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56화 (56/132)

56화

잠깐 문을 붙잡고 서 있던 그는 이내 이세연의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굳게 닫혔다. 메이와 래화는 얼른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2층은 마음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테이블을 잡거나, 테이블 잡은 사람과 일행이어야만 올라갈 수 있는 듯했다.

아까 테이블 쪽으로 보내 주겠다고 한 직원은 소란 이후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메이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현금은 아까 다 써 버렸는데……. 그냥 올라갈까요?”

“가드랑 싸우려고요?”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 물론 제가 싸움 잘하긴 하는데.”

최정보다 잘한다며 짧은 틈새 자랑을 늘어놓은 후, 메이는 가드를 위아래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가서 말만 잘하면……, 엇.”

그녀가 말하다 말고 래화를 끌어당겨 제 옆에 세웠다.

“저기!”

웬 남자가 다급하게 래화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좀 전에 길에서 말 걸었던 사람인데요.”

일원이랑 대산 다닌다는 남자들이었다. 쌀쌀맞게 거절했었는데, 둘 다 화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직도 눈에서 미련이 뚝뚝 흘렀다.

“2층 올라가고 싶으신 거죠. 저희가 테이블 잡아 놨거든요.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메이는 눈을 깜빡이다가, 래화를 돌아보았다. 이놈들 써먹어도 되겠냐는 무언의 질문에 래화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방금까지만 해도 성가신 날벌레 보듯 하는 표정이었던 메이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2층 가 봅시다.”

남자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 막 2층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올라오자마자 사건이 터졌다.

이세연이 있는 룸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남자가 튀어나와 허공을 날아갔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부웅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힘차게 날아가선,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하얀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아마 기절한 듯했다.

아까 이세연과 함께 돈 뿌리던 무리에 함께 있던 남자였다. 이세연을 대신해 나섰다가, 권이태한테 얻어맞고 뻗은 모양이었다.

과연 남자가 날아온 룸에서 권이태가 느적느적 걸어 나왔다. 가드가 뛰어오고, 사람들은 비명 지르고, 2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건만,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은 혼자 여유로웠다.

이세연이 뒤이어 룸에서 뛰쳐나왔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그녀가 권이태에게 고함을 질렀다. 꽝꽝 울리는 음악에 가려서, 래화가 있는 곳까지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세연은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면서 무어라 외쳐 댔다. 작은 체격의 여자가 울면서 바락바락하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이 전부 다 경악한 표정으로 권이태를 쓰레기 보듯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권이태는 미미한 동정조차 없이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감한 얼굴로 이세연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돌처럼 건조한 눈으로 응시하자, 이세연이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 위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세연은 멈칫하며 뒷걸음쳤다. 그리고 이세연과 반대로, 래화는 권이태를 향해 점차 다가갔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자꾸 왜 그러십니까, 이세연 씨.”

뻔한 사실을 언급하듯 단조로운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나 애미 애비 없는 새낀데……. 착각도 적당히 해야지.”

권이태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여전히 이세연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싸늘히 말했다.

“왜 같잖게 협박질을 할까……?”

***

이선우가 처음 임신 얘기를 꺼냈을 때, 이세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권이태랑 결혼은 하고 싶었다. 그의 뒤에 깔린 배경이 탐났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가지면 확실하게 이래화보다 위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임신이라니.

아무리 이래화를 짓누르고 싶어도 주춤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당황함이 걷히고, 침착하게 요모조모 생각해 보니 이선우가 옳았다.

권이태와 이래화 둘이서 서로 좋아 죽는 상황인데, 평범한 방법으로는 관계를 갈라놓기가 어려웠다. 권이태의 집안이 나서서 저를 선택하게 만들어야 했다.

핏줄에 눈 뒤집히는 집안이니, 이선우의 말처럼 애가 들어섰다고 하면 분명히…….

고민한 끝에 이세연은 결심을 마쳤다. 하지만 곧바로 이선우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그러겠다고 말할 순 없었다.

결심까지 고작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름 중대한 일인데 하루 만에 승낙하기에는 민망했다. 모른 척 새침하게 있자니, 이선우가 카드를 쥐여 줬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실컷 놀고 천천히 생각해.”

역시 입 다물고 있길 잘했다. 신난 이세연은 곧바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쫙 돌렸다.

[얘두라ㅠ.ㅠ 나 결혼할 듯ㅠ]

메시지 한 줄에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어쩌다 갑자기 결혼하게 됐냐, 언제 결혼하느냐 등등.

온갖 질문에 쏟아지는 가운데, 역시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어디의 누구랑 결혼하냐’는 것이었다.

[아직 말해 줄 순 없구……. 우리 집보다 좀 많이 대단하긴 행……. 나 쪼금 부담스러울 정도ㅠㅎㅎ]

은근하게 자랑을 흘려 준 다음, 이세연은 키득거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한다고 하니까 마음 이상해ㅠ.ㅠ]

그러자 다들 달라붙어서 우쭈쭈 어르고 달래 주었다.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뭔가 하고 싶다, 하면서 은근하게 돌려 말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친구가 클럽에서 파티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알앗엉! 다들 모엿! 내가 쏜당!!]

그리하여 아는 MD가 있다는 친구가 클럽을 예약했고, 오늘 다 같이 놀러 와서 펑펑 돈을 써 대는 중이었다. 이세연은 발긋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헤헤 웃었다.

진짜 재밌다…….

클럽에서 가장 비싼 세트를 시키니, 다들 저를 신처럼 받들었다. 제가 고른 음악을 틀어 주고, 폭죽과 샴페인을 터뜨려 주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납죽 엎드리는 이들 사이에서 잔뜩 기분이 들떴다. 이세연은 친구에게 카드를 주고 현금 서비스를 받아 오라 하고, 2층 난간에서 돈을 뿌리게 시키는 기행까지 저질렀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며 돈을 주웠다. 친구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층민들이 허우적거리는 꼴과 위에서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은혜를 베푸는 제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 애 하나 가지는 게 무슨 큰일이야.

지금이야 이선우 카드를 빌려서 놀지만, 권이태만 차지하면……. 그때는 이런 강남 클럽에서 노는 것 따윈 우습지도 않은 일이 될 터였다.

실컷 돈 뿌리고 놀다가, 룸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키득거리던 때였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들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데, 부서질 듯이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를 확인한 이세연은 앗, 하고 작은 소리를 내었다.

“아, 씨발…….”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남자는 권이태였다.

“이래화 아니잖아.”

가드들이 뒤늦게 쫓아와 권이태의 팔을 붙들려 했다. 그들을 툭 쳐낸 권이태가 짜증스럽게 눈매를 구겼다.

“그만해!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이세연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가드들을 만류했다. 술기운에 젖은 채 새삼스럽게 권이태를 살폈다. 어두운 클럽에서 어지러운 조명을 받으며 선 남자는 속이 찌릿해질 정도로 섹시했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태 씨.”

이런 우연한 만남이라니, 마치 앞으로 일이 잘 풀리리라는 조짐처럼 느껴졌다. 이세연은 저를 보는 남자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래화 찾아요? 내가 어딨는지 아는데. 알려 줄 테니까 저랑 잠깐만 얘기해요.”

하지만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과 다르게, 현실의 권이태는 어려웠다. 그는 들어주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나가버리려 했다. 권이태를 붙잡기 위해, 이세연은 재빠르게 외쳤다.

“래화는 아직 모르는 거죠?”

“…….”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미끼를 던졌다.

“이태 씨가 일원 그룹 아들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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