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스르륵 허리를 끌어안은 자세가 되었다.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던 래화는 슬쩍 권이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말짱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광인의 것이었다.
메이가 도망간 이유를 알 듯했다. 아마 권이태보다 먼저 클럽에 들어와서 래화를 찾아다녔을 최정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동일하리라.
사실 래화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래화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피부에 닿는 몸이 뜨거웠다. 방금까지 주먹을 휘두르고, 이세연에게 비아냥거리던 권이태를 떠올렸다.
대강의 상황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이세연이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가 분노를 억눌러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래화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권이태가 눈동자만 움직여 맞잡은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일단 어떻게든 화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바람피우는 거 아니고. 전혀 모르는 사이야.”
“그런데 왜 다정하게 팔짱 끼고 있었어?”
설마 팔뚝 붙잡힌 걸 보고 하는 소리일까. 권이태의 시력을 의심하며 되물었다.
“너 안경 써야 하는 거 아냐? 팔짱은 무슨…….”
진지하게 시력 검사 받아 보자고 하니, 그가 피식 웃었다. 약간 풀어진 기색에 래화도 마음을 놓으려던 차였다.
“후회할 거예요!”
이세연이 소리 질렀다. 권이태와 래화는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이세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재차 말했다.
“이태 씨, 나한테 이렇게, 굴었던 거, 흑,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요……!”
그러나 권이태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든 별 관심이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악에 받쳐 울던 그녀가 갑자기 래화를 홱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래화에게 원망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래화 너, 두고 봐,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 이제 곧 끝일 테니까……!”
이세연의 발악에 권이태가 하, 짧은 헛웃음을 치더니 옆에 놓인 테이블을 걷어찼다. 깔끔한 발차기에 테이블이 날아가고, 술병과 그릇들이 와장창 요란하게 깨어졌다.
“이세연 씨.”
권이태는 이세연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내가 진짜 협박이 뭔지 보여 줘?”
대체 이세연은 왜 자꾸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다 정말 살인이라도 날 판이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서 이세연을 죽이면 곤란했다. 뭐라도 해야 된다는 의무감에 황급히 권이태를 불렀다.
“권이태.”
그러나 권이태는 이세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래화는 다시금 그를 불러 보았다.
“이태야.”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을 부르니 이번엔 재깍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사납기 짝이 없던 눈동자가 래화에게 닿는 순간 누그러졌다.
맹수를 길들이는 심정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권이태는 손길을 따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날씬한 뺨을 가만가만 쓸면서 속삭였다.
“이제 가자.”
“어디로.”
“우리 집.”
권이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낯설어하는 것 같기도, 혹은 약간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래화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가 아주 느리게 대답했다.
“……으응.”
그러더니 슬쩍 래화에게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집으로 가야지…….”
꼭 래화가 그 말을 해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
클럽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은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되었다. 권이태 쪽에서 손을 쓴 건 아니고, 강미옥이 직접 나서서 뒷정리를 한 것 같았다.
이세연이 클럽에서 워낙 별 희한한 짓을 다 했다 보니, 일이 커져서 좋을 게 없는 탓이었다. 덕분에 래화도 크게 신경 쓸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래화는 권이태에게 사과했다. 짓궂은 장난이 본의 아니게 너무 위험해져 버렸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니 권이태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뭐어, 근데 사과할 정도까진 아니고…….”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그는 으음, 하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필요 이상으로 화낸 거 같기도 한데.”
“이세연 때문에 그런 거잖아. 이해해.”
“……이세연?”
그는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마치 이세연 때문에 제가 화난 게 맞는지 고민하듯이…….
하지만 생각의 결과를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대신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한마디할 뿐이었다.
“불륜 금지야, 자기.”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클럽에서 도망친 최정과 메이는 다음날 슬쩍 집으로 돌아왔다. 둘 다 기가 팍 죽은 것이, 권이태한테 제대로 깨진 듯했다.
“도망가서 죄송합니다……. 태이가 화낼 거 같으면 습관적으로 도망을 가게 되네요…….”
혼자 도망갔던 메이는 조용히 래화 앞에 와서 싹싹 빌었다. 래화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용서해 주었다. 용서를 받아 낸 메이가 금세 기운을 차리곤 조잘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요. 와아, 클럽에서 기관총 쏘는 줄. 래화 씨 덕분에 재밌는 구경 했어요.”
“나 덕분은 아니에요. 물론 내 잘못도 조금은 있지만……. 내 사촌이 화나게 만든 것 같더라고요.”
“아하.”
래화가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주자, 메이는 왠지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재밌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뭐가 재밌는진 모르겠지만, 메이가 즐거워하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팀원이자, 데저트의 대표인 슈미트를 만나게 되었다.
죄인 최정과 메이는 어디론가 강제 노역을 떠난지라, 권이태를 포함해 셋이서만 만난 자리였다.
펜트하우스의 응접실 소파에 반듯하게 앉은 중년의 외국인은 무척 세련되면서도 까다로운 느낌이었다. 규칙에 엄격할 것 같은 이 남자와 무질서의 끝을 달리는 권이태가 서로 신뢰 관계라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슈미트는 깍듯하게 인사하며 래화에게 명함을 건넸다.
“데저트의 대표, 슈미트입니다.”
여태 만난 데저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면서도 얌전한 첫인사였다. 래화는 마주 인사하며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명함을 살피던 래화는 의아해졌다. 이름이 간단하게 ‘Schmidt’라고만 쓰인 탓이었다.
혹시 뒤에 본명이 적혀 있나 싶어서 명함을 뒤집어 보자, 권이태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아무도 본명 안 불러서 명함에도 슈미트라고 적어 놨어. 그리고 본명은 귀족 이름이었나 그래서……. 이쪽 업계랑은 좀 안 어울리니까.”
“네. 래화 님도 편하게 슈미트라 호칭해 주시길.”
슈미트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래화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 넷이서 실패한 의뢰는 없으니까요. 단 한 명을 경호하는 의뢰는 최초이긴 하지만요.”
수십, 수백의 군인을 상대하던 이들이었다. 평화로운 휴전 국가에 와서 부잣집 아가씨 지키는 일은 확실히 낯설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불러 모은 사람은 권이태였다. 래화는 20억이라는 의뢰금을 약속한 죄밖에 없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기왕이면 잘 지내보고 싶은 마음에, 래화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슈미트는 바로 손을 맞잡지 않고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는 천천히 래화의 손을 맞잡았다. 가볍게 악수한 뒤, 슈미트가 중얼거렸다.
“약간 의외군요.”
뭐가 의외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곧장 사과했다.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슈미트와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서로 길게 대화할 이유도 딱히 없으니, 권이태와 둘이서 업무 얘기를 하라고 응접실에 놓아두고 래화는 화실에 들어왔다.
여전히 밑 색만 칠해진 초라한 캔버스가 가장 먼저 보였다.
답이 나오질 않아 덮어 두기만 했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바뀌어 갑작스럽게 이런 자신감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큼은 의심할 바 없이 선명했다.
래화는 붓을 들었다.
***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래화는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카페 일과 약간의 운동, 요리,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일과를 반복했다.
정말 슈미트의 말처럼, 4명이 모이고 나서부터 아주 작은 잡음조차 사라졌다. 가끔 권이태가 옆에서 치대거나, 공연한 시비를 걸어 오는 걸 제하면 따분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덕분에 래화는 아무 걱정 없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에 그리기 시작했던 유화는 완성하지 않고 관두었다. 캔버스가 너무 작아서 새롭게 구상한 부분을 표현할 수 없는 탓이었다.
40호 캔버스를 사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은 놀랄 만큼 순조로웠다. 기존에 했던 구상에서 좀 더 살을 붙여 스케치를 넣고 밑 색도 금방 끝냈다.
어제부터는 본격적인 채색을 시작했다. 다만 색 조합이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 오늘 하루는 물감 배합으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이따가 저녁도 먹고…….
래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근래 저에게 밥을 차려 주겠다고 설치는 권이태 때문이었다.
요리에 재미를 붙인 모양인지, 툭 하면 부엌에서 뭘 만들어 댔다. 의외로 손재주가 있어서 대부분 성공했지만,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괴작을 만들었다.
그러고도 원래 이러면서 실력이 느는 거라며 당당히 래화에게 먹이려 들었다. 그래도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닌지라, 래화는 순순히 그의 괴작을 나눠 먹었다.
권이태가 오늘은 무슨 음식을 만들어 줄지, 요리의 흥망 여부를 궁금해하며 화실로 향했다.
권이태는 잠시 팀원들과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한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물감 배합을 끝내 둘 생각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물감들을 줄줄이 꺼냈다. 팔레트를 세 개 정도 늘어놓고, 팔레트 나이프도 꺼내던 때였다.
탁자에 얹어 둔 핸드폰이 드륵드륵 시끄럽게 진동했다. 권이태가 메시지를 보낸 듯했다. 래화는 기분좋게 핸드폰을 집었다.
하지만 메시지의 주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이였다.
[래화야.]
[너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아빠뿐이라는 사실, 항상 유념하거라.]
[오늘 방송 나갈 거다. 확인하고 연락하렴. 기다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