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60화 (60/132)

60화

래화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약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을 꾸는 듯 멍했다. 이선우의 전화를 끊고, ‘류설연 사후 십 주년 기념 다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그 다음에는 핸드폰으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기사와 댓글을 읽어 보았다. 남의 일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전부 꼼꼼하게 읽었다.

그리고 이정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먼저 전화하는구나, 래화야.

여유로운 목소리가 희미한 잡음과 섞여 들려왔다. 골프를 치는 중인지, 공을 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가로운 오후의 라운딩을 즐기는 그에게 래화는 나직이 질문했다.

“회장님이 하신 거죠?”

-그래.

전 국민에게 이래화가 류설연의 모방 작가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얼굴까지 노출되었으니, 이제 래화는 무엇을 그리든 류설연의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왜 그랬냐고 묻진 않았다. 이정환은 래화에게 줄곧 경고해 왔다.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엄마를 흉내 내며 그림을 그려 온 건 래화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하셔도, 제가 집에 안 돌아가겠다고 하면요?”

-그때는 다른 방법을 또 생각해 보겠지.

이정환이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정한 아빠가 추억을 되짚기라도 하듯 말했다.

-돌이켜 보면 래화 너는 항상 제멋대로였던 것 같구나. 그림도, 결혼도. 권 서방은 잘 지내고 있지?

“…….”

굳이 권이태를 꼭 집어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다음번에는 그를 건드리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오늘의 래화처럼, 이정환이 온 세상에 권이태에 대해 퍼뜨린다면…….

아마 바깥에서 일상생활도 못 하도록, 권이태에게 원치 않는 유명세를 떠안겨줄 터였다. 그가 저지른 불법적인 일들을 엮어다가 흉악범으로 만들어 방송할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어쩌면 데저트까지 건드릴지도 몰랐다.

래화는 한참 침묵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가 일시에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하여도 결론은 똑같았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회장님.”

-그래, 래화야.

지루한 정적에도 끈덕지게 기다리고 있던 이정환이 즐겁게 답했다. 래화는 입술을 움직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꺼냈다.

“오늘 들어갈게요. 같이 저녁 식사해요.”

-좋지. 아빠도 일찍 들어가마. 네가 좋아하는 음식 해 놓으라고 말해놔야겠구나.

“네. 이따 뵈어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쥐고 멍하니 있다가, 홀린 듯 화실로 향했다.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미완성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유화 물감 특유의 기름 냄새 따위를 맡으며 한참 있다가, 팔레트 나이프를 쥐고 캔버스 앞에 섰다. 마지막 미련마저 완전히 잘라낼 생각이었다.

래화는 미완성의 그림에 나이프를 박았다.

캔버스 천에 나이프를 박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나이프를 내리그었다. 캔버스 천이 찢어지는 소리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각선으로 찢어져 너덜너덜하게 늘어진 캔버스의 모습이 추했다.

어차피 재능도 없었다. 모방작밖에 못 그려 내는 가짜 화가.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 정신적으로 힘든 일도 없을 테니 더 좋아질 것이다.

물감 냄새를 너무 오래 맡았는지 머리가 아팠다. 나이프를 내려놓고 화실을 빠져나와 백팩을 꺼냈다.

들어올 때는 빈 몸이었는데, 떠나려 하니 그새 챙길 짐이 많아졌다. 가져가고 싶어서 욕심나는 것들이 많았지만,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겼다.

그런데도 백팩이 금방 꽉 차 버렸다.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사실 알고 있다. 그냥 다 두고 가는 게 옳다는 것을. 래화는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빈 몸으로 방을 나섰다. 하지만 아직 하나 더 두고 가야 할 것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래화는 결혼반지를 벗어서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촘촘하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실내의 희미한 빛만으로도 영롱히 반짝였다. 역시 가짜 결혼에 쓰기엔 너무 아까운 웨딩링이었다.

래화는 반지를 보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얼마 울리지 않았다.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고, 래화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용건을 말했다.

“계약 종료하자.”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짧게 헛웃음 치며 되물었다.

-……뭐?

“오늘부로 계약 종료해.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거니까 돈 돌려줄 필요 없고, 잔금 10억도 바로 입금할게.”

-이래화.

“그동안 고마웠어.”

-너 지금 어디 가는데. 반지도 벗어 놓고.

집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권이태는 핸드폰으로 집 내부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렌즈를 통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심장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작은 통증은 점차 커져서, 이내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이 되었다. 그래도 죽을 정도로 아프진 않아 버틸 만했다. 래화는 담담히 대답했다.

“회장님한테. 이제 본가로 돌아가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 있어.

그의 말을 무시하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는 찰나, 현관문에서 철컥철컥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지막으로 삐리릭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래화는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아무리 당겨도 반응이 없었다. 도어락이 완전히 먹통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열어.”

-싫어.

“신고할 거야.”

-해 보시든지.

“……권이태.”

-신고하면 지금 대한민국 최고 화제인 이래화 여기 있다고 기자들한테 뿌려 줄게. 사람 몰려서 어차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겠네.

“왜 이래.”

래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뻐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호흡이 힘들었다. 손으로 마른 얼굴을 한 번 쓸고서 차분히 말했다.

“상황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계약 종료하자는 이유가 뭔데.

래화는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도록 움켜쥐고 소리 질렀다.

“네가 나 못 지켜 주니까!”

-…….

“너도 알지? 나 지금 전 국민한테 정신병자 됐어. 내가 집에 안 들어간다고 하면, 회장님 이거보다 더한 짓 하실 거야. 이 상황에서 네가 싫다고 하는 거, 우스운 일 아니야? 돈 준다고 할 때 얌전히 받고 꺼져.”

피맺힌 말을 쏟아 내고서 헐떡거렸다. 래화는 덜덜 떠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힘껏 주먹을 쥐었다.

수화기 너머에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서 숨이 막혔다. 권이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그가 심한 욕설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단단한 각오가 부질없게도, 권이태는 되물을 뿐이었다.

-누가 그래?

래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사이, 그가 재차 질문했다.

-누가 그러냐고. 내가 너 못 지켜 준다고.

“…….”

-지금 당장 집 갈 테니까 기다려. 너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 봐.

협박하듯 위협적으로 말했으나, 전화를 끊기 전에, 그는 작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제발.

전화가 끊어졌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서, 래화는 그대로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닥에 앉은 채, 굳게 닫힌 현관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전화를 끊기 전에 덧붙인 작은 속삭임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래화를 욕하고 비난하는 대신, 애원하고 달래는 속삭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래화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이래화.”

래화는 입술을 벌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툭, 툭, 계속 떨어졌다. 가늘게 경련하는 손으로 고장 난 듯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강 훔쳐냈다.

추한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엉망으로 망가진 채, 그에게 여태껏 거짓으로 숨겼던 사실을 고백했다.

“나 정상 아니야.”

유일하게 저를 정상으로 봐줬던 사람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혀가 따끔하고 아렸다.

“정신병자 맞아. 미친년이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내뱉어도 전부 받아 주겠다는 듯 그냥 가만히 듣기만 했다.

“조금만 힘들어지면 환청이 들려.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나쁜 악몽도 꾸고. 그래도 계속 정상인 척했어. 정신병원 또 들어가기 싫어서. 엄마처럼 목매달고 죽을 거라고 손가락질받기 싫어서.”

“…….”

“그런데 여태까지 왜 아득바득 버텼는지 모르겠어. 진즉 엄마처럼 죽었어야 했는데. 화실에서 목매달고 죽었으면 다들 기뻐했을 텐데. 아빠도, 이세연도, 사람들도…….”

묵묵하게 듣기만 하던 이가 처음으로 눈매를 구겼다. 할 말 많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고 기다렸다. 래화는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태야.”

“……왜.”

“근데 나 죽는 거 무서워. 살고 싶어.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고…….”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 래화는 그에게 가장 밑바닥을 내보였다.

“그리고 사실 나…… 꽃 좋아해. 진짜 엄청 좋아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울먹이느라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추한 고백을 끝까지 들어 준 남자는 가만히 래화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래화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래화…….”

따뜻한 체온이 좋아서 눈을 감았다. 맺힌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아, 씨발, 래화야, 이래화.”

권이태는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한번 쓸어넘겼다가, 래화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 눈가를 살며시 닦아 냈다.

“울지 마. 제발, 응?”

그렇지만 닦아낼수록 눈물은 더 많이 나오기만 했다.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자꾸만 울고 싶었다.

래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의 남자는 머뭇거리며 다시 래화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그만 울어. 나는…….”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