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과거 일원 그룹의 상징은 용이었다.
창업주가 그룹의 모태인 ‘일원 상회’를 설립한 날,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일원은 용을 형상화한 상징을 로고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영문 스펠링으로 로고를 변경했다. 글로벌화를 겨냥한 변화였다.
이후 일원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업이자, 대한민국 재계 서열 부동의 1위로 자리매김했다.
해외에 나가면 대한민국은 몰라도 일원은 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할 정도였다.
첨단 반도체와 핸드폰, 스마트 기기 등을 생산하는 일원은 최근 인공 지능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었는데, 자동차 회사와 협력하여 자율 주행이 가능한 전기차의 소프트웨어 판매로 사업을 확장 중이었다.
단순한 국내의 대기업이 아닌, 글로벌 기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일원은 대한민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최첨단 신기술을 만들어 내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음에도, 일원의 경영방식은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전문 경영인 체제가 일반적인 해외의 다른 기업들과 달리, 오직 가족 경영 체제만을 고집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창업주의 직계만이 그룹을 승계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굳건하다 못해 병적일 정도였다. 유전병으로 인해 손이 귀한 집안이라 직계 승계가 쉽지 않은데도 원칙을 고수해왔다.
일원의 2대 회장이 후계를 보지 못하자 온갖 치료와 민간요법을 동원하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다 굿판까지 벌인 끝에 결국 자식을 얻은 일화는 유명했다.
이번 대의 일원 회장은 일찍이 아들을 얻었으나, 소중한 외아들은 유전병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성년이 되기 전에 죽어 버렸다.
승계받을 후계자가 없건만, 일원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자식을 보았을 텐데 말이다.
하여 일원이 드디어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려 한다는 말이 많았다. 재벌가의 전문 경영인 체제와 관련하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원이 언급될 정도였다.
하지만 폐쇄적인 일원의 분위기와 직계 승계에 대한 집착을 아는 이들은 뒤에서 남몰래 수군거렸다.
회장이 알려지지 않은 혼외자를 두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론 어디까지나 떠도는 추측일 뿐이고, 일원이 쓸데없는 기사가 나지 않도록 수시로 단속하는 탓에 속 시원하게 밝혀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원……?”
그런데 권이태가 일원의 사람이었다니. 그것도 여태껏 숨겨 왔던 혼외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TV에서 떠들어 대는 뉴스를 들으며, 래화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이래화’로 가득했던 인터넷 기사들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온 세상이 일원의 새로운 후계자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권이태의 외모와 목에 그려진 뱀 문신, 여태껏 존재조차 알리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 등등.
“일원 후계자가 된다고? 권이태가?”
기사와 댓글을 읽던 래화는 되묻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답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밑바닥까지 무너졌던 래화를 달래 준 권이태는 자신이 모두 해결하겠다며 떠났다.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당부만을 남겨 놓고.
그가 엄청난 해결책을 내어놓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래화를 지켜 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여 저 또한 어떻게든 권이태를 지켜 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와 버렸다.
“진짜로 9시 뉴스 나오겠네.”
멍하니 혼잣말한 래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넓은 펜트하우스는 적막했다. 래화는 소파에 앉았다가, 금방 다시 일어서서 너른 거실을 서성였다.
가족을 언급하기 싫어하던 권이태가 자꾸 생각났다. 그는 계속 자신을 고아라고 말해 왔다.
그런 권이태가 스스로를 미디어의 제물로 바쳐 가며 본가에 돌아갔다. 마치 이정환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래화처럼 말이다.
권이태 덕분에 래화는 잠시 관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기사가 지워지고, 다른 사건에 묻혀 관심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어차피 일시적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미 래화의 얼굴과 이름이 전부 팔렸고, ‘엄마를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망가진 이미지는 원래대로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권이태가 이만큼 저를 위해 나서 줬으니, 나머지는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그가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사람들의 관심에 물어뜯기는 것도 싫었다. 뜯겨도 같이 뜯기는 게 맞았다.
가짜라고 해도, 어쨌든 부부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래화는 멈칫했다. 권이태가 하도 남편 소리를 해 대니 이런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쨌든 지금 같은 배에 올라탄 상황은 맞았다. 거실을 서성거리던 래화는 여태 손에 꼭 쥐고 있었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제법 길게 이어진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최정 씨.”
-……네. 말씀하세요.
최정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권이태에 관해 따져 물을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래화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외출을 하고 싶은데, 혼자 나가기가 조금 그래서요. 경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미트입니다.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래화는 자신의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대답을 들은 슈미트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이유를 묻고 싶군요.
그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약간의 경계심마저 느껴지는 질문에 래화는 차분히 답할 뿐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
류설연 특집 다큐는 동 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다큐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이었다. 심지어 재방송 시청률은 본방송보다 더 높았다.
방송을 편집하여 올린 너튜브 영상의 조회 수도 쑥쑥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류설연이 죽은 지 10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녀의 화제성은 탁월했다. 이번에는 류설연 닮은 딸까지 등장했으니, 앞으로 몇 주간은 이걸로 불타오르리라.
“돈 많고 예쁘장한 정신병자 아가씨는 완벽한 방송감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피디는 히죽 웃으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식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실시간으로 반응을 체크하고 있자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사무용 의자의 등받이를 최대한으로 젖혀 놓고 눕듯이 앉아서 낄낄거리던 때였다.
“어?”
피디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래화와 관련된 기사가 갑자기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원의 혼외자에 대한 기사가 마구마구 쏟아졌다. 정신 못 차리고 기사와 댓글을 읽어 대던 피디는 눈이 시뻘게졌다.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 준비했던 프로그램인데, 이렇게 화제성을 뺏겨 버릴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이래화 기사는 왜 삭제당하는 건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피디는 갈 곳을 잃고 복도에서 멍하니 멈춰 섰다.
방송국은 갑작스러운 속보에 정신이 없었다. 다들 핸드폰 붙잡고 어디에 전화하고, 고함지르고,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이래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피디는 주춤거리다가 일단 로비로 나갔다.
로비는 그나마 위층보단 한산했지만, 이쪽도 어수선하고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핸드폰을 붙잡고 수군거리거나, 속보가 방송 중인 로비의 TV를 심각한 표정으로 시청했다.
어찌할지를 몰라서 핸드폰만 붙잡고 멀거니 있던 때였다. 피디는 로비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네 명의 남녀를 보았다.
가운데에 여자 하나를 두고, 나머지 셋이 무슨 호위라도 하듯이 둘러싸고 로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일원 그룹의 혼외자 속보에 정신이 팔렸던 로비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하나둘씩 흘긋흘긋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무리였다. 여자를 둘러싼 세 사람 중 하나가 외국인이기도 하고, 중심에 선 여자가 마치 유명한 여배우 같아 보이는 탓이었다.
선글라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녀는 단정한 투피스 치마 정장을 입었는데, 늘씬한 키와 우아한 분위기가 보는 이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었다.
머릿속에서 몇몇 여배우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여자를 빤히 쳐다보던 때였다. 안내 데스크 앞에 멈춰 선 여자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를 벗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니,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흔들렸다. 여자는 잠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둘러싼 완벽한 아몬드형의 눈매 아래, 도톰한 입술이 우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방송국 국장을 만나고 싶은데요.”
피디는 그만 손에 쥔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여자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대산 건설 이래화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