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각사각, 연필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듣기 좋게 사각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처럼 깔아 두고, 래화는 천천히 연필을 움직였다.
오직 검은색 연필심만으로 그리는 풍경은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음침한 암녹색 숲이었다.
울창한 녹림의 바닥, 검은 흙 사이로 나무뿌리가 뒤엉킨 곳에 젖은 나뭇잎을 잔뜩 그려 넣었다.
썩어 가는 나뭇잎 위에 새로이 떨어진 나뭇잎을 그리고,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거칠게 표현해 주었다.
“…….”
거침없이 움직이던 연필은 잠시 멈칫했다. 아주 잠깐 망설인 끝에,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뱀이 어두운 숲에 나타났다.
축축한 나뭇잎 위를 기어가는 뱀은 매혹적이고 요사스러웠다. 래화는 뱀의 비늘을 하나씩 섬세하게 그려 주었다.
찰필로 문질러 숲을 둘러싼 어둠을 만들고 나니, 잠깐 손 풀기용으로 그리려던 것이 어느새 그럴듯한 연필화가 되었다.
래화는 완성한 연필화를 가만히 보았다.
“아직도 내가 무서워?”
그날, 권이태의 질문에 래화는 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가 무서웠다. 정상적인 삶을 원하는 래화에게 그는 위험한 존재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격한 잠자리를 가지면서 한계 이상으로 자극을 받은 탓인지, 곧바로 이상한 꿈을 꿨다.
개꿈이라고 모른 척 넘겼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류설연이 등장하는 악몽을, 그것도 마치 실제 겪은 일처럼 구체적으로 꾸었다는 건 좋지 못한 징조였다.
정신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게 명백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래화는 그의 곁에 있을 때 안정되었다. 그는 래화를 망가뜨리면서도 온전하게 했다.
모순적인 제 마음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한참 입술만 달싹거리다 결국 답하지 못하자, 권이태는 어째서인지 비죽 웃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가만히 래화를 바라보았다. 묘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실수로 섹스했다고 안 그러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이태는 더 캐묻지 않고 래화를 놓아주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기어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하여 산산이 망가지더라도……. 그를 가지고 싶은 것일까.
제가 그려 놓은 뱀 그림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고민하던 때였다.
“우와……!”
새 음료수를 받아 온 최정이 연필화를 보더니 눈을 큼직하게 떴다. 그는 래화가 부끄러워질 만큼 호들갑을 떨며 그림을 칭찬했다.
“장난 아닌데요? 진짜 멋있어요. 뱀도 있네요? 어, 권이태 문신 닮았다.”
“……조금 참고했어요.”
뱀 얘기를 자세히 하면 더 부끄러울 일만 남은지라, 래화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음료수 가져다주셔서 고마워요.”
“어휴, 당연히 제가 해야죠.”
카페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최정과 함께 브런치 카페에 와 있었다.
래화는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드로잉 북에 그림을 그렸다.
작업이 막힌 상황이었다. 집 화실에서 틀어박혀서 고민하기보단, 환경을 바꿔 주면 머리도 더 잘 돌아갈까 싶어 밖에 나와 드로잉 중이었다.
최정은 가까운 테이블에 따로 앉아 있다가, 래화가 음료수를 하나 더 시키려 하자 제가 대신 가서 주문하고 받아 왔다.
“권이태 이제 슬슬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묻지도 않은 권이태의 일정을 알려 주고, 최정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권이태는 슈미트와 메이를 데리러 갔다. 보통 이런 일에는 최정을 보냈는데, 처리할 일이 있다며 직접 간 것이다.
다들 데저트의 핵심 멤버랬지…….
권이태가 꾸린 팀원 전부와 만나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었다. 래화는 새 종이를 꺼내서 드로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숲 말고 뱀을 그리려고 하던 때였다. 잠시 손가락을 스트레칭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래화는 무척 독특한 분위기의 여자를 발견했다.
카페 맞은편의 골목길에서 전자 담배를 피우는 여자였다.
그녀는 일자 청바지와 배꼽이 살짝 드러나는 크롭 기장의 민소매 차림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눈을 나른하게 내리깐 채 베이핑하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
너무 빤히 본 것일까.
여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눈동자를 스윽 굴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래화는 약간 민망함을 느꼈다. 어색하게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때였다. 래화는 깜짝 놀랐다.
“……!”
여자가 제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해 보인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떨떨하게 있는데, 여자는 심지어 느적느적 걸어서 카페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테라스 난간에 손을 얹은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정말 예쁘네요. 보석 같아요.”
“네?”
그렇게 안 생겼는데, 혹시 ‘도를 믿으세요’인가?
래화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경계에도 여자는 생긋 웃더니, 난간을 훌쩍 뛰어 넘어오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래화의 맞은편에 앉아선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메이라고 불러 주세요, 플러이.”
대체 무슨 일인가 얼떨떨한 차였다. 근처에 앉았던 최정이 후다닥 달려왔다.
“야, 제발!”
그리고 메이라는 여자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다른 데 가서 이딴 식으로 인사하면 너 신고당해. 방구석에서 컴퓨터만 두들기지 말고 밖에 나와서 사람도 좀 만나고 그래라. 사회성 없는 거 티내지 말고.”
“이 새끼가?”
발칵 화를 내던 메이가 래화의 눈치를 보더니 진정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데저트 소속이신 거죠?”
“네. 저는 메이예요. 혹시 플러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쩜 이렇게 찰싹 어울리는지.”
찰싹 어울리는 건 뭐지…….
“찰떡같이를 말하고 싶은가 봐요.”
최정이 옆에서 알려 줬다. 예전에 권이태가 언급했던 한국말 잘하는 태국인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확실히 단어를 약간 실수하는 것 빼곤, 다른 부분은 원어민 수준으로 느껴졌다. 특히 발음이 무척 좋았다.
“근데 너 왜 혼자 왔냐? 슈미트는.”
“거기는 둘이서 할 얘기 있대.”
귀찮다는 듯 대강 답하며 최정을 밀어 낸 그녀가 래화를 보며 방긋 웃었다.
“플러이. 나랑 재밌는 거 할래요?”
“……재밌는 거요?”
갑작스러운 전개를 따라잡지 못하는 래화에게 메이는 양손의 검지를 발랄하게 치켜세웠다.
“권이태 속 뒤집기!”
***
오래된 광고 전단이 너절하게 붙은 돌벽은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우툴두툴했다.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거뭇한 껌딱지와 성인 업소의 명함 찌라시, 그리고 담배꽁초가 뒹구는 더러운 길 위에 이질적인 구둣발이 자리했다.
지저분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수제화의 주인은 우아한 싱글 셋업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다소 냉랭하고 엄격해 보이는 사내는 안경알 너머로 제 앞의 권이태를 바라보았다.
권이태는 얼굴에 튄 핏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그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치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사람을 발로 툭 찼다.
“하아…….”
신경질적으로 툭툭 차 대며 한숨을 쉬더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던졌다. 아직 불씨가 남은 꽁초가 남자의 위에 툭 떨어졌다.
권이태는 꽁초 위를 지긋하게 밟아 주었다. 담뱃불에 지져진 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지만, 권이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하여간 다들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화할 생각이 없지?”
“끄억……!”
“카페에 딱 앉아서, 응? 커피 한 잔, 아이스 초코 한 잔씩 마시면서 평화롭게 대화하면 얼마나 좋아. 무식해 가지곤…….”
발로 담배꽁초를 꾹꾹 짓이기던 권이태가 마지막으로 대가리를 걷어찼다. 피떡이 되어 꿈틀대던 사내는 뻑 소리를 끝으로 기절했다.
고통스런 신음마저 사라진 골목은 조용했다. 권이태는 가볍게 숨을 뱉으며 손에 낀 가죽 장갑을 벗었다.
“이제 끝?”
슈미트는 권이태의 뒤편으로 널브러진 십여 명의 남자들을 보았다가, 다시 천천히 그를 보았다.
“이번 건은 끝입니다.”
권이태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슈미트는 그에게 다가가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권이태는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
“겨우 이런 걸로 나 불렀을 리가 없잖아. 할 말 있는 거 아냐?”
슈미트는 지포라이터를 정장 안주머니에 반듯하게 집어넣었다.
“태이.”
“말해.”
“당신 부모가 내게 연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