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권이태는 잠시 그대로 멈춰 서 있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세연의 폭탄 발언에 룸 안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일원? 그 일원?”
“아니, 일원에 우리 또래 아무도 없잖아.”
“일원이면 얼굴 한 번은 봤을 법한데. 완전 초면인데?”
“와……. 살벌하게 잘생기셨네.”
소란스럽게 떠드는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이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접 권이태에게 다가갔다.
“여기 좀 시끄럽죠. 룸 따로 잡아서 둘이 얘기하실래요?”
배시시 웃으며 제안했는데, 권이태는 말이 없었다. 길고 모양 좋은 입술을 가만히 닫고 있다가, 이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세연 씨가 사람 말을 아주 좆같이 흘려듣네.”
“……네?”
“아니라고 하는데 믿지도 않고.”
살면서 육성으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믿기지 않는 수모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친구들 쪽을 확인했다. 다행히 술도 취했고,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바빠서 못 들은 것 같았다.
이세연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취기 덕분인지 평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오기가 생겼다.
“이태 씨야말로 어째서 계속 거짓말하시는 거죠?”
“하아.”
권이태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저번부터 계속 신경 거슬리게 굴어 대는 거, 지금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
“말해 봐요. 하자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더 귀찮게 굴지 맙시다.”
이세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원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래화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일원 그룹의 안주인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솔직하게 말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무어라 말해야 가장 좋을까 고민하다가, 제법 그럴듯한 제안을 떠올렸다.
“다음에 단둘이 조용한 곳에서 한 번만 만나 주세요. 그때 말씀드릴게요.”
말해 놓고 나서 속으로 이거다 싶었다. 임신을 위해 이선우가 어떤 수단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권이태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긴 해야 할 터였다.
오늘 제가 권이태에게서 만날 약속을 받아 내서 이선우에게 갖다 주면, 그도 일을 꾸미기가 훨씬 수월하리라.
이세연은 자신의 똑똑함을 속으로 찬양했다. 그러나 훌륭한 계획은 곧바로 무너졌다.
“곤란한데.”
권이태는 턱 끝을 한 번 까딱이며 간단히 거절했다.
“나 유부남이라서.”
“아, 아니…….”
이세연의 얼굴이 민망함에 빨개졌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친구 한 명이 비틀거리며 권이태에게 다가왔다.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친구였다. 그는 무섭지도 않은지, 권이태의 팔뚝을 툭 치며 웃었다.
“와, 뭘 그렇게 비싸게 구냐. 적당히 받아 주지.”
“…….”
권이태는 그냥 흘긋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근데 진짜 일원 맞아? 거기 아들 죽었잖아. 양자 들였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남자는 권이태를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과장스럽게 한숨 쉬는 흉내를 냈다.
“우리 순진한 세연이가 양아치한테 속은 거 아냐?”
이세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가뜩이나 권이태가 아니라고 우겨 대는데, 주변에서 이런 식으로 굴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었다. 그냥 싹 다 쫓아내고, 권이태랑 얘기나 좀 더 해 보는 게 낫겠다고 결심하던 때였다. 술에 취한 친구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문신도 했잖아. 설마 일원 상징이 용이라고 용 문신?”
옛날에 일원 상징이 용 아니었냐며, 촌스럽다고 낄낄대던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어어……. 가까이서 보니까 뱀이네.”
그가 문신을 만져 보려 했다. 권이태는 간단히 손을 피하며 말했다.
“손대지 말지?”
가벼운 어조로 툭 던졌지만, 결코 무시해선 안 될 경고였다. 이세연은 얄팍하게나마 친구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 마. 그리고 진짜 일원 맞아.”
친구들 앞에서 너무 무시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도 덧붙여 버렸다.
“지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비밀로 하시는 거야.”
“사정? 무슨 사정. 씨발, 사기꾼 아냐? 존나 딱 봐도 사짜 관상인데.”
그의 말을 따라 다른 친구들도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 세연아. 저 사람 이상하잖아!”
“네가 순진하고 멋모르는 거 같으니까 이 새끼가 털어먹는 거 아냐?”
“너 우리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이세연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얘들아, 잠깐만……!”
그러나 술 취한 사람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아까 돈 뿌리고 놀면서 고양된 감정이 그들을 좀 더 용감하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사기꾼 아니냐고 했던 남자가 권이태를 툭툭 쳐 댔다.
“일원 그룹 도련님,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죠.”
그는 저보다 한 뼘은 키가 큰 권이태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손날을 세워 권이태의 목덜미를 치려고 했다.
“도련님이 이런 좆같은 뱀 문신 달고, 강남 클럽까지……, 억!”
권이태는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았고, 남자의 복부에 주먹부터 꽂아 넣었다.
***
“왜 같잖게 협박질을 할까……?”
권이태가 이세연을 내려다보며 싸늘히 뇌까렸다. 그 모습에 래화는 몸에서 피가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일이 제대로 꼬이고 있었다. 권이태가 여기서 더한 사고를 치기 전에 말려야 했다.
권이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데, 누군가 래화의 팔을 붙잡았다. 같이 2층으로 올라온 대산이었다.
그는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을 큼직하게 써 붙여 놓은 얼굴로 말했다.
“위, 위험해요.”
뭘 그렇게 긴장했는지,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래화를 잡아당겼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시는 게…….”
래화는 눈을 깜빡이다가, 갑자기 새삼스럽게 남자를 살폈다.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 떨리는 목소리. 창백해진 얼굴. 확장된 동공.
빤히 쳐다보며 하나하나 짚어 가는 찰나, 불현듯 깨달았다.
이게 화난 권이태를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내보이는 반응이구나.
비상식적인 폭력을 목격했을 때, 보통은 이런 반응이 옳았다. 두려워해야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래화는 이상할 만큼 그에게 담담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권이태가 총을 꺼내 일하는 카페를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를 피하기는커녕, 심지어 나란히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단순히 이정환이 무서워서, 권이태는 별것 아니게 느껴지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래화는 이질감을 정확하게 지각했다.
단 한 번도, 권이태가 자신을 해할까 봐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가 드러내는 폭력성에 매료되고, 자극받을 뿐이었다.
그의 폭력성이 래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서…….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래화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뚜렷하게 말했다.
“저 사람, 제 남편이에요.”
래화를 붙들고 있던 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저 새끼가요? 라는 말이 생략된 듯한 되물음이었다. 래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래화의 목소리가 흘러 나간 순간, 권이태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정확히 래화를 보았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시선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시끄럽고, 사람으로 북적이고, 어둡고 정신없는 곳인데…….
권이태와 단둘이 남은 것처럼.
짧은 마법은 금세 깨어졌다. 래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난장판이 된 클럽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권이태는 곧바로 래화를 향해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를 바라보던 래화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던 메이가 보이지 않았다.
래화를 놔두고 도망간 것이다…….
사라진 메이를 찾아 두리번대는 사이, 권이태는 어느새 래화의 앞에 섰다. 그는 아직까지도 래화의 팔뚝을 붙잡고 있던 대산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있던 대산은 그의 시선을 느끼곤 멍청히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화드득 놀래며 손을 놓았다.
마침내 가까이에서 권이태와 마주 보게 되었다. 검은 눈동자가 유달리 새까맸다. 래화 앞이라서 억지로 화를 눌러 참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눈이었다.
권이태가 나직하게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자기야.”
커다란 손이 래화의 팔뚝을 붙잡아 끌었다. 정확히 방금 대산이 붙들었던 부분이었다.
“혼인 신고서 도장도 덜 말랐는데.”
권이태는 래화가 제 허리를 감아 안도록 만들고선 나직하게,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이 충분히 들을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바람피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