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1화 (71/132)

71화

유달리 무더운 날이었다. 습하고 눅눅한 공기에 가만히 서 있어도 짜증이 치미는 날씨.

등줄기를 타고 굵직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콧잔등과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으나, 닦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늘어지는 걸음을 따라 슬리퍼의 고무 밑창이 뜨거운 아스팔트에 지익지익 끌렸다. 숨 막히는 더위에 머리가 멍했다.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다 못해 홧홧했다. 몸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풀풀 올라오는 게 심상찮았다. 이대로 땡볕 아래를 계속 걷다간 열사병으로 길바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멈출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마땅찮은 탓이었다.

매미 우는 소리에 귀가 따갑고, 내리쬐는 햇빛에 등이 타들어 가도 숨어들 곳이 없었다. 하여 택한 것이 그저 끝없이 걷는 일이었다.

높다란 담벼락만이 늘어진 한낮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간간이 자동차나 한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거리를 멍하니 응시하며 걸어가던 때였다.

담벼락 너머로 삐져나온 나무줄기가 만들어 낸 조그만 그늘 한 조각이 보였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달아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작은 쉼터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였다.

나뭇잎 틈새로 비치는 얼룩덜룩한 햇살 무늬를 온몸에 그린 채, 다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은 모양새가 제법 불쌍했다. 입은 옷이 눈에 익었다. 이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

부촌으로 유명한 동네이니 저 여자아이도 분명 부잣집 딸일 것이다. 이렇게 더운 날 처량한 꼴로 앉아 있을 이유가 없을 텐데…….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 타인의 사정이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묘한 호기심에 잠겨서 이상한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줄지어 지나가는 개미의 행렬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바닥에만 시선을 둔 탓에,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가 얼굴을 죄다 가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드러난 흰 목덜미는 더위에 물들어 연한 분홍빛이었다. 쟤도 많이 더워 보인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텁텁한 공기를 가르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숨통이 트였다. 여자아이의 얼굴을 온통 가리던 머리카락도 바람에 흩날리며 젖혀졌다.

“…….”

그렇게 예쁜 것은 처음 보았다. 하얗고 투명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옅었다. 그늘 밑에 있지 않았다면 햇빛에 부서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홀린 듯 사로잡힌 시야에 뒤늦게 붉은 자국이 들어왔다. 여자아이의 작은 뺨에는 벌건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기다랗게 긁힌 생채기도 함께였다.

종종 맞아 본 경험자로서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반지 낀 손에 뺨을 얻어맞은 것이었다.

바람이 멎고, 얼굴은 다시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가려졌다. 그러나 이미 뇌리에 박힌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짧은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나랑 비슷하네.

얻어맞고 다니는 것도, 쪄 죽게 생긴 한여름에 갈 곳이 없어서 길바닥 돌아다니는 것도…….

동질감을 느끼고 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뭔가 속이 답답하면서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었다.

너무 오래 쳐다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괜스레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 척하며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여자아이가 중얼거렸다.

“나 돈 없어.”

뜬금없는 소리가 황당해서 눈을 끔뻑였다. 대꾸를 못 하고 있으니, 불퉁한 말이 덧붙여졌다.

“주머니 뒤져도 십 원짜리 하나 안 나오니까 확인해 보든지…….”

돈이나 뜯고 다니는 불량배 취급이었다. 심지어 개미만 쳐다보고, 끝까지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시선 한 조각 주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기분이 나빠졌다.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었다가, 빠르게 걸어 곧바로 여자아이를 지나쳤다. 괜히 더 머물러서 나쁜 놈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래화가 왜 저를 봐 주지 않았는지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맞아서 부은 뺨을 남에게 보이는 일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이래화는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만 쳐다보았던 것이었다.

낡은 추억을 되씹던 권이태는 피식 웃었다. 사실 이래화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다 합쳐도 다섯 손가락조차 채우지 못하는 만남이었다. 그마저도 잠깐씩 짤막하게 본 것이 고작이니, 당시 온갖 사건들에 시달렸을 이래화가 충분히 잊어버릴 만했다.

별것 아닌 만남. 특별하지 않은 관계. 오래된 과거의 인연.

“나만 기억하지, 나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담배가 간절했다. 권이태는 담배 대신 제 품 안의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았다.

***

온몸에 기운이 쪽 빨렸다. 어찌나 시달렸는지, 마치 미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심한 갈증에 목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래화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입술에 시원한 무언가가 닿았다. 조금씩 들어오는 차가운 물을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달게 받아 마셨다.

꼴깍꼴깍 한참 마시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퉁퉁 부은 눈을 부스스 떴다. 귓가에 TV 소리가 들려왔다. 불분명하게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차 선명하게 들렸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직접 나서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래화가 방송국에 약속했던 인터뷰의 예고편이었다. 아주 대대적으로 방송을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화면발 잘 받네. 배우 해도 되겠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래화는 부스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몸에 이불을 만 채, 권이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권이태는 래화를 제 품에 가둬 놓고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TV만 켜 놔서, 어스름한 빛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TV를 응시하던 그가 래화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눈을 마주하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래화의 드로잉북이었다. 구경 중이었는지, 중간 즈음까지 페이지가 넘어가 있었다.

긴 손가락이 종이를 팔랑 넘겼다. 예전에 카페에서 그렸던 검은 숲이 나왔다. 숲의 밑바닥을 기어가는 뱀이 누구를 닮았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권이태는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으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뱀도 잘 그리고.”

“……너 그린 거 아냐.”

“나라고 말한 적 없는데.”

괜히 아닌 척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래화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 고치처럼 돌돌 말려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권이태의 도움을 받아 이불 위쪽을 조금 허물고 팔만 꺼냈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봐.”

그는 순순히 드로잉북을 건네주었다. 래화는 거실 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권이태가 눈치껏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메모용 볼펜을 집어 줬다.

심이 둥근 볼펜은 잉크 찌꺼기가 뭉치지 않고 매끄럽게 선이 그어졌다. 드로잉북 귀퉁이에 슥슥 선을 그어 보며 몇 번 테스트를 끝낸 래화는 권이태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 끝으로 기어갔다.

반대쪽 끝에 앉은 권이태를 보았다가, 무릎을 세워 앉아 드로잉북을 기대 놓고 볼펜으로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 그리는 거야?”

“응. 누드모델 해 준다며. 움직이지 말고 있어.”

뭐 이런 걸 그리냐며, 권이태는 잠깐 웃었다. 래화는 눈썹만 한 번 치켜올리고 말았다. 인물화도 나쁘지 않게 그리는 편이었다. 한 번쯤은 그를 드로잉해 보고 싶었다.

권이태는 나신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비율이 완벽한 몸을 전부 드러낸 채, 어둑한 공간에서 희미한 브라운관의 조명만 받는 모습은 성적인 메시지를 담은 광고 화보 같았다.

빛과 어둠에 물든 근육의 양감이 매혹적이었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탐욕적으로 살피다, 팔뚝에 남은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간밤의 흔적이었다. 완벽한 조형물에 새겨진 흠집에 낯이 홧홧해졌다. 래화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낮은 목소리가 유혹하듯 은근하게 속삭였다.

“다 그려서 나 준다고 약속하면 가만히 있을게.”

“알았어.”

어두워서 붉어진 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듯해 다행이었다. 모델의 협조를 얻어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해 나갔다.

권이태는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자세를 잡고 앉아서 래화를 구경했다. 그냥 그림 그리는 모습인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래화는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볼펜을 움직였다. 모델을 확인하려 눈을 올린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권이태가 눈매를 가늘게 휘며 말했다.

“방송 말이야.”

“응.”

“같이 나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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