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식탁 위로 떨어진 말에 회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권이태가 내던 시끄러운 소음마저 잠시 잊은 눈치였다.
회장은 권이태의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조각조각 해체하여 뜯어보는 눈빛은 살갗에 메스를 들이댄 듯 서늘했다. 짧고 날카로운 탐색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 때문에 집에 돌아온 줄 알았는데.”
성인이 되자마자 한국을 떠났다. 수년 동안 해외 각지를 떠돌았으나, 한국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귀국하고, 본가에 연락까지 했다. 도와 달라는 말을 들은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대충 짐작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태연함을 얼굴 위로 덮어쓰고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사랑하니까 놔줘야죠. 이 미친 집구석에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
평소 성질 같았으면 싸늘한 일갈을 던지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선 넘는 소리를 던져 대건만, 회장은 여전히 인내했다. 과연 그가 어디까지 버틸지 궁금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사람하고 결혼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지금부터 일 년간은 제가 뭘 하든 간섭하지 마십시오.”
“……일 년.”
낮게 중얼거린 회장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속내를 캐 보려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댔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권이태는 웃는 낯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뒤에는 얌전히 승계받을 테냐.”
“물론입니다. 뭐, 원하시면 각서 쓰고 공증이라도 받을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마침내 합의를 이루고, 정적이 찾아왔다. 권이태는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반찬 가짓수와 색깔까지 정해 놓고 각 맞춰 정렬한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온갖 미신에 절여지다 못해, 징그러운 강박증마저 생긴 이에게 질문했다.
“그 빌어먹을 미신…….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까? 고작 미신 하나 때문에 제가 승계를 받는 겁니까.”
회장이 휠체어를 움직였다. 전동 휠체어의 기계 소리가 기분 나쁘게 귀를 찔렀다. 휠체어를 타고 권이태가 앉은 의자 옆에 멈춰 선 회장은 나직이 말했다.
“직계가 이어받지 않으면 집안에 화가 닥친다는 건 너도 알 거고.”
“…….”
“내가 앓고 있는 병도……. 네가 승계를 받아야 고쳐진다고 하더구나.”
권이태는 참지 못하고 비틀린 웃음을 그렸다.
“그건 또 어느 무당이 한 헛소리입니까?”
회장은 답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깃든 기이한 열망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일원의 유전병에 걸리지 않은, 젊고 건강한 육체를 향한 탐욕이었다.
이번에는 심장이라도 뽑아 가면 어떡할 거냐는 슈미트의 말이 크게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죽은 권현에게도, 그리고 지금 회장에게도. 항상 자신은 바쳐질 제물일 뿐이었다.
“회장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더 머물렀다간 식탁에 대고 토악질이라도 할 지경이었다. 짤막한 말만 대충 던지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은 자고 가기를 권했으나 딱 잘라 거절했다. 그 또한 기대 없이 한 겉치레인 듯, 별다르게 붙잡지 않았다.
음식 냄새로 그득하던 공간에서 벗어나 정원으로 나오니 숨통이 트였다. 권이태는 뻐근한 목을 뚜둑뚜둑 소리 나게 꺾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
너른 유리창 안쪽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는 거의 손대지 않은 음식들이 초라하게 식어 가는 중이었다.
오래된 과거의 초상이 떠올랐다. 악취 풍기는 몸으로 정원에 서서, 유리창 너머 평화로운 주방을 바라보았던 자신.
쏟아지는 빗줄기는 등을 따갑게 내려치고, 정원 가득 퍼진 물비린내가 폐부를 틀어막았다.
비루먹은 개새끼와 다를 바 없는 꼴로 멀거니 서 있다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곤 얼굴이 불긋해졌다.
완벽한 저녁 식사를 즐기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악착같이 돌아올 필요가 없었음을. 이곳은 자신이 없어야만 완성되는 공간이었다.
얼룩 한 점 없이 말끔한 유리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뿌득 소리 나게 문질렀다. 지저분한 손자국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느린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나려는데, 수행원이 재깍 쫓아 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권이태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음, 하고 짧은 소리를 내었다. 긴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행원에게 턱 끝을 까닥였다.
“지금 앞에 시끄럽습니까?”
“아닙니다. 기자들은 전부 정리해 뒀습니다.”
“그럼 알아서 가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첫날이지 않습니까.”
악착같이 달라붙으려는 수행원에게 샐쭉 웃으며 성큼 다가섰다. 가까이 붙어 서자 수행원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처음부터 빡세게 굴지 말고 쉬엄쉬엄 갑시다. 서로 적응할 시간 필요하잖아요. 그쪽도, 나도.”
“…….”
“험한 일 하던 놈이라 아직 도련님 생활이 익숙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행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버려두고 홀로 저택을 나섰다.
본가는 한남동에서도 단독 주택이 밀집한 구역에 위치했다. 높은 담장만 줄지어 늘어선 거리는 조용했다. 시간이 늦어 오가는 차도 없는지라, 그야말로 인적이 뚝 끊겼다.
구역질 나는 일을 치르고 온 터라 속도 가라앉힐 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권이태는 가로등 밑에 멈춰 서서 꺼 놓았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잠깐 사이에 쌓인 메시지를 건조한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다 최정에게 날아온 메시지를 보곤, 의식하기도 전에 픽 웃어 버렸다.
[아가씨 진짜 또라이다. 너랑 또쀼로 평생 살아야 함.]
집에 얌전히 있으랬더니, 이래화가 그새를 못 참고 또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최정의 말투로 미뤄 짐작하건대, 큰일이 생기진 않은 듯했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었다. 가로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이름부터 불렀다.
“래화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게 귀여워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오늘 라면 먹을래?”
몸을 뒤로 젖히니, 등에 닿은 가로등에서 서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방금까지 뜻 모를 감정으로 들끓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대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끓여 줄게. 너보단 못 끓이겠지만. 아, 올해 라면 먹는 날은 이미 끝나서 안 되려나.”
일 년에 라면 먹는 횟수도 정해 두는 내 예쁜 또라이.
권이태는 이래화를 생각하며 긴 숨을 내뱉었다.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저 새끼 미친놈인가 싶을 정도로 계속 히죽거렸다.
“그러면 뭐 먹지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가 멈칫했다.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기자가 접근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감은 눈을 떴다. 권이태는 제 앞에 선 사람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눈매를 잔뜩 휘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웃음기 섞인 말이 흘러나갔다.
“뭐야.”
이래화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이태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이래화는 왼손을 쭉 펼쳤다. 네 번째 손가락에 얌전하게 끼운 결혼반지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다.
“네가 낀 반지도 내 것처럼 위치 추적 된다면서.”
“맞아.”
“그거 보고 찾아왔어.”
이래화를 따라 똑같이 왼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녀가 눈매를 살풋 찌푸렸다. 그러더니 붙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더욱 활짝 펼치는 시늉을 했다.
저에 비하면 조막만 한 손을 보고 있노라니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제 앞의 손을 단단히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이래화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기울어지는 몸을 그대로 받아 품에 안았다. 조그만 온기를 가득 끌어안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키득거리며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렀다. 간지러운지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부비적거렸다.
조금 꼼지락대던 이래화는 이내 얌전히 안겨 주었다. 덕분에 실컷 냄새를 맡고 비비적거릴 수 있었다.
작은 몸에 제 커다란 덩치를 억지로 우겨 넣어 가며 끌어안고 있는데, 이래화가 핸드백에서 선글라스와 모자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 신중한 얼굴로 선글라스를 끼우고, 모자도 머리에 푹 씌워 줬다.
“자기야, 밤에 선글라스를 누가 써…….”
“연예인이랑 우리 같은 사람들. 너 이제 유명인이라서 이런 거 해야 해.”
따박따박 돌아오는 대답에 비실비실 웃으니, 이래화는 저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며 중얼거렸다.
“……왜 그랬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니 확실히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불편했다. 손가락으로 이래화가 걸친 선글라스의 다리를 걸어서 잡아당겼다.
얼굴의 반절을 덮는 선글라스를 벗겨 내자, 드러난 갈색 눈동자는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리지만 뚜렷한 눈을 들여다보며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이래화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밀어 내며 속삭였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권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