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66화 (66/132)

66화

래화가 방송국에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 슈미트는 반대했다.

그는 지금 함부로 나갈 상황이 아니고, 권이태가 해결 중이니 기다리라는 설명을 어린아이 타이르듯 조곤조곤하게 했다.

슈미트의 설득을 끝까지 들어 준 후에, 래화는 조용한 칼을 던졌다.

“저 싫어하시는 거 알고 있어요.”

대뜸 꺼낸 말에 슈미트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같이 있던 최정과 메이가 옆에서 어우,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도와주세요. 권이태 혼자 물어뜯기는 거, 가만히 지켜보고만 싶진 않아요.”

결국 슈미트는 래화의 말을 따라 주었다. 하여 세 사람을 끌고 직접 방송국으로 찾아간 것이다. 정면 대응을 넘어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래화도 강경한 수단을 쓰는 이유가 있었다. 래화는 방송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류설연이 자살했을 때 온갖 언론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이정환이 막아 줘서 얼굴만큼은 간신히 팔리지 않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알려졌다. 신문과 잡지, 인터넷 기사 따위에 가십거리로 내던져져 온갖 헛소문과 함께 조각조각 씹혔다.

당시 래화는 기다리면 잦아들겠거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다들 알아서 거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대응하지 않자, 오히려 진실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고들 여겼다. 그때 당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지금 뭐라도 해 보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 내린 것이다.

호화로운 경호인단을 이끌고 방송국에 입장한 래화는 곧장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방송국 국장을 만나고 싶은데요. 대산 건설 이래화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그러자 방송국 로비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남자가 꽁지에 불붙은 듯 화드득 놀라서 쫓아왔다.

“이, 이래화 님……?”

놀라서 말까지 더듬으며 아는 체하는 사람은 알고 보니 류설연 특집 다큐를 만든 피디였다. 덕분에 국장실까지 어려움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피디는 거의 죄인처럼 래화와 함께 국장실에 들어왔다. 일원 그룹 속보 때문에 반쯤 정신이 빠진 국장은 래화까지 등장하자 거의 졸도할 듯했다.

인사를 하거나 앉으라는 말을 해줄 경황이 없어 보여서, 국장실 안을 한 번 스윽 훑어보고 적당한 자리에 알아서 앉았다.

래화는 국장을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피디와 함께 나란히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중이었다.

방송국에서 별일을 다 겪으며 굴러먹은 노련한 이들조차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내버려 두면 계속 땀만 흘려 댈 분위기인지라 먼저 말을 꺼냈다.

“정신병자인 줄 알았는데 너무 멀쩡해서 놀라셨나요?”

래화의 말에 두 사람은 더욱 당황했다. 국장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아, 아닙니다. 직접 찾아오실 줄 몰라서 놀랐을 뿐입니다…….”

“그러셨군요.”

래화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국장과 피디가 바쁘게 서로 눈짓하며 시선 교환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온갖 생각을 하며 긴장할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준 후에 말했다.

“일방적인 주장만 방송으로 내셔서 조금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제안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다큐보다 더 시청률 잘 나오고 화제 될 만한 거, 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턱 끝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독점 인터뷰 해 드릴 테니까 방송 한번 해요.”

“……!”

국장의 눈이 커졌다. 이런 제안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듯했다. 그 정도로 온갖 미디어에서 두들겨 맞으면 보통 무서워서 숨는 게 일반적이니 말이다.

다만 그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래화는 이미 한 번 얻어맞아 본 경험자라는 점이었다.

“싫으시면 다른 곳 찾아가고요.”

“아니, 그게 아닙니다. 싫은 게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미끼임에도 국장은 선뜻 물지 못하고 망설였다. 하여 그가 망설일 이유를 없애 주었다.

“대산 회장님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쪽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그건 권이태가 막아 줄 터였다. 래화는 두 사람과 한 번씩 눈을 맞췄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방송, 하실 거죠?”

***

국장, 피디와 함께 어떤 식으로 방송할 것인지 의논하고,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고 나오니 바깥은 완전히 깜깜했다.

최정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래화는 되레 그에게 권이태의 위치를 캐물었다.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남동에 도착해 최정이 깔아 준 위치 추적 앱으로 권이태가 있는 장소를 찾아갔다. 래화의 경호원들은 어째서인지 한남동까지만 데려다주고, 래화 혼자 권이태를 만나러 가게 해주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주변 체크했으니까.”

래화를 차에서 내려주며, 메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잘 부탁드려요.”

고급 주택이 모인 구역인지라, 늦은 밤에는 인적이 없다시피 하는 곳이었다. 조용한 밤거리를 따라 걸어가던 래화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주저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웅크렸는데도 커다란 덩치 때문에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 하나 없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있는 그를 보며, 래화는 손에 든 핸드폰을 꾹 움켜쥐었다.

왜 저러고 있어…….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래화는 전화를 받으며 권이태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웃는 얼굴이 쓸쓸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뛰듯이 그에게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스르륵 눈을 떴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에 말갛게 광이 돌았다.

래화를 시야에 담는 순간, 권이태는 곧장 웃음 지었다. 제가 웃는 줄도 모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래화를 끌어안았다. 제 덩치는 생각 않고 품에 안기려는 듯 구깃구깃 몸을 구겨 가며 붙어 왔다.

래화는 그에게 선글라스와 모자를 씌워 주었다. 갑자기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와 자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뒤늦게 실감이 나는 탓이었다.

사고 쳤다는 말로도 모자란 일들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울컥 제멋대로 말을 뱉어 냈다.

“……왜 그랬어.”

“뭐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권이태.”

그의 보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예전부터 권이태가 단순한 의뢰 이상으로 저를 보호해 준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납득 가능한 선을 넘어섰다. 게다가 정말로 일원을 승계한다면, 래화가 약속한 20억은 권이태에게 큰 의미가 없는 돈이었다. 20억 때문에 인생을 바꿀 이유는 전혀 없었다.

래화의 질문에 권이태는 묘한 웃음만 샐샐 흘리다가, 불분명한 대답만 내놓았다.

“그러게. 왜 그럴까…….”

허무한 답에 눈매를 찡그리는 찰나였다. 그는 래화가 쓴 선글라스를 완전히 벗겨 냈다. 그리고 입술을 맞붙였다.

짧게 쭉 빨아들인 후에 고개를 뒤로 물리더니, 제가 쓴 선글라스도 벗어젖히고 다시 입술을 들이댔다.

잡아먹을 듯 입을 벌리고 덮쳐드는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몸을 그가 단단히 옥죄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눌러 놓고 깊숙하게 혀를 쑤셨다. 거친 시작과 다르게, 입술을 탐하는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말랑말랑한 혀가 입 안의 여린 점막을 살살 문질렀다. 치아의 표면을 하나씩 누르며 쓸어 나갔다.

날카로운 송곳니 끝과 어금니 위를 문질러 대다가, 입천장도 가만가만 훑어 냈다. 예민한 부위를 끈덕지게 문지르는 탓에 몸이 움찔 떨렸다.

래화의 존재를 확인하듯 구석진 곳까지 빈틈없이 훑어 낸 끝에야 키스는 끝이 났다. 그는 래화의 입꼬리에 입술을 눌렀다 떼어 냈다.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어두운 밤거리에 쏟아지는 가로등의 빛줄기 아래에 자리한 이가 웃으며 속삭였다.

“나도 궁금하다, 예또야.”

래화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아 냈다. 속에서 열이 차올랐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난 기분이 들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분히 충동적으로 말해 버렸다.

“집 가서 라면 먹자.”

“진짜?”

권이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고선, 자기가 엄청 맛있게 끓여 주겠다는 둥 들떠서 말했다. 하지만 래화는 한마디로 권이태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나 지금 그런 의미로 말하는 거야.”

권이태는 말하던 그대로 멈칫했다. 그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래화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봤어. 라면 먹고, 그러고 나서 가지 말고.”

래화는 립스틱이 묻은 권이태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며 말했다.

“나랑 같이 있자.”

그는 약간 넋 나간 듯 굳어 있다가, 뒤늦게 소리를 내었다.

“……와.”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래화가 나 꼬시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래화는 모른 척 그를 재촉했다.

“먹을 거야, 말 거야.”

그러자 그때껏 하라는 대답은 하지 않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던 권이태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렸다. 그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자기야, 나 아파…….”

아프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황급히 살펴보았다. 혹시나 본가에서 어디 맞고 온 건 아닌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파? 어디 아픈데? 많이 아파?”

권이태는 끙끙거리며 래화의 어깨에 고개를 턱 얹었다. 그러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맞닿은 흉곽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래화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존나 설레서 자지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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