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얼룩지는 핏물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듯 진득했다. 권이태는 얼마간 핏물을 밟고 섰다가 발을 떼어 냈다.
그리고 아직 피가 묻지 않은 아스팔트를 골라, 스니커즈를 대강 슥슥 문질렀다. 제게 묻은 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어쨌든 이번 의뢰 끝나는 대로 해결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최대한 지원하죠.”
단정한 말에 권이태는 씩 웃었다. 그는 제가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꼬리나 달고 오지 말라고.”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좋은 말로 표현해서 민간 군사 기업이지, 사실상 전쟁 청부업자였다. 그러다 보니 복잡한 원한 관계에 얽히기가 쉬웠다.
이래화의 의뢰를 받기 전에 해결했던 건이 조금 꼬이면서, 한국까지 꼬리를 붙여 오게 되었다. 총기류를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이태에게 부탁했다.
마음껏 폭력을 휘두르게 해서 발작이 돌아오는 시기도 늦출 겸 말이다.
슈미트는 잠시 권이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팔팔한 상태로 보아 괜찮은 것 같기는 했다.
“근래에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있나요? 제이에게 그렇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어.”
잠도 잘 자고, 악몽도 안 꾸고. 대수롭잖다는 듯 말하던 권이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이래화 옆에 있으면 괜찮던데.”
“…….”
슈미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권이태는 태연했다. 뻔뻔한 꼴을 보아하니, 본인이 무척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던 때였다. 권이태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요란한 기타 소리로 시작하는 메탈리카의 노래에 슈미트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하는 슈미트를 보며 얄밉게 웃어 보인 권이태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최정이 울먹거렸다.
-야, 큰일 났다…….
슈미트가 토끼 핸드폰 케이스에 정신 팔린 사이, 권이태는 큰일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왜.”
그러자 최정이 이미 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메이가 이래화 데리고 클럽 간대…….
***
메이는 무척 열정적이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권이태의 속을 뒤집어 주자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예요. 권이태가 사람인지 확인해보려는 건데요. 겸사겸사 한국 관광도 하고.”
“이번 장난은 태이가 정말 화낼 듯한데…….”
여태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는지, 최정은 옆에서 우물쭈물 만류했다. 하지만 폭주하는 메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메이가 래화를 데려온 곳은 삼성역의 컨벤션 센터였다.
권이태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곳이었지만, 메이가 워낙 신나하는 탓에 그냥 따라가 줬다. 메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 진짜 오고 싶었는데, 제가 친구 없거든요. 그렇다고 시꺼먼 남자들 끌고 다닐 수도 없고.”
친구 없는 건 래화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조금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졸지에 시꺼먼 남자가 된 최정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꼭 이런 데를 와야겠어?”
“뭐 어때. 얼마 전에 싹 쓸어 놔서 안전하잖아? 그리고 너도 데려왔고, 나중에 태이도 올 거고.”
우리 플러이가 여기 있는데 당연히 오겠지, 하면서 메이는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최정은 제 양손으로 뺨을 쓸었다.
“권이태가 와서 문제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자.”
“어엉, 싫어.”
“야!”
메이와 최정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래화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도 플러이라고 불러 대기에, 오는 길에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보석이라는 뜻임을 알게 된 후로는 별명을 들을 때마다 너무 민망했다. 래화는 고민하다가 메이를 불렀다.
“메이 씨.”
이렇게 부르는 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자신이 원하는 바도 말했다.
“저도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래화 씨라고 불러 주시면.”
“래화 씨!”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외친 메이가 래화의 손을 잡고 전진했다.
“우리 저기서 사진 찍어요.”
그녀가 데려간 곳은 책이 엄청나게 많은 곳이었다. 천장까지 책장이 뻗어 있는 광경이 제법 그럴듯했다.
메이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포토 스팟이었다. 꺄륵꺄륵 웃어 대는 그녀를 사진 찍어 주고, 그 다음에는 아쿠아리움에 갔다.
메이가 끌고 다니는 대로 구경한 후, 돌고래와 아기 물범, 상어 인형을 하나씩 품에 안고 나왔다.
“저거 해야 돼요. 꼭, 무조건, 반드시!”
메이의 지휘에 따라 래화와 최정은 조그만 셀프 사진 부스에 들어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았다.
얼떨결에 보석 왕관을 머리에 쓰고 사진을 찍었는데, 최정은 머리에 커다란 반짝이 리본을 얹었다. 그에 비해 메이는 얌전한 고양이 머리띠였다.
“와…….”
강제로 리본 머리띠를 착용한 최정은 인화한 사진을 받아들며 메이를 노려보았다. 물론 메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하하, 잘 어울린다. 예쁘네.”
호탕한 웃음과 함께 최정을 칭찬해 주곤, 메이는 컨벤션 센터를 떠나 다음 장소로 둘을 끌고 갔다. 세 사람은 강남에서 유명한 음식점을 가고, 예쁜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인기 카페에서 나란히 음료수도 한 잔씩 했다.
카페 창가에 앉아서 어두운 밤거리를 내다보며 음료수를 마시던 래화는 속으로 작은 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정신없는 하루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들 이런 식으로 노는 걸까?
대학교 다니는 내내 8시 통금이었다. 귀가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친구들과 저녁 한 끼 먹기도 바빴다. 심지어 돌아갈 때가 되면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대형 세단이 음식점 앞에 멈춰 서면, 래화는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다들 부담스러워하고, 자연스레 같이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본가에서 독립하게 됐지만…….
병원에 끌려가 입원하면서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그대로 연락이 끊어지며 얄팍한 인간관계마저 다 흩어져서 진짜로 혼자만 남았다.
그 이후로도 친해지고 싶다고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조금 친분이 쌓인다 싶으면 이정환과 이세연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결국 래화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처럼 친구끼리 놀러 나오는 일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또 이렇게 놀러 나와도 좋을 것 같기도…….
래화는 자신이 주문한 음료수를 한 입 마셔 보았다. 오늘 이미 음료수를 여러 잔 먹어서, 평소라면 절대로 안 시키는 걸 주문해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달아서 혀가 떨어질 정도였다. 권이태는 어떻게 맨날 이런 걸 입에 달고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거의 줄어들지 않은 아이스 초코를 앞으로 밀어 놓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는 메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었다. 이제 집에 가려나 했는데, 메이의 계획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클럽?”
본격적으로 속 뒤집는 계획에 최정은 사색이 됐다.
“클럽을 간다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냥 잠깐 들어가서 춤만 추고 올 건데.”
“…….”
최정은 비장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메이가 고개를 길게 빼서 최정이 어디로 갔나 확인했다.
“태이한테 일러바치러 가나 봐요.”
그녀는 야구 모자를 벗어서 테이블에 올려 두고, 래화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이 틈을 타서 몰래 도망갈까요?”
그러더니 무슨 사랑의 도피를 하듯, 래화를 데리고 카페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처음 그녀에게 휘말렸을 때처럼, 어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대로변을 달리고 있었다. 래화의 손을 잡고 대로를 질주하는 메이는 캭캭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이 이 새끼……!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신나게 달리던 메이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발을 멈췄다. 강남 클럽 바로 앞이었다.
음악이 쿵쿵 새어 나오고, 사람들이 길게 줄 선 모습을 바라보던 래화는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클럽 가요?”
“아뇨?”
클럽 부근으로 위치가 찍히도록 그 근처에 숨어있으면 된다면서 낄낄거렸다.
“제가 싹 다 확인해서 오늘 하루는 안심해도 되긴 하거든요. 위험한 일은 없을 텐데……. 그래도 진짜 클럽 가면 태이가 저 죽일 거 같아서.”
아마 이제 근처까지 왔을 텐데, 위치 추적 보고 여기까지 쫓아오면 권이태 데리고 칵테일 바나 가자는 것이었다.
메이는 핸드폰으로 제가 가고 싶은 칵테일 바를 보여 주었다. 그녀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요. 여기 xx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시선을 돌리니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래화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갸웃하며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초행길이라서.”
래화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버쩍 굳었다가, 뒤늦게 웅얼웅얼 답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거의 달려들듯 물었다.
“혹시 두 분이서 오셨어요? 저희도 둘인데. 수상한 사람 아니고, 그냥 이런 직장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애초부터 길은 궁금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불쑥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제가 일원 전자 다니거든요.”
남자가 자신의 회사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옆의 친구도 명함 내밀면서 잘생긴 척 웃었다.
“저는 대산 건설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