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67화 (67/132)

67화

하여간 권이태 때문에 수명이 하루는 줄어든 것 같았다.

아프대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이상한 부위가 아프다는 얘기나 해 대고…….

마음 같아선 아주 호되게 꿀밤을 때려 주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때리진 못했고, 마음만 그렇게 생각했다.

권이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밥부터 했다. 본가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권이태의 말 때문이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터였다.

권이태가 뭘 먹지 못했다거나 하는 말은 입 밖으로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정환과의 저녁 식사에서 래화가 맹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것처럼, 권이태 또한 그러했으리라.

래화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자, 권이태는 또 헛소리를 해 대며 옆에서 추근거렸다.

“자기 앞치마 입은 모습 때문에 더 꼴린다.”

“저리 가.”

“라면 먹자더니 갑자기 왜 밥하고 그래. 마님이 쌀밥 주면 의심하라던데.”

“…….”

잔뜩 흘겨보았으나, 권이태는 음흉한 웃음만 흘려 댔다. 그 뒤로도 하도 귀찮게 굴기에 결국 한 소리 했다.

“나도 저녁 못 먹었어.”

그러자 라면 먹자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대신 뭐 도와줄 거 없냐며 성가시게 얼쩡거렸다. 래화는 권이태를 뒤에 매달고 불편하게 요리했다.

대충 집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고, 달걀프라이를 열 장 정도 부치고, 소시지에 칼집을 슥슥 내서 한 봉지를 다 구웠다.

칼집을 따라 벌어지는 소시지들을 껍질이 노릇해질 때까지 구운 다음, 커다란 접시에 와르르 담았다. 식탁에 소시지 접시를 옮겨 놓으려던 래화는 좋은 생각이 났다. 권이태의 손에 접시를 쥐여 주며 말했다.

“여기 케첩 뿌려 줘.”

임무를 받은 권이태는 드디어 래화에게서 떨어졌다. 등딱지를 떼어 놓고 홀가분해진 래화는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야채가 너무 없는 듯해서였다.

급한 대로 오이와 당근, 파프리카를 꺼내다 길게 막대 모양으로 썰어서 쌈장이랑 같이 내놓았다.

이만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만했다. 식탁에 차린 음식들을 죽 훑어보던 래화는 가볍게 웃어 버렸다.

소시지와 달걀프라이가 담긴 접시 위에 케첩으로 스마일을 그려 놓은 것이다. 권이태는 래화가 웃는 걸 보더니 으쓱한 표정을 해 보였다. 래화는 먼저 의자에 앉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밥 먹자.”

“으응.”

열 장이나 구웠던 달걀프라이는 권이태가 아홉 장을 먹었다. 그는 처음에 래화 몫으로 다섯 장을 내어 주었다.

입 짧은 래화가 달걀프라이를 다섯 장이나 먹으리라 생각하다니, 참으로 편견 없는 분배였다. 젓가락으로 한 장만 집어 가자 권이태는 마다하지 않고 나머지를 날름날름 먹어치웠다.

케첩 뿌린 소시지는 독일에서 수입한 것인데, 크기가 꽤 큼직했다. 그런데도 권이태는 한 봉지를 죄다 먹었다.

거기다 밥도 국수 그릇에 담았다. 저번에 국그릇에다 줬더니, 밥을 더 퍼 먹는다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기에 이번에는 국수 그릇을 내준 것이다.

래화의 얼굴보다도 큰 그릇에 고봉밥을 담아서 꿀꺽꿀꺽 먹어치우는 모양새가 신기했다. 저 덩치와 근육을 유지하려면 이만큼은 먹어 줘야 하나 싶었다.

권이태를 구경하면서 식사하다 보니 래화도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배불러서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는지라, 당근 스틱이나 하나 집어다가 오독오독 먹었다.

어느새 밥과 반찬을 말끔하게 먹어치운 권이태가 당근 스틱을 먹는 래화를 보면서 타박했다.

“무슨 토끼도 아니고.”

래화는 거의 줄어들지 않은 야채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야채 좀 먹자, 토끼야.”

“난 육식 동물이야.”

“눈덧신토끼는 육식도 한대.”

“그건 또 뭔데…….”

풀떼기를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투덜투덜하면서도, 권이태는 야채 스틱을 세 개씩 집어 먹었다. 무시무시한 육식 토끼의 공세에 야채 접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바닥을 보였다.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는 권이태가 다 했다. 그에게 정리를 맡겨 놓고, 래화는 느긋하게 욕실에서 샤워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래화는 젖은 귀밑머리를 넘기며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끔하게 말린 후에 거실로 나왔다.

“……?”

권이태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씻는 중인가 싶어서 2층에 올라가 기웃거렸지만 씻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총기를 전시해 두는 방도, 그의 침실도 텅 비어 있었다.

1층을 다시 둘러보다가, 설마설마하며 화실로 가 보았다. 화실 문을 열자 넓은 등이 보였다.

권이태는 찢어진 캔버스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정환의 전화를 받고 나이프로 찢어 버렸던 미완성 그림이었다.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한 캔버스건만, 권이태는 미술관에서 거장의 작품을 감상하듯 진지하게 보았다. 그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잘 그렸는데 아깝다.”

“그림 하나도 모른다며.”

“어. 그냥 봤을 때 잘 그렸다 싶어서.”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뿍 묻어나는 칭찬이었다. 쑥스러워진 래화는 괜히 시시한 농담을 던졌다.

“네가 그렇게 봐 주니까 현대 미술 작품 같다.”

“그러게. 이대로 전시하자.”

농담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진지한 답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래화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화끈거리는 귓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데, 권이태가 래화를 돌아보았다.

“왜 찢었어?”

제 작품이 찢기기라도 한 것처럼, 질문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래화는 찢어진 캔버스에 한참 시선을 두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회장님 전화 받고 더 이상 그림 안 그리려고 했었어.”

앞뒤 가리지 않고 나이프를 휘둘러 그림을 찢어버렸다. 그 순간 느꼈던 끔찍한 감정의 편린은 마음 한구석에 지저분한 잔여물로 남았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권이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자기야, 날 이렇게 찢어 놓다니 너무 잔인하다.”

래화는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놀라서 그에게 얼른 해명했다.

“아니, 이건 초상화도 아닌데…….”

“나 그린 거라면서.”

“그건 그렇지만.”

“그럼 날 찢은 거지. 잔인하게, 반으로 싹둑.”

듣고 보니 그의 논리가 틀린 건 아니었다. 확실히 권이태에게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이니까 말이다.

이걸 어찌 보상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돈 준다고 하면 저번처럼 성질을 낼 듯했다. 이제 일원 후계자가 되실 몸이라서 래화의 통장 사정으로는 그가 흡족할 만큼 줄 수도 없었다.

뭘 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 래화에게 권이태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다시 그려 줄 거지?”

질문을 듣는 순간, 래화는 여태 자신이 무엇을 망설였는지 깨달았다. 복잡하게 엉겨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다시 붓을 잡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변명들이 머릿속을 틀어막은 탓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직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부족한 재능에 허덕이는 일방적인 짝사랑이 힘겨웠다.

래화가 그림을 포기하면 많은 일들이 훨씬 손쉽게 해결되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붓을 놓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화는 결국 또다시 바보처럼 굴어 버렸다.

“응. 새로 그릴 거야. 훨씬 멋지게. 캔버스 호수도 더 키워야겠다.”

아마 혼자서는 두려워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졸작을 그려내더라도 흔들림 없이 래화를 지지해줄 사람이 있었다.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래화를 보호하기 위해 제 인생을 갈아 넣은 이였다.

다른 사람이 래화의 그림을 보며 무어라 욕하고 비난하든 상관없었다. 류설연의 짝퉁이라고, 예술병 걸린 아가씨의 헛짓거리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

권이태라는 단 한 명의 관람객을 위해서.

그것이 저를 믿고 도와준 권이태를 위해 래화가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림……. 꼭 완성할게.”

결연하게 말하니 권이태는 피식 웃었다. 그가 래화를 끌어안으며 야하게 속닥거렸다.

“그래. 이제 라면 먹자.”

래화가 얼굴을 붉히기도 전에, 권이태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제 옷부터 벗어던지고, 래화의 옷도 훌렁 벗겨 냈다. 그가 허리를 잔뜩 웅크려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쇄골 위의 점에 더운 숨이 가득 떨어졌다.

“나 화실에서 해 보고 싶었어. 저번에 자기가 여기서 그림 그리는 거 보는데 진짜 꼴리더라고.”

어느새 왼손이 잡아 채였다. 권이태는 래화의 손가락을 쪽쪽 물고 빨았다.

“손가락도 예뻐선…….”

반지가 끼워진 약지를 특히 집요하게 핥아 댔다. 야릇한 간지러움에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못 견디고 손가락을 움츠리는데도 끈질기게 할짝거렸다.

권이태가 옆으로 손을 뻗더니 붓을 하나 집었다. 부채꼴 모양의 팬 붓이 가슴 위를 살살 간질였다.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탓에 정신 없는 와중에도 발칵 외쳤다.

“붓 가지고 장난치지 마……!”

힘껏 그를 밀어 내고 손에 들린 붓을 빼앗아 원래 자리에 놔뒀다. 그리고 다시 권이태를 돌아보니,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권이태는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성질내면 왜 이렇게 좋냐.”

하지만 곤란한 표정과 달리, 그의 아랫도리 사정은 아주 뻔뻔스러웠다. 반쯤 선 성기가 쑤욱 치켜 올라가더니, 마지막엔 고개를 완전히 치켜들고 꺼덕거렸다. 권이태가 히죽 웃으며 제 입술을 핥았다.

“괴롭히고 싶어서 죽겠다,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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