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갑작스럽게 무슨 소리일까.
번호를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문자를 보내는 일 정도는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문자가 불길했다.
평화롭기만 하던 오후의 화실이 느닷없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정환이 보낸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이선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일전에 카페에서 좋지 않게 헤어진 후, 이선우에게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물론 하나도 받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연락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받아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선우가 소리를 질렀다.
-래화야!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래화야, 괜찮아?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래화는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무슨 일이야?”
-아……. 아직 방송 못 본 거지?
“방송?”
-하아, 래화야…….
이선우가 잠시 침묵했다가, 무겁게 내리 깐 목소리로 당부했다.
-당분간 TV 보지 말고, 인터넷도 들어가지 말고……. 외출도…….
이선우의 말을 들으며 TV를 켰다. 마치 래화를 기다렸던 것처럼, 방송 프로그램이 딱 켜졌다. 좌상단에 적힌 프로그램 제목이 보였다.
<비운의 천재 화가 류설연, 그녀의 삶과 죽음 - 사후 10주년 기념 다큐>
래화는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류설연 딸이, 똑같이 흉내 내서 그렸다고.”
“그러니까 말씀을 정리하자면.”
“쉽게 말해서 류설연의 그림체를 베껴서 그린 거죠.”
***
“씨발!”
메이가 욕설을 뱉었다. 한국어 욕으로도 모자라서, 온갖 태국 욕을 다 뱉으며 커다란 벽걸이 TV 앞을 서성거렸다.
TV에서는 류설연의 사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중이었다.
류설연이 죽기 전에 워낙 신드롬급으로 인기를 끌었고, 그녀의 작품들도 여전히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중이니 충분히 제작될 만한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그림이나 예술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이 그림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여름 햇빛 아래」입니다. 여름 햇빛의 강렬함을 고스란히 살려 낸 붓 터치와 도발적인 색의 사용, 뛰어난 표현력으로 소더비 경매에서…….”
“「여름 햇빛 아래」를 그려 냈을 당시, 류설연은 오랜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름 햇빛을 계기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여…….”
“그러나 슬럼프를 이겨 내고 마침내 가장 높이 날아오른 순간, 그녀는 돌연히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녀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파헤쳐 보려 합니다.”
류설연의 작품과 일생을 짚어 나가는 듯하던 다큐는 난데없이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에 이래화가 엮였다는 것이었다.
“류설연의 딸, 이래화 씨가 어머니와 화풍이 똑같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동일한 화풍 때문에 모녀간의 다툼이 잦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류설연의 자살 당일, 그녀의 시체는 딸과 함께 발견…….”
“이래화 씨는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2년간의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료 화면이라는 표시와 함께, TV 화면 가득히 이래화의 사진이 모자이크 하나 없이 떠올랐다. 새하얀 얼굴을 하고서, 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얼굴을 옆으로 틀고 있긴 하지만, 지나가다 마주치면 다 알아볼 수준이었다.
“천재의 의문스러운 죽음. 과연 그녀의 죽음은 정말로 자살이었을까요?”
의미심장한 멘트와 함께 다큐는 끝이 났고, 메이는 쾅쾅 책상을 내려쳤다.
“저 미친놈들! 이름에 사진까지 까 버리다니……!”
이정환이 개입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산 건설 외동딸 이름과 얼굴을 죄다 방송에 까 버릴 리가 없었다. 메이는 초조하게 노트북과 태블릿 PC, 데스크톱을 바쁘게 오갔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해킹으로 몰래 서버에 잠입해서 정보 훔쳐 내는 건 해 봤어도, 방송이나 언론 쪽을 상대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심지어 방송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류설연의 딸’에 대해서 제각기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빠는 대산 건설 엄마는 류설연? 돌았네. 이건 금수저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란 거 아니냐.
└금 채굴기
└미친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맞는 말임. 지금 류설연 그림 부르는 게 값인데. 개 부럽네 씨발]
[아니 화풍 비슷한 거부터 해서 엄마 죽었을 때 같이 발견된 거…… 솔직히 저거 좀 이상한?ㅋㅋ 안 그래도 류설연 자살 아닐 거라는 말도 많았잖아. 지가 엄마 실력 못 따라가니까 답답해서 홧김에…… 한 거 아님?
└와씨 지금 소름 쫙ㄷㄷ
└아무리 그래도 이 댓은 너무 간 듯.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고인 능욕하는 궁예질 작작해라.]
[류설연 죽었을 때 울 아빠가 류설연 딸 불쌍하다고 막 동정하고 그랬었는데……. 지 엄마 그림 베꼈다니까 좀 많이 깬다ㅠㅠ 돈도 많으면서 왜 저랬대ㅠ]
[고 류설연 화백 젊은 시절이랑 똑 닮은 미인으로 잘 자랐네요. 젊고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가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습니다.]
[류설연 죽기 직전 내놓은 꽃 그림 기억하는 사람? 거기서 갑자기 실력 확 떨어졌다고 말 많았는데 그거를 이래화가 그린 건가?
└가능성 있음. 화풍 따라 한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니까ㅇㅇ…….
└기억남ㄷㄷㄷ 그거 완전 거의 류설연 초창기 느낌?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음.
└이래화가 그린 거 맞는 듯 글고 류설연한테 협박한 듯 엄마 이름으로 발표하라고]
[정신병원ㅋㅋ 하여간 돈 많은 집 애새끼들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걸 못 봤음. 아니 돈도 많고 인생도 탄탄대로일 새끼들이 뭐가 아쉬움? 내 인생이랑 바꿔라ㅋㅋ]
[ㅎㅎ재벌 2세들 예에술 할 거라고 나대는 거 존나 꼴 보기 싫은 거 나뿐?
└솔직히 말이 정신병원이지 우울증 있다고 구라 치고 처방받은 거 부풀려서 말한 거 아님?
└컨셉도 저 정도면 병
└병이니까 병원 갔지ㅋㅋㅋㅋ]
[근데 솔직히 존나…… 이쁘긴 하다
└ㄹㅇ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듯. 걍 그림 관두고 스크린 데뷔하면 여배우 원탑 찍을 거 같은데
└와 아직도 성형이랑 자연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네ㅋㅋ 쟤 집이 얼마나 잘사는데 얼굴 당연 갈아 엎었지ㅋㅋㅋㅋ 그리고 일반인치고 쫌 예쁜 거지 절대 연예인 수준은 아님ㅋ 실물로 보면 완전 다를 듯]
[강남 클럽에서 대산 외동딸이 돈 뿌린 일 유명하죠. 주말마다 클럽 출근하는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깁니다.]
[나 이래화 대학 동창인데 쟤 문제 많았음. 거만함 쩔어서 서민들이 말 걸면 무시함ㅋㅋ 과 행사도 죄다 불참. 과 사람들이랑 술 한번 안 마심. 싸가지 없다고 유우명~~ 그리고 남자관계도 졸라 복잡~~~
└저 얼굴이면 남자관계 안 복잡한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아니 이분 우리 집 앞 카페에서 알바하셨던 님인데……?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 짖는 소리임? 대산 외동딸이 카페 알바를 왜 해ㅋㅋㅋㅋ]
그들에게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티끌 같았던 한마디 한마디가 순식간에 거대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몰아치는 상황에 메이는 망연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태이! 어떡해? 이거, 어떡해?”
메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울먹이듯 말했다.
“플러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아…….”
이런 류의 방송이 흔히 그렇듯, 절대 단정 지어 이야기하진 않았다. 다만 의도적으로 내용을 배치해, 시청자가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하도록 만들 뿐이었다.
마치 이래화가 류설연의 그림을 베끼다 못해, 정신병에 걸려 류설연의 죽음에 관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 이름까지 공개됐다.
여태 이래화를 언론에서 지켜 주었던 이정환이 되레 그녀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혹독한 교훈을 준 것이다.
이제 카페 일은커녕, 당분간은 바깥 외출조차 어려울 터였다. 심지어 외모도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특징적이니, 어쩌면 향후 몇 년간은 시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뭐 하면 되지? 방송국 테러할까? 아닌데, 연예인 찌라시? 아냐, 이런 걸로는…….”
물밀듯이 올라오는 기사부터 막아 봐야 하는데, 그건 메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메이에게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
“어, 어…….”
-슈미트랑 제이 불러. 3분 뒤에 회의 시작할 거니까.
“왜 3분 뒤야? 지금 해!”
-기사 막아야지.
권이태는 기묘할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해결 볼 테니까, 일단 두 사람 모아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