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64화 (64/132)

64화

일원 그룹의 본사에서 기자들에게 충분히 얼굴을 팔아 준 후, 회장이 보낸 차를 타고 본가로 들어왔다.

권이태는 ‘집’을 바라보았다.

일원 그룹의 총수 일가가 머무르는 곳치고는 소박한 규모의 저택은 자신이 떠났을 때와 비교하여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붓으로 그려 낸 듯 아름다운, 완벽한 가족을 위한 저택.

이곳에 권이태의 자리는 단 한 번도 마련된 적이 없었다. 한때는 저 또한 이곳에 소속될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주제 파악을 끝냈다.

전부를 가지거나, 아니면 아예 가지지 못하거나.

권이태에게 이곳은 오직 제로섬 게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하여 가지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전부 버리고 떠났는데, 제 발로 이곳을 다시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저택에서는 늦은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인 듯, 음식 냄새가 바깥까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따뜻한 난색 조명이 밝혀진 주방은 한쪽 벽면이 커다란 통유리창이라서, 바깥에서 한눈에 보였다.

식사하면서 정원을 내다볼 수 있도록 설계한 인테리어는 선대 회장의 취향이었다. 갖가지 음식들이 그득하게 오른 식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권이태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행원이 대신 현관문까지 열어 주려 들었지만, 그 전에 알아서 벌컥 열어 버렸다. 조금 당황한 듯한 수행원을 뒤에 내버려 두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

휠체어에 앉은 회장과 꽃다발을 든 사모가 권이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이태가 한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던 존재였다.

권이태는 정장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그들을 비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제 가슴께에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과 휠체어를 끄는 늙고 병약한 노년의 남성.

주름진 얼굴과 굽은 어깨, 바짝 마른 몸을 하고서 휠체어를 끄는 회장은 초라했다. 사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까마득한 산처럼 느껴졌던 이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은 이상했다. 늙은 회장이 젊은 아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보고 싶었다.”

권이태는 여태껏 무표정하던 얼굴을 가볍게 움직여 미소로 답했다.

서로 웃으면서 얼굴 볼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친자식을 보듯, 회장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물론 회장과 다르게 사모는 어색한 얼굴이었다. 억지웃음을 지은 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서, 꽃다발이 부들거리며 떨릴 정도였다.

“웃느라 애쓰십니다, 사모님.”

인사 대신 건네는 지적에 사모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더욱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태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못 배운 티 내지 말렴.”

“기억 안 나세요? 저 5살에 여기 들어왔는데. 가정 교육 못 받은 후레자식 된 거, 전부 사모님 덕분이잖아요.”

거침없이 쏘아붙이자 사모가 하, 소리 내며 코웃음 쳤다. 그러나 이 정도로 끝낼 권이태가 아니었다.

“후레자식이 일원 총수 자리 처먹을 예정인데, 그 꼬라지는 또 어떻게 지켜보실지…….”

권이태는 사모가 든 꽃다발을 손등으로 툭 치며 비죽 웃었다.

“우리 사모님, 큰일 나셨네요?”

사모는 제법 애썼다. 뺨이 가늘게 경련할 정도로 화를 눌러 참았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녀가 히스테릭한 절규를 내지르며 꽃다발을 바닥에 내던졌다.

“아아악! 현아, 현아……!”

사모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새빨간 입술이 죽은 이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이미 뼛조각도 삭아 없어졌을 시체의 이름이었다.

권이태는 그녀의 비통함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구든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처절한 광경이지만,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곤 이래화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런 것뿐이었다.

다소 멍한 눈으로 바닥에 흩어진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래화가 꽃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았다.

아직 꽃다발이야 무리겠지만,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꽃을 줘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꽤 기다려 줬는데도 사모의 비명이 끝나질 않자, 권이태는 회장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사모님 많이 흥분하신 것 같은데, 안으로 들여보내죠.”

회장은 말없이 한쪽 손을 들었고,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던 고용인들이 재깍 튀어나와 사모를 데려갔다.

“현아, 현아……. 불쌍한 내 아들……. 저 사생아 놈이 기어코 죄다 빼앗아 가는구나……!”

사모는 흐느끼면서도 권이태와 회장이 들으라는 듯 커다랗게 말했다. 혼자 연극이라도 찍듯, 일부러 뾰족하게 높인 목소리가 고막을 쨍하게 찢어 놓았다.

사모의 외침은 고용인들이 그녀를 조용히 안쪽으로 모시고 나서야 사라졌다. 회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휠체어를 끌며 주방으로 향했다. 권이태 또한 무심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회장과 나란히 마주 보듯 식탁에 앉은 권이태는 그득그득 차려진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호텔 주방장 출신의 요리사가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 낸 한식 요리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정성스러운 음식은 맛있는 냄새를 가득 풍겨 냈다.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먹을 수 없는 요리를 앞에 두고, 권이태는 딴 생각을 했다. 이래화가 끓여줬던 라면이었다.

봉지라면을 한 냄비 그득하게 끓여서 함께 나눠 먹었던 저녁 식사.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라면을 생각하는 게 조금 웃겨서, 권이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권이태가 딴생각에 잠긴 사이, 회장은 식탁 위의 물잔을 집어 정확히 세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숟가락을 먼저 들어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쌀밥만 반 숟가락을 떠먹었다.

느릿하게 우물우물 씹어서 첫 숟갈을 삼킨 후에야, 그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익숙하게 기다리고 있던 권이태도 뒤늦게 수저를 들었다.

어쨌든 아쉬워서 찾아온 쪽은 자신이었다.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장단은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식사는 경직된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회장이 부드럽게 익힌 소갈비찜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갈라진 고기 살을 입 안에 넣고 쩍쩍 씹어 삼킨 그가 거의 줄어들지 않는 권이태의 밥그릇을 눈짓하며 물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음식을 내오라 할까?”

“아닙니다. 뭘 내오시든 맛있게는 못 먹을 것 같네요.”

대놓고 빈정거렸으나, 회장은 모른 척했다. 그는 오히려 권이태의 밥그릇 위에 발라 낸 갈빗살을 얹어 주며 살뜰하게 챙기는 시늉을 했다.

하얀 쌀밥 위에 누릿하게 흘러내리는 고기 기름과 갈색 양념에 속이 뒤틀렸다. 식탁을 뒤엎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회장을 쳐다보았다.

“집에 연락 한번 없어서 서운했다.”

“어차피 다 지켜보셨지 않습니까.”

“그래도 네가 직접 연락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지. 이제 집으로 돌아와 줘서 다행이다만.”

“저 결혼했습니다. 따로 가정이 있으니, 앞으로 승계받더라도 본가에서 머물진 않을 겁니다.”

“안 그래도 너와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회장이 딱,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가 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거기가 워낙 말이 많으니……. 물론 네가 그 아가씨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준 것도 알지만…….”

혼자서 말을 길게 늘이던 회장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임신은 제대로 하겠더냐? 정신병력도 유전이라 하던데.”

“이미 저부터가 정신병자인데요.”

“그러니 더더욱 며느리는 멀쩡한 아이로 데려와야지.”

회장은 지긋한 눈으로 권이태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매 아래에 깃든 열망이 기이한 빛을 품고 꿈틀거렸다.

“너는 일원의 유일한 희망이다.”

죽은 아들이자 권이태의 형, 권현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유전병과 더불어, 갖은 잔병치레에 시달리던 권현은 결국 성년이 되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권현이 죽으면서, 그때까지 사생아라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권이태는 갑자기 일원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뒤바뀌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물건 다루듯 냉정하던 회장은 자애로워졌고, 벌레 보듯 하던 사모는 눈치를 살폈다.

전부 일원의 직계 승계 원칙 덕분이었다.

그 당시 이미 유전병이 상당 부분 진행되었던 회장은 더 이상 다른 자식을 얻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권이태를 제외하곤 일원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었다.

직계만이 승계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징그러울 만큼 집착하는 이유는 미신 때문이었다.

창업주가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면서 용의 기운을 받았고, 그 기운이 오직 직계를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인데, 그걸 일원 사람들은 진지하게 믿어 댔다.

실제로 방계가 계열사를 분리해 독립했다가 쫄딱 말아먹은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아마 대대로 이어진 유전병 때문에 미신을 믿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듯했다. 그 외에 자세한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권이태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자신과는 관련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권이태는 절대로 용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도와줬으니까 이혼해라?”

탁 까놓고 묻는 말에 회장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권이태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다각다각 두드렸다.

작은 소음에 회장은 곧바로 눈매를 일그러뜨렸으나, 권이태를 제지하진 않았다. 그가 휠체어의 팔걸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래.”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권이태는 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이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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