 호텔에서 옛날에 열었던 류설연 전시회, 그때 담당했던 직원 인터뷰 따 간다고 하는데, 방송국에서…….”
“어머니.”
이선우가 나직하게 말을 끊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는 강미옥에게 이선우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두 분 이야기 나누시고, 혹시 제가 해야 할 일 있으면 말씀 주세요.”
“엄마, 나도 일어날게요!”
이세연이 황급히 따라 일어났다. 그녀는 거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종종걸음 쳤다. 그리고 정원으로 향하는 이선우를 발견하곤 뒤를 졸졸 따라갔다.
“오빠!”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목청껏 불러 젖혔다. 뒤쫓던 이를 따라잡은 이세연은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한국 오자마자 이래화 만나러 갔다며.”
“맞아.”
“왜 나한테 연락 먼저 안 하고……!”
“세연아.”
단호하게 끊어 내듯 부르자, 이세연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선우는 나직하게 물었다.
“너 아직도 래화 괴롭히니?”
“……아니야.”
그러나 바라보는 시선이 지긋하게 길어지자, 이세연은 울상을 지으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조금 괴롭히긴 했는데! 요즘엔 진짜 아니야. 그러지도 못해! 그 사람 때문에…….”
“그랬구나.”
이세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주먹을 말아 쥐고 이선우의 팔뚝을 콩콩 때렸다.
“오빠는 왜 이래화 편들어? 내가 걔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불쌍하잖아. 래화는 가족도 없고.”
“내가 더 불쌍해!”
바락 소리 지른 이세연이 발을 구르며 성질을 부렸다.
“걔가 항상 내 거 뺏어 가. 이번에도, 원래 내가, 이태 씨랑 약혼할 뻔했었는데……. 결국 또 이래화가…… 뺏어 갔잖아…….”
아래턱이 쪼글쪼글해질 정도로 힘껏 입술을 말아 물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왜 이래화만 좋은 걸 가져야 해? 왜, 왜 맨날 내가 2등이냐고……!”
그녀의 말에는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이선우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이세연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정도 울음이 그쳤을 때, 이선우는 이세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세연이 너는 래화를 밀어내고, 네가 권이태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
이세연이 눈을 동글하게 떴다. 작은 머리 안에서 맹렬하게 고민하는 것이 이선우에게도 느껴졌다. 이세연은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햇빛을 가득 머금은 이선우의 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가 느릿하게 질문했다.
“그럼 임신할 수 있겠어?”
“……어?”
“권이태 애 가져도 괜찮냐고.”
이세연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귀엽지만 똑똑하지는 않은 여동생을 보며, 이선우는 미소 지었다.
“그쪽 집안 어떤지 알지? 애만 가지면 바로 너 안주인으로 데려갈 거야. 래화는 솔직히 며느리 삼기에는 조금 흠이 많잖아. 정신적으로 문제도 있고.”
“그, 그건 그렇지만.”
“각오 되면 말해 줘. 너 괜찮다고 하면…….”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제 말을 듣는 동생에게 이선우는 상냥하게 말했다.
“오빠가 어떻게든 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