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61화 (61/132)

61화

그가 건네는 위로는 결코 세련되지 못했다. 거칠기 짝이 없어서, 누군가에게는 위로보다 되레 상처가 될지도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래화에게는 세상 어떤 위로보다도 부드러웠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서투르게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이 좋았다.

래화는 울음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권이태는 느릿하게 래화를 안아 주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처럼, 힘이 다 빠진 손길로 조심조심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따금 뺨을 문질러 가며, 눈물로 권이태의 옷을 축축하게 만들어 버렸다.

둘이서 현관문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북받치던 감정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래화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래화가 기대기 편하게 꼼짝하지 않고 굳어 있던 권이태는 묵묵히 시선을 마주쳐 왔다.

말없이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그에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작은 살이 맞닿는 순간, 래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에 흠뻑 젖은 키스는 축축하고 짭짤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키스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상황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래화를 가만가만 핥아 주었다.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듯,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했다.

영원히 이어질 듯했던 키스를 끝낸 건 래화였다. 래화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하지만 곧바로 권이태가 다시 입술을 붙여 오는 바람에, 재차 키스해야 했다.

권이태는 래화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래화는 살짝 얼얼한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는 말없이 제 옷자락을 끌어다가, 래화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슥슥 닦아 주었다. 래화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울고 소리 지르느라 어느새 목이 다 쉬었다. 갈라진 목소리에 권이태가 눈매를 찡그렸다.

“뭐가 미안한데.”

“아까 심한 말 해서…….”

“심한 말?”

“꺼지라고 하고.”

래화의 웅얼거림에 권이태가 짧게 웃었다.

“꺼지라는 게 뭐가 심한데. 너 그거보다 더 못된 말 했잖아.”

내가 꺼지라는 말보다 심한 욕을 했다고?

래화는 놀라서 눈이 커졌다. 감정적으로 과하게 흥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꺼지라는 말 이상으로 욕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다급히 방금 상황을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래화가 당황하는 모습을 충분히 즐긴 후에야 권이태는 정답을 알려 주었다.

“내가 너 못 지켜 준다고 한 말.”

“…….”

“존나 심한 말이지. 나 자존심에 상처 입었어, 자기야.”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겨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입가에 떠오른 작은 미소에 권이태가 따라서 씩 웃었다.

그는 래화를 훌쩍 안아 들더니 거실 소파에 앉고, 래화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래화는 포개지듯 그에게 안겼다.

소파에 앉고 나서야 현관문 바닥이 불편했음을 깨달았다. 권이태에게 완전히 몸을 기대어 안기니 소름 돋을 만큼 편안했다.

저도 모르게 이불 속에 파고들듯 꿈지럭거리는데, 권이태가 어깨를 밀어 냈다. 그는 검지와 엄지로 래화의 결혼반지를 붙들고 있었다.

“반지 왜 함부로 빼? 이거부터 다시 껴.”

하지만 래화는 선뜻 왼손을 내밀지 못했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권이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말을 잇기 힘들었다. 목구멍이 저절로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래화는 기어코 말해 버렸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권이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래화의 허리에 팔을 둘러 놓고, 다른 손으로는 결혼반지를 만지작만지작 굴렸다.

그러다가 그는 제 새끼손가락에 래화의 반지를 끼웠다. 사이즈가 안 맞으니 다 들어가지 못하고, 손가락 마디에 걸쳐졌다.

“래화야.”

래화의 새끼손가락을 끌어다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걸었다. 꼬마 아이들이 약속하는 듯한 손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말했다.

“나 의뢰 받은 거 실패한 적 없어. 지켜 준다고 약속했잖아. 해결할 테니까 기다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네가 나 지켜 줄 거 알아. 아는데…….”

래화는 살며시 손가락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권이태가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면?”

“……회장님이 너도 나처럼 만들어 버릴 거야.”

앞뒤가 다 잘린 말이었으나, 권이태는 래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계약이 이어진다면, 권이태 또한 오늘 래화가 당했듯이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해체당하리라.

“네가 그렇게 되는 거 싫어. 나도 너 지켜 주고 싶어.”

여태껏 래화는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얼기설기 이어 붙인 정신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니, 그걸 보살피느라 남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래화의 좁은 세계는 오직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어차피 주변에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도 없으니, 여태껏 그렇게 홀로 살아왔다. 그게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졌는데…….

권이태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남에게 관심이 생겼다. 관심이 생기다 못해 끊임없이 신경 쓰여서 거슬릴 정도였다.

그러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힘겨울 만큼 그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가 주는 자극이 두려워서 피하고 도망칠 정도였다.

그때 멈췄으면 좋았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꼈을 때 관계를 잘라 냈더라면, 오늘 같은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이제 그는 지켜 주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저를 지켜 주듯, 래화는 권이태를 지켜 주고 싶었다.

가장 단단한 쇠를 불길에 담금질하여 만든 듯한 남자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그에 비하면 민들레 씨앗만도 못한 래화가 하기에는 조금 가소로운 생각이지만, 진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래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었다.

“계약 끝내자. 지금까지 고마웠어.”

권이태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웃었다.

“와…….”

시원하게 찢어지는 입매는 래화의 심각했던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담았다.

“누가 나 지켜 준다고 하는 거 처음이야.”

귀엽고 기특하단 듯이 보는 시선에는 진지함이 하나도 없었다. 남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래화는 결국 발끈했다.

“진짜 심각한 상황인데 자꾸……. 너도 TV 한번 나와 볼래?”

“으응, 자기는 다큐였지? 난 9시 뉴스에 나오겠네.”

헤드라인 올라가 보고 싶었다며, 머그샷 찍으면 재밌겠다고 헛소리를 살살 해 댔다. 래화는 그를 노려보다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권이태…….”

“응, 자기야.”

“이태야.”

“…….”

“고집부리지 마. 회장님 정말 한다면 하시는 분이야.”

“나도 한다면 하시는 분인데?”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거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고집부리지 말고 계약 끝내……. 읏!”

권이태는 제 입술로 래화의 입을 막아 버렸다. 졸지에 입이 틀어막아진 래화는 읍읍거리며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물론 효과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맞댄 입술 너머로 실실 웃는 떨림만 느껴질 뿐이었다. 쪽쪽 소리 나게 래화를 빨아 먹은 그가 살짝 입술을 떼어 냈다.

얼굴을 바짝 가까이 붙여 놓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곧았다. 그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눈을 하고서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래화야.”

간지러운 숨결과 다르게, 맺어지는 말끝은 단호했다. 래화는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 래화가 계약을 끝내든 말든, 그는 자신이 정해 놓은 대로 움직일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지금은 둘이서 마른 짚더미를 이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근데 하나만 약속해 줘.”

걱정에 잠겼던 래화는 권이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권이태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있었다. 그가 답지 않게 주저하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내가 그걸…… 버리려고 했거든. 버리고 나면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근데 이거 해결 보려면 어쩔 수가 없더라고.”

나도 선택권이 없었어, 하며 권이태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뭐, 너무 놀라지 말고…….”

그가 슬며시 제 새끼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래화의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원래 자리를 찾아간 다이아몬드 반지는 손가락에 쏙 들어갔다.

“그냥, 나는.”

권이태는 제가 래화의 손가락에 끼워 놓은 반지를 공연히 만지작거렸다. 동그란 테두리를 따라 문지르는 손길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네가 계속 나를 똑같이 대해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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