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래화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길에서 헌팅을 당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대산 건설 다니는 사람한테 헌팅 당한 건 처음이었다.
대산 건설에 외동딸이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이 남자도 제 눈앞에 회장님 딸이 있으리라곤 전혀 짐작도 못할 터였다. 래화는 자신이 받은 명함의 뾰족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대산 건설에 다닌다는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얼굴이 벌겠다. 그는 래화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이 친구가 이렇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 아닌데…….”
일원 전자 다니는 남자가 열심히 제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얘가 알짜거든요. 몇 억짜리 아파트 전세도 들어가 있고.”
아주 대단하다며 묻지도 않은 정보를 말해 대고 난리였다. 펜트하우스를 보유한 남편과 사는 래화는 담담하게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대단하다고 감탄해 주길 바랐는데 별 호응이 없으니 머쓱했는지, 남자는 다른 헛소리도 잔뜩 늘어놓았다.
얼마 전에는 국내산 중형차를 새로 뽑았다, 연봉이 몇 천이다 등등.
열심히 재산 자랑을 해 봤지만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나중에는 원래 번호 따고 이런 짓도 안 한다며, 길 가다 첫눈에 반했다며 순정파라는 주장까지 해 댔다.
항상 생각했지만, 래화는 제게 돈 자랑하는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중견 기업 외동딸이라고 말하면 망신 주는 일이고, 그렇다고 입을 다물면 이런 식으로 끝없이 떠들어 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곤란하니, 평소에는 이만큼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 차단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의 헛소리를 들어 주던 래화는 흘긋 메이를 보았다. 아까부터 쳐 내 버리고 싶었는데, 혹시 메이가 저 남자들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니 기다리던 중이었다.
다행히 메이도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만 무척 재밌어하는 눈치이긴 했다.
뭔가 말하고 싶어서 입꼬리를 씰룩씰룩하는 모습이 장난칠 궁리에 들뜬 말썽꾸러기 아이 같았다. 남자들은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눈치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오늘 클럽에 테이블도 잡아 놨거든요. 가면 제 친구들도 있고…….”
“저 결혼했어요.”
아직도 주절거리는 남자에게 래화는 왼손을 보여 줬다.
“진즉 말씀드려야 했는데 조금 놀라서 말이 늦었네요.”
권이태가 준 효과 좋은 방패막이를 확인시켜 주던 때였다. 메이가 대문짝만하게 눈을 부릅뜨고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어, 어엇……?”
메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 래화도 깜짝 놀랐다.
권이태가 클럽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줄 선 사람들을 싹 무시하고 입구로 다가가선, 가드와 몇 마디 이야기 나누더니 안으로 슥 들어갔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고 주위가 어둡지만 틀림없었다. 저런 키와 체구가 흔하지도 않거니와, 언뜻 보이는 이목구비만으로도 권이태였다.
그런데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안광이 번들거리는 게, 누구 한 명 죽이러 가는 것처럼 흉흉했다.
권이태가 메이의 장난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는 래화를 보호하는 입장이고, 클럽 같은 곳은 경호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항상 한 발짝 떨어진 것처럼 여유롭던 권이태와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메이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클럽 안으로 쑥 사라지는 권이태의 뒷모습에 메이는 그만 사색이 되었다. 그녀가 하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망했다…….”
넋을 놓고 멀거니 있다가, 파드득 정신차리며 연신 혼잣말했다.
“아니, 근데 왜 들어가는 거지? 설마 오차 범위 때문에 그런가?”
위치 추적 장치는 가끔씩 오차가 생기곤 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지금인 모양이었다. 클럽 밖에 있는데, 내부에 있는 것처럼 위치가 찍혀 버린 듯했다.
메이는 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어지기만 할 뿐, 받지를 않았다.
“제이도 클럽 안에 들어갔나 봐요. 태이는 어차피 안 받을 거고. 와, 미치겠네…….”
가볍게 권이태 속 좀 긁어놓으려던 계획이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중이었다. 머리를 쥐어뜯던 메이는 일단 최정과 권이태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래화의 손을 붙잡았다.
“들어가서 꺼내 옵시다.”
그리고 앞에 엉거주춤 서서 어리둥절해하는 두 남자를 내버려 두고, 래화와 함께 클럽으로 향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쳐 곧장 입구로 향한 메이는 가드에게 당당히 외쳤다.
“테이블 잡을 건데 들여보내 주세요!”
“지금 테이블 없……기는 한데 일단 들어오세요.”
거절하려던 가드는 메이가 찔러 주는 오만 원권 뭉치에 태도를 바꿨다. 래화와 메이를 안쪽으로 스윽 넣어 주곤, 직원을 연결시켜 주었다.
직원을 따라 클럽 안으로 입장한 래화는 윽 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밖에서도 쿵쿵거리던 음악이 안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귀가 터질 것처럼 들렸다.
클럽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메이는 정작 내부에 들어와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기 바빴다. 래화도 그녀를 따라 권이태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북적대는 클럽 안에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너무 시끄럽고, 사람도 많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권이태는 키가 크니까 어떻게 잘만 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른 테이블이랑 같이 앉으셔도 괜찮죠?”
직원이 래화에게 귓속말했다. 사람만 찾고 나간다고 대답해도 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래화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뭔 일인가 싶어 보니, 클럽 2층의 난간에서 한 무리의 남녀가 미친 듯이 웃으며 돈을 뿌리고 있었다.
오만 원과 만 원이 뒤섞여서 펄럭펄럭 떨어지는 가운데, 돈 뿌리는 이들 옆에서 방긋거리며 동영상을 찍는 여자의 얼굴이 어째 낯익었다.
이세연이었다.
래화는 입을 벌리고 2층을 쳐다보았다. 이런 장소에서, 그것도 저런 모습으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상대였다.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니 당연히 난리가 났다. 전부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란에 직원이 래화와 메이를 놔두고 급히 사람들을 통제하러 가 버렸다.
메이는 래화가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주었다. 돈 줍는다고 몰리는 사람들 때문에 메이가 잡아 주는데도 몸이 휘청거렸다.
메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래화를 데리고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다들 돈 떨어지는 곳에 가 있는지라 바깥쪽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보려는 것인지, 음악이 아까보다 덜 신나는 노래로 바뀌었다. 덕분에 터질 뻔했던 고막도 살짝 괜찮아졌다.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날아다니는 지폐들을 구경했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클럽 조명을 받으며 팔락팔락 떨어지는 지폐.
휘날리는 돈을 잡겠다고 좀비처럼 몰려들어 앞다퉈 손을 뻗는 사람들.
그리고 그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으며 재밌어하는 이들.
마치 블랙 코미디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소란은 이세연이 친구들을 이끌고 룸으로 돌아간 후에야 겨우 일단락되었다. 옆에서 함께 입 벌리고 보던 메이가 난간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이세연 맞죠?”
“네.”
“왜 저러는 거예요……? 돈 많은 집 아가씨들은 다 저렇게 놀아요?”
“이세연이랑 안 친해서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는 저렇게 안 놀아요.”
이세연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열심히 설명해 주는데, 귀에 난데없는 말이 꽂혀 들었다.
“오늘 대산 외동딸 왔다며?”
“내가 아는 오빠 있는데, 물어봤거든? 진짜 대산이래.”
“미친, 어쩐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몸을 바짝 굳혔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외부에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날 알아봤지?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증권가 찌라시 같은 게 돌았나?
그러나 그들이 2층을 손가락질하는 걸 보고 금방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세연을 래화로 착각한 것이다. 긴장했던 래화는 맥이 풀렸다.
친척 관계이긴 하지만, 이세연을 대산 건설 외동딸로 착각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대산 호텔도 DS 호텔로 이름을 바꾼 지가 언제인데 말이다.
나이가 비슷하니 좀 헷갈리나 하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쭈뼛하면서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이세연, 나로 오해 받는 거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 아니겠지……?
불쑥 떠오른 생각이지만, 왠지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세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세연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봐야 할 듯했다. 생각은 메이의 다급한 외침에 끊어졌다.
“헉, 저기, 태이 저기 있어요!”
권이태가 2층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2층에 올라간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테이블을 죄다 살폈다. 확인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한 권이태는 누군가를 붙잡고 뭔가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안쪽으로 가서 룸의 문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무표정하게 벌컥벌컥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권이태는 가장 안쪽 룸의 문을 열더니, 가만히 멈춰 섰다.
이세연이 들어간 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